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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 최초 인터뷰

풍월 사선암 2014. 11. 6. 23:30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겐 감사를미워하는 분들에겐 사과를"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 최초 인터뷰]

 

"남편(춘원)을 살릴까 아들을 살려야 할까 오락가락하던 어머니결국 아들을 택했어요"

"어머니의 현실적인 눈에는 '위선자'로 비쳤을 아버님그런 고귀한 사상은 인간으로는 가질 수 없기에"

 

이정화 박사가 '춘원 연구학회' 참석을 겸해 미국서 잠깐 방문했다. 그는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막내딸이다.

 

숙소인 서울 시내 YMCA호텔에서 만났다. 여든 살의 노인인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곱고 세련됐다. 그는 "한국말이 서툴다"고 말했다. 전쟁 통인 1952년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6·25 때 가족이 이민을 떠난 겁니까?

 

"부산에 피란을 내려와 이화여고를 다닌 뒤 언니와 함께 화물선을 타고 미국 유학을 떠났어요. 국방부에서 일하던 오빠는 휴전이 되고 나서 왔어요."

 

춘원을 '친일파' '매국노'로 몰고 간 한국 사회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떠난 건가요?

 

"아니오. 우리는 애국심이 있어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자리를 잡게 된 거죠. 자식들이 모두 미국에 있으니 어머니(허영숙)1963년 건너왔어요."

 

오빠는 한국에 거의 발길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여섯 살 위 오빠와 두 살 위 언니가 있어요. 두 분은 미국서 한국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별로 오지는 않았어요. 저 같은 '건달'이나 오지. 여기에 오면 밤낮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되는데(웃음), 이건 농담이에요. 오빠는 저를 보내 모든 심부름을 시켜요."

 

이정화 박사는 "지금 서울 효자동의 '연정'이라는 한정식 집이 6·25 때 우리 집이었다"고 말했다.

 

춘원이 1949'반민특위'에 기소돼 수감됐을 때 '병든 아버님을 풀어주고 나를 대신 잡아넣어라'는 혈서를 썼던 오빠지요?

 

"혈서를 쓸 때도 바늘로 톡 찌르면 될 텐데 그냥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네요. 가슴 아픈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오빠는 좀 쉬도록 해야죠."

 

춘원은 6·25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됐다. 북으로 끌려간 그는 195010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58세였다.

 

6·25 당시 춘원이 납북될 때 가족이 곁에 있었나요?

 

"당시 아주 얌전한 어린 인민군이 내무서 직원과 함께 잡으러 왔대요. 어머니가 인민군 앞에 큰절을 하며 '잡아가지 마라'며 빌었어요. 그러자 인민군이 '절하지 마세요. 봉건주의 사회에서 배운 나쁜 풍습이에요'라고 했대요. 이 장면을 보고 아버님이 빙그레 웃으며 '부인이 남편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나쁜 풍습이 아니다'고 했답니다."

 

그게 생이별이 됐군요?

 

"아버님은 한 번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잡혀갔어요. 그때 우리 가족도 집에서 쫓겨났어요. 지금 서울 효자동의 '연정'이라는 한정식 집이 우리 집이었어요."

 

당시 춘원은 왜 몸을 피하지 않았죠?

 

"피신할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남편을 살려야 할까, 아들을 살려야 할까'를 놓고 오락가락했어요. 아버님에게 '도망가라'고 했다가 나중엔 '가지 마라'고 했대요."

 

무슨 뜻이지요?

 

"그때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갈 나이였어요. 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어요. 아버님이 도망가면 집을 뒤져 오빠를 찾아냈을지 몰라요. 엄마의 본능은 역시 아들이었어요."

 

춘원 이광수

 

어머니(허영숙)는 그런 선택에 대해 어떤 말씀을 했나요?

 

"후회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요. 나중에 아버님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미국서 장례식을 행했어요. 어머니는 '당신의 생각이 너무 높아서 돌아가신 뒤에야 위대함을 알았다. 함께 살 때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 하늘에서 만나면 착한 부인이 되겠다'고 했어요. 생전에 아버님을 많이 구박했지요(웃음). 어머니의 현실적인 눈에는 아버님이 '위선자'로 비쳤을 테니까요."

 

남편인 춘원이 '위선자(僞善者)'로 비쳤다니.

 

"아버님이 말하는 그런 고상한 사상은 인간으로는 가질 수가 없다는 거죠.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었고,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요. 자신이 운영하는 산후원(산부인과 병원)에서 일을 잘 못하고 말 안 듣는 의사나 간호사의 뺨을 때리기도 했어요. 소설(小說)의 주인공이 돼도 좋을 캐릭터이지요. 흥미로운 일생을 사셨어요."

