생활의 양식/역사,인물

덕(德)있는 지도자

풍월 사선암 2015. 1. 8. 11:13

()있는 지도자

   

은나라 탕왕이 젊었을 때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사냥꾼이 사방에 그물을 쳐 놓고 새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탕왕은 “저러다가는 새의 씨가 마르겠구나.” 싶어서 몸소 그 그물을 거두어 버렸습니다.

 

후에 이이야기를 들은 제후들은 “왕의 덕이 백성뿐만 아니라 금수에까지 미치는구나!” 라고 그를 칭송했습니다.

 

그 후 탕왕은 천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천자가 되고 나서 7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태사(太師)에게 물었더니 아무래도 제물로 사람을 바쳐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가 기우제를 드리려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 기어코 사람을 바쳐야한다면 차라리 내가 희생되고 말겠다.”

 

탕왕은 목욕재계하고 손톱을 깍고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장식이 없는 흰 수레에 흰말을 타고 스스로 제물이 되려고 뽕나무 밭으로 나갔습니다. 그런 다음 스스로를 꾸짖는 여섯 가지 조항을 하늘에 아뢰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저희 백성을 괴롭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제가 베푼 정치에 덕이 부족하고 절제가 없어 사회기강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백성이 일을 하지 않고 곤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까?

저의 궁전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입니까?

궐 안에 음모가 성하여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까?

뇌물이 성행하여 정도를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로 인해 어진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커다란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장대비가 쏟아져 수 천리 땅을 적셔주었다고 합니다.

 

 

인재발굴의 리더십 - 탕왕과 이윤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이전에도 은나라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삼고지례(三顧之禮)로 맞이한 일이 있습니다.

 

은나라 좌상(左相)인 중훼가 하나라의 걸왕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는 중에 유신국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우연히 노예 이윤의 슬기롭고 현명한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탕왕은 훌륭한 인재를 열심히 찾고 있었으므로 이윤의 소식을 듣고 이윤을 데려올 목적으로 유신국으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윤을 데리러 사신국으로 간 사신의 오만불손하고 방자한 모습을 본 이윤은 은나라로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유신국 왕은 이윤을 데리러 사신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윤이 은나라로 가면 자신이 불리할 것 같아 이윤을 하옥시켰습니다.

 

탕왕은 어떻게든 이윤을 데리고 오고 싶은 생각에 유신국의 공주와 혼사를 맺으면서 공주의 종으로 이윤을 데려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윤은 은나라로 오게 되었고, 탕왕은 이윤의 뛰어난 모습에 반해 그를 우상(右相)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윤의 활약으로 은나라는 더욱 강력해졌고, 하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탕왕이 죽은 후 탕왕의 세 아들이 연이어 왕이 되었으나 다들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탕왕의 손자인 태갑이 왕이 되었으나 태갑은 정사는 신경 쓰지 않고 음주가무에만 빠져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윤은 태갑에게 하나라 걸왕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를 얘기하며 충고했지만 태갑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이윤은 하는 수 없이 태갑을 탕왕의 능묘부근에 연금시키고 죄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3년이 흐른 후 태갑은 죄를 뉘우치고 검소한 모습의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윤은 몹시 기뻐하며 태갑을 다시 왕위에 앉혔습니다.

 

맹자는 왕을 쫓아내는 경우 정당성에 대한 기준으로 이윤을 예로 들면서 이윤과 같은 뜻이 있으면 옳은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렇듯 후대의 사람들은 이윤을 충신의 전형으로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