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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39):백사 이항복(中)

풍월 사선암 2014. 11. 27. 12:13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39):백사 이항복()

 

청빈하고 검소한 가풍 덕에 후손들도 모두 장수

 

이항복은 당시로서는 아주 늙으신 아버지로부터 정기를 물려받았는데다 낙태하려고 극약을 복용한 모친으로부터 태어났기에 미숙아로서 겨우 세상에 나왔지만 다행히 15세까지 동네에 나가 어울려 놀기를 즐긴 탓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평생을 해학과 유머 속에 살았기에 임진왜란을 비롯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고 60세를 넘길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항복은 63세에 돌아가셨으니 당시로서는 오래 살았던 것이지만 그렇게 장수한 편은 아닌데, 이유가 있습니다.

 

이항복이 장수하지 못한 이유는?

 

첫째, 외롭고 힘든 만년을 보냈습니다. 58세에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 죽인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벌어지자 좌의정 자리에서 내쫓겨 도성을 떠나야 했고, 뚝섬과 노원, 망우리 등지로 이사를 다니면서 4,5년을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에서 쫓겨난 탓에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평소 남들과 어울려 재담을 잘 하던 터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갑니다. “슬픔은 그대로 놔둬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하지만 완전한 기쁨을 얻으려면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보면 함께 할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죠. 노년에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려야 건강 장수에 유리한데, 이항복은 외롭고 쓸쓸하게 보냈으니 심신이 허약해지고 노화가 진행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당시 거처는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두실(斗室)에 불과했고, 끼니도 거친 밥에 채소 반찬으로 겨우 이어나가는 정도였습니다. 주거 환경이나 식생활 면에서 노인의 건강을 지키는데 최악의 조건이었죠. 심지어 아들의 혼사를 치를 비용도 없는 지경이었다니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처지에도 이항복은 편안하게 경전에 침잠하여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산과 물가에 노닐면서, 때로 흥이 나면 노새에 몸을 싣고 동자 하나 앞세워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나서니 그를 보는 사람들은 단지 시골 노인으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그때 지은 시 한 수를 보면 당시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눈 온 뒤 산속의 사립은 늦도록 열지 않았고 雪後山扉晩不開

개울가 다리에는 한낮에도 찾아오는 이 적구나. 溪橋日午少人來

화로 안에 묻어놓은 불 대단히 따뜻해 篝爐伏火騰騰煖

주먹만 한 밤을 손수 구워 먹노라. 茅栗如拳手自煨

 

둘째, 늙은 나이에 매우 추운 지방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62세 때 대북파에서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려고 하자 부당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이 진노하여 다음 해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미 중풍으로 고생하던 이항복은 결국 그 곳에서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죠.

만약 귀양만 가지 않았어도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귀양지가 그 추운 곳이 아니고 따뜻한 남쪽이었더라도 좀 더 오래 사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노인, 특히 중풍이 온 경우에는 추위가 위험요소이기 때문이죠. 추워지면 혈관벽이 압력을 받아 혈압이 오르게 됩니다. 삼수, 갑산이나 북청 같은 북쪽의 극변지방은 날씨가 매섭게 추운데다 토지가 메말라 먹을 것도 귀하다 보니 귀양 온 분에게 나눠 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반면에 남쪽지방으로 귀양을 가면 겨울에 훨씬 덜 추워 지내기에 좋고 먹을 것도 많지요.

 

이항복의 후손들은 대대로 장수집안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이회영(왼쪽)과 이시영.

 

이항복 대감의 경주이씨 백사공파는 백사 이래로 10명의 정승을 배출하여 <상신록(相臣錄)>을 만들어 보유하고 있는데, 사후에 정승으로 추증된 경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승을 지낸 열 분의 나이를 살펴보니 평균 수명이 무려 70.1세나 되었습니다. 두 분이 80세를 넘겼고, 두 분이 70세를 넘겼으며, 단 한 분만이 60세를 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승을 지내지 않은 후손들도 대부분 장수했습니다.

 

후손 가운데 전심전력을 기울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6형제도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후에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한 형제들인데, 건영(健榮, 1853~1940), 석영(石榮, 1855~1934), 철영(哲榮, 1863~1925), 회영(會榮, 1867~1932), 시영(始榮, 1869~1953,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호영(頀榮, 1875~1933)입니다. 둘째인 이석영이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 형제들은 59세에 사망한 막내 한 분을 제외하고는 매우 장수한 편입니다. 세 분이 80세를 넘겼으며 평균 수명이 73.5세나 됩니다. 만약 우당 선생이 일제에 체포되어 중국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66세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평균수명이 훨씬 더 올라갔을 것이죠.

 

이항복의 후손들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테레사 수녀(왼쪽)와 슈바이처.

 

우선 청백리로 선정된 이항복의 청빈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가풍을 이어받았기에 장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형제의 장수는 우연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넓고 편안해져 건강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물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좋은 일을 할 수 있겠죠.

 

실제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1998년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봉사활동을 하거나 선한 일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람의 침 속에 들어 있는 면역항체 'Ig A'는 근심이나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줄어드는데, 봉사와 사랑을 베풀며 일생을 보낸 테레사 수녀(1910~1997)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본 학생들의 'Ig A' 수치가 일제히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하여 일어나는 변화를 마더테레사 효과또는 슈바이처(1875~1965) 효과라고 합니다. 물론 테레사수녀는 88, 슈바이처박사는 91세까지 장수했죠.

 

이와 함께 실제로 남을 도우면 최고조의 기분을 느끼게 되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도 있습니다.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돌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고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기부한다면 분명 건강 장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