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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산하 나무 84%는 박정희 때 심은 것

풍월 사선암 2014. 11. 18. 22:30

전국 산하 나무 84%는 박정희 때 심은 것

   

1. 초인적 열정을 보인 대통령의 나무사랑

   

조립사업과 함께 진행된 사방 사업은 당시 산림 녹화의 핵심 사업이었다. 영일지구 사방 사업은 박정희 시대 가장 특기할 만한 국토 개조 사업이다.

 

1971917일 우수 새마을 시찰자 이 곳을 지나면 박정희가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 보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이 곳이라며 완전 복구를 지시함에 따라 1973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1977년까지 총 공사비 382,800만 원, 연인원 360만 명이 투입돼 황폐지 4,538ha를 녹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소요된 묘목만 2,400만 그루, 돌과 뗏장은 각 230만 개에 달했다.

 

일에 대한 초인적 열정으로 주위를 사로잡았던 박정희의 특징은 여기서도 그대로 발휘됐다. 당시 경북 도청 산림국장을 지낸 박상현 씨의 증언을 들어 보자.

 

“1975417일 그 날은 폭풍우가 엄청나게 몰아쳤어요. 그런데 박대통령께서 해병대 지프를 가져오게 해 현지로 가자는 거에요. 영일 군청에서 브리핑 장소까지 헬기로 2-3분이면 되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지요. 3m 미만의 비포장 도로를 기어가다시피 하는 동안 김수학 경북지사는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피멍이 들고 난리인데도 굳이 현장을 보시겠다니........”

   

(대통령의 산불 담화문’)

 

박대통령은 곡강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주변 플라타너스 10여 그루가 2-3m 높이로 잘려 나간 것을 발견했다. 전봇대를 세우면서 전깃줄에 닿을 위험이 있다며 잘라 버린 것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김 지사에게 저거 누가 잘랐어? 20-30년 걸려야 저런 나무 하나를 키워 내는데 그래 3만원짜리 전봇대 때문에 그걸 잘라냈단 말이야. 당장 조치해 보고하시오라는 불호령이 떨어 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열정이 아니었던들 일제가 1907년부터 50차례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화전 정리 사업도 산림 녹화에 한몫 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펼쳐진 이 사업은 공비 소탕 작전 하듯 군용 헬기까지 동원, 강원 경북 충북 등 깊은 산간 지방에 흩어져 있던 30여만 가구를 정리했다. 당시 강원도 철원, 화천군 산림과장을 지낸 김금철씨는 화전 부락에 들어 갔다가 술 취한 화전민이 낫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해 도망간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전남 승주, 경북 상주 등지에서 대형 산불이 잇따르자 19784산불 예방에 관한 대통령 특별 담화문을 발표한 것 역시 박정희의 산림 녹화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산불 담화문의 일부이다.

 

'... 산불을 낸 사람은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처벌하도록 하는 동시에 산불이 발생한 지역의 군수 등 각급 행정 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이며....’

 

2. 韓牛 식성을 바꿔버린 朴正熙 대통령

   

산림 녹화에 아이디어가 많았던 대통령

 

어쩌면 이 시기(1962)에 박대통령의 머리는 수출과 산업화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산림녹화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 모른다. 박정희가 산림 녹화에 다소 소홀했음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은 1973116일 손수익(한국경제사회연구원 회장)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면서 던진 당부의 말씀에서 어렴풋이 확인된다. 고속도로, 공업화, 새마을 운동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치산 녹화가 잘 안되고 있어. 임자가 맡아 치산 녹화를 이룩해 봐.”

 

손 청장은 58개월 간 재임하면서 집무실 입구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라고 써붙여 놓고 1차 치산 녹화 10개년 계획(1973-82)을 진두 지휘, 예정보다 4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손씨가 19969월에 산림청이 주관한 치산 녹화 현지 순례에서 밝힌 회고담이다.

 

“1975년 박 대통령의 경기, 경북 연두 순시 때 수원에서 대구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했습니다. 가시는 동안 경부고속도로 양편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150분 동안 무려 50, 3분마다 한 건꼴로 지시했습니다. 받아 적느라 손이 저릴 정도였지요.”

 

임도(산불 진화나 병충해 방지 작업 등을 위해 만든 산길)을 횡으로 내도록 한 이른바 추풍령식 조림큰비가 올 때 한꺼번에 흘러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볼 때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 같아 보기에도 좋다는 박정희의 아이디어였다. 1977년부터 11월 첫째 토요일이 육림일로 지정된 것 역시 그 해 식목일에 박정희가 가을에는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반드시 확인하라고 지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박정희의 산림 보호 열성은 수천 년 이어온 한우들의 식성까지 바꿔놓았다. 농림장관과 초대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김보현 씨의증언이다.

 

“1972년 여름 경제 동향 보고 회의 때 박 대통령께서 소에게 끓인 여물을 먹이느라 땔감이 많이 들어가니 생품을 먹이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고 합디다. 실험 결과 끓여 주는 것보다 영양가가 높게 나왔어요. 그 때부터 전국적으로 소에게 생풀 먹이기 운동을 벌였지요.”

 

1973년부터 벌어진 농가 아궁이 개량 사업, 1975년부터 나무와 수자원 보호를 위해 취해진 낙엽 채취 금지령도 그의 지시였다. 연탄 사용을 장려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을 지낸 김의원씨는 무연탄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탄광에서 인근 철도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우선적으로 닦았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강원도 인제군에서 줄을 띄워 나무를 심는 모습. 작업인부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산 밑에서 좋은 흙을 한 짐씩 짊어지고 올라가 사방사업지의 씨 뿌릴 자리와 나무 심을 자리에 깔기도 했다.

   

3. "나무도 사람 같이 대접해야"

 

1975827.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청와대 기자실에 들렀다. 그곳에 있던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집에 별 일 없지요라고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관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전에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산들이 모두 기계충에 걸린 것처럼 흙이 많이 보여서 마음이 삭막했었는데, 요즈음은 모두 푸르게 변해 마음도 시원해요.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입산 금지시키는 것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삼성의 李秉喆 씨가 용인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입산 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李秉喆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李秉喆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山林에 관한 일을 한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시험해 보니 그게 진리더라고 李秉喆씨가 나에게 얘기했어요. 회장이 그 교수를 찾아가서 감사(謝意)를 표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나에게 지금은 장작을 때지 않으니까 산을 자연 그대로 두고 해충약이나 뿌려 주고 비료를 주면 우리 나라도 산림대국이 될 수 있다고 권하더군요. 우리 나라도 조선조 500년 동안 연료로 쓰려고 나무를 자르기만 했지 육성은 하지 않아서 산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린벨트를 설정했는데, 일부 공무원들이 게을러서 현장에는 가보지도 않고 탁상에서 대강 짐작으로 줄을 마음대로 긋는 통에 일부 고장에서는 국민들이 불편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집은 반이 그린벨트에 들어가버려 손도 못 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방을 넓힐 수도 없어서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장가도 못 보내는 집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린벨트는 다시 공중 촬영해서 조정해야 됩니다. 산을 푸르게 하고 홍수를 막고자 여러 가지 이점을 생각해서 그은 그린벨트가 이러한 결과를 낳아서야 되겠습니까? 잘 살자고 한 시책이 국민들을 괴롭혀서야 되겠는가 말이오. 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니 여러분도 공사가 한창인 중동에 한 번 다녀와요. 여비는 내가 대줄 테니.”

 

(그 후 기자단에서는 여행 계획을 세우다가 일부 기자들이 사막에는 가서 뭐 할 거야하고 반대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않았다.)  

 

4. 환경보전정책의 최고걸작 - 그린벨트

 

외국에선 “20세기 각국의 국토 계획 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환경보전 정책의 백미라는 극찬을 받고, 국내에선 대도시 주민들에게 숨쉴 공간을 마련해 준 박정희의 최대 걸작이란 칭찬을 받고 있는 그린벨트. 이 그린벨트는 19717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수도권 일부를 묶는 것을 시작으로 1977418일 전남 여천 일부를 지정하기까지 전 국토의 5.4%5,397.1km2를 지정하였다.

 

대선, 총선, 개각 등 정국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1971612일 오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그리고 김 국장.”

노타이에 검정 양복 차림의 박대통령은 김의원(金儀遠) 건설부 국토계획 종합담당관(부국장)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16절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양택식 서울시장, 김태경 경기도 도지사, 김용석 건설부 도로국 국장에게 도로 재정비 지시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린벨트란 거 있지, 그린벨트.” 영어로 “Green Belt"라고 쓴 박정희는 자신이 금방 스케치한 수도권 도로망 외곽에 두 줄로 띠를 두른 뒤 말을 이었다.

 

이렇게 빙 둘러쳐 봐. 빨리 계획짜서 가져와.” 이것이 그린벨트와 관련된 박정희 대통령의 첫 지시였다.

   

(비밀리에 입안된 그린벨트 계획안)

 

박정희 대통령의 그린벨트 구상을 누가 건의했는지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린벨트는 행정, 법률 용어가 아닌 학술 용어에 불과했다. 영국 런던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제도였다.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도시국장 등을 거치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대 그린벨트 업무를 주도했던 김씨는 이한빈 전 부총리, 주원 전 건설부 장관 등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 역시 주영(駐英 )대사들로부터 그린벨트 얘기를 들으시고 관심을 보이신 적은 있다박정희 아이디어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동훈 전 통일원 장관은 “1969년 말인가 1970년 초 청와대 정무비서관 시절에 박대통령으로부터 수도권 인구 억제 대책을 연구,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린벨트 제도 도입을 건의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그의 증언이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런던의 사례 등을 참고해 비밀리에 만들었습니다. 미관과 환경 등을 고려해 도시 주위에 녹지를 일정한 둘레로 돌리면 좋겠다는 착상이었지요. 그 때 성남이 막 생겨나고 있었는데 서울과 성남 사이에 그린벨트를 설치해 격리함으로써 성남을 위성 도시, 베드타운으로 만들자는 식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은 한 마디로 OK였습니다.

 

그걸 보고한 때가 1970년 가을입니다. 개발제한구역이란 말은 나중에 붙인 것이고 그냥 그린벨트라고 했지요. 박대통령께서 그린벨트, 그거 분명히 영어지하시면서 욕 먹더라도 강력한 조치 한번 해보지라고 하데요.”

 

+++ 급속한 도시화, 공업화로 19717월에 서울 인구가 543만 명에 달하는 등 인구의 대도시 집중화 현상은 당시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변두리에 즐비한 판자촌은 안양, 의정부 등으로 마꾸 뻗어나가고 있었다. 일부 기업과 부유층에 의한 부동산 투기 열풍은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나 그린벨트라는 기상천외한 조치로 수도권 일대의 부동산 투기는 가라낮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의원 부국장이 며칠 뒤에 가져온 초안을 퇴짜놓았다. 구파발 검문소와 삼송리 검문소 사이에 북한산을 끼고 흐르는 창릉천 주변, 불광동 기자촌 일대 등 몇 군데를 빠뜨렸다는 이유였다. 축척 5만분의 1 지도위에 그린 초안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책상 서랍을 열어 뭔가 유심히 들여다 보고는 돌아 앉아 여기는 왜 뺐어라며 일일이 지적했다.

 

김 부국장이 집없는 기자들이 집을 짓겠다고 터를 닦고 있는데 그린벨트에 포함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래도 포함시켜라고 일축했다.

 

며칠 뒤 2차 초안에서도 창릉천 주변은 빠져 있었다. 서울이 북쪽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라고 이유를 설명하려는 김 부국장의 말을 가로막은 박정희 대통령은 참 답답한 친구들이네라며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김 부국장이 탄복하고 물러 나왔다며 들려 준 박정희 대통령의 그린벨트 안보관은 이런 것이었다.

 

남북이 다시 맞붙어 불행히도 우리가 서울까지 후퇴했다고 치자. 그러면 (인민군) 2,3개 사단을 이 계곡에 몰아넣고 북한산에서 공격하면 섬멸시킬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에 시가지를 조성하면 안 돼.”

 

그린벨트에는 결코 예외가 없었다. 그린벨트 주무 장관인 태완선 당시 건설부 장관은 취임 후 첫 작품인 그린벨트 때문에 재산을 날렸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울 남태령고개 부근의 임야 5,000평이 1차 그린벨트 지정고시에 묶여 버린 것이다.

 

실무진이 작성해 온 최종안을 보고 나서 그는 허허, 난 망했군, 망했어라고 쓴웃음을 짓다가 그래도 공정해야지라며 결재했다고 한다. 국세청 내사를 통해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상태를 손바닥보듯 알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태 장관을 두고 그 사람 참 양심적인 사람이야라고 칭찬했다고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을 지낸 오원철 씨는 증언했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그린벨트 관리)

 

대통령 박정희가 꼬치꼬치 주사 노릇을 한 분야가 그린벨트다. 그는 건설부령 그린벨트 관리 규정을 처음 결재할 때부터 겉표지에 건설부 장관이 개정할 수 있으되 개정시에는 반드시 대통령의 결재를 득할 것이라고 써 놓아 주무 장관의 재량권을 사실상 봉쇄했다.

 

 

작은 구멍 하나가 큰 둑을 허문다는 소신을 가졌던 그의 그린벨트에 대한 의지는 냉혹할 정도였다. 1977년 여름 문턱으로 접어들던 때의 일이다.

 

, 각하, 참으로 딱한 사연이 있습니다만.”

 

6척 거구에 화통한 성격의 신형식 건설부 장관이 그답지 않게 조심조심 이어나간 얘기는 이러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은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수리산 기슭에 천주교측이 전국의 수녀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영장을 마련했다. 그런데 화성 군청은 1976124일 그 곳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불도저를 동원해 수영장을 메워 버렸다는 것이다.

 

수녀들이 남들처럼 해변에서 수영할 수도 없고.......”

 

선처를 바라는 신 장관의 조심스런 진언에 박정희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람아. 수녀들에게 그렇게 해 주면 스님들은 가만 있나. 종교가 어디 한 두개야?”

 

박정희 대통령은 또 그린벨트 내 군부대 초소의 기왓장 몇 개 바꾸는 것까지 건설부의 사전 허락을 받도록 했다. 자존심이 상했던지 한 국방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대 안 그린벨트는 군이 관리하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가 군인들은 법을 잘 지키나? 건설부 통해서 해!”라고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는 것이 김의원 씨의 증언이다.

 

1972년부터 79년까지 2,526명의 공직자가 그린벨트 관리 잘못으로 징계를 받았다. 징계 내용은 파면 191, 감봉 114, 견책 229, 직위 해제 2, 경고 주의 훈계 1,990명이다. 그린벨트 지역 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사표를 내놓고 일한다“(그린벨트 감사에 비하면) 감사원 감사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이 나돌았다.

 

박정희 대통령 생존시 신성 불가침이었던 그린벨트,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선거철 등 민감한 시기마다 조금씩 느슨해지다가, 1997911일 발표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건설부의 파격적인 규제완화 예고로 이제는 존립의 근거마저 위협받고 있다.

 

일본 국토청 차관을 지낸 시모고베 야츠시는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의 경제 자문관으로 있던 1980년대 초 베이징과 상하이 같은 대도시 주변에 그린벨트를 두르는 것이 후일을 위해 바람직하다상세한 것은 한국에 알아 보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5. 대한민국 山河의 나무 84%朴正熙 대통령 심은 것.

   

박정희 대통령의 산림 육성에 대한 열정

 

미국의 한 하원 의원이 지난 1997년 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 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가 탄성을 내뱉은 이유는 더욱 주목을 끌었다. 얼핏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들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남북한 간에 천양지차인 산림 녹화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산하는 온통 붉은 빛을 띤 반면 남한은 녹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남북한 사정은 정반대였다. 한국의 산이 오늘의 북한처럼 벌거벗은 상태에서 푸른 옷을 입게 된 것은 불과 20년 안팎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1984년 임업 통계 요람에 따르면 남한 전체 임목 면적의 84%20년생 이하, 즉 나무 10그루 중 8그루 이상이 박정희 시대에 심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엔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 사업 성공 국가로 꼽고 있다.

 

산림 녹화에 대한 박정희의 의지는 196412월에 서독 방문을 마치고 산림 관계자들에게 한 오기 서린 말 속에 배어 있다.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는 유럽에 안 간다.”

 

경제 개발 자금을 얻기 위해 잔뜩 기대를 걸었던 서독 방문에게서 기대이하의 차관을 약속받은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는 이후 다시는 유럽을 방문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경제 고문으로 서독 방문 때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씨는 박대통령은 서독의 정돈된 농촌과 푸른 산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집권 초의 박정희는 산림 녹화 의욕에 비해 경험이 못미쳤던 듯하다. 녹화 촉진 임시조치법(19632월부터 196412월까지의 한시법)을 마련하여 공무원, 학생, 병역 미필자들을 나무심기 사방 사업에 투입하는 등 강력한 산림 보호 시책을 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농산물 증산을 위해 개간 촉진법(19622)을 시행, 산지 야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http://www.ilbe.com/4685265806/출처:일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