 

집안에서 부부의 역학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아버님이 꼼짝 못했어요(웃음). 아버님이 쓴 '아내의 설교'라는 시가 있어요. 화자(話者)를 어머니로 한 것이지요. '당신은 악인(惡人)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善人)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나는 손이 다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이라도 돼 주소서'라고요."

 

말하자면 아내의 '잔소리'이군요.

 

"사실 아버님은 어머니에게 의지해 살았지요. 아버님이 신장과 허파를 하나씩 잘라내고 생사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곁에서 어머니가 돌봐주셨어요. 아버님의 작품 중 '사랑'은 침상에 누워 구술해서 썼다고 합니다."

 

춘원과 허영숙은 도쿄(東京) 유학 시절 만났다. 춘원에게는 이미 중매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춘원은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뒤 상하이로 건너갔다. 거기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허영숙이 중국까지 춘원을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 집이 부자였어요. 집 안 금고를 뜯어 돈을 챙기고는 '제 몫의 상속을 포기합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나왔다고 해요. 여자 혼자서 열차를 타고 찾아간 겁니다. 어머니는 갖고 온 돈으로 상하이에서 산후원을 열고는 아버님과 살림을 할 생각이었지요."

 

상해 임정에서는 "허영숙이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고 이광수를 귀국시켰고 타락시켰다"는 말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상하이의 호화로운 호텔에서 아버지와 하룻밤 지냈대요. 이 소문이 나자 임시정부에서 '일제 앞잡이 허영숙을 잡아라'는 체포령이 떨어졌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아버님에게 '허영숙을 보내고 자네는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유서를 남기고 양자강에 몸을 던지려고 했대요.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물이 더러워서 못 했다'는 거예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랬겠지요(웃음)."

 

허영숙이 춘원을 귀국시켰다는 비난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그때 이미 춘원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상해 임정에서 2년을 지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국내 상황 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춘원은 상해 임정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춘원은 '친일파'의 길로 가지 않았겠지요.

 

"성삼문과 안중근 의사는 독야청청하신 분이고, 아버님은 정이 많은 예술가였으니."

 

적극 항일(抗日)에서 현실 타협으로의 노선(路線) 변화를 보여준 춘원의 첫 번째 작품이 '민족개조론'(1922)이었다. 열등한 민족성으로는 당장 독립하는 것이 시기상조이니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글이 발표된 뒤 청년들이 집으로 몰려와 '춘원 나와라'고 외쳤대요. 한 청년은 칼을 들고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벌벌 떠는데, 아버님은 뚜벅뚜벅 걸어나가 청년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였어요. 대화를 나눈 뒤 청년들이 얼마간 설득돼 그냥 돌아갔대요."

 

춘원이 '적극적 친일'로 간 것은 1937'수양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면서다. 수양동우회는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전위조직으로 교육·계몽·사회운동 단체였다. 일제가 이 단체의 회원들에 대한 대규모 단속을 벌였고, 춘원은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했다. 그 뒤로 춘원은 '나는 천황의 신민.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며 창씨 개명을 했다. 그는 학병(學兵)을 권하는 글도 썼다.

 

춘원이 '적극적 '친일'로 갔을 때 어머니는 뭐라고 했나요?

 

"수양동우회 사건에 41명이 연루됐어요. 자신은 친일 누명을 쓰더라도 이들의 유죄를 막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당신 미쳤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며 울었답니다. 아버님도 울면서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고 했대요. 아버님은 일제에 계속 저항하면 한글이 폐지되고 민족도 말살된다고 봤어요. 과대망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춘원이 정말 그런 고귀한 뜻을 갖고 친일을 했다고 믿습니까?

 

"아버님은 아기 같은 면, 영적(靈的)인 면이 있었어요. '무차별 사랑' 같은 불교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어요. 광복이 된 뒤에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고백했어요.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 매도될 줄은 몰랐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자살을 못 한 나로서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광복된 뒤 아버님이 '마음이 괴로울 때 읽어라'며 성경을 주셨어요. 표지 안쪽에다 붓글씨로 '자안시중생(慈眼視衆生·모든 중생을 자비롭게 보라)'을 써줬어요. 또 염주를 주시며 '내가 보고 싶을 때면 관세음보살을 불러라'고 했어요. 마치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 같아요. 6·25 때 우리가 집에서 쫓겨나올 때 인민군이 짐 보따리를 조사해 그 속에 어머니가 감춰둔 돈은 모두 압수했어요. 성경과 염주를 보고는 '이런 건 다 쓸데없는 것이에요'라고 말하면서도 되돌려줬어요. 지금도 제가 갖고 있는 아버님의 유품입니다."

 

한국에 들어오면 '춘원의 딸'이라고 밝히는 게 쉽지 않지요?

 

"제 전공이 분자생화학인데, 1980년대부터 한국의 대학에서 네 번이나 초빙돼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어요. 한 번은 기자가 알고 찾아와서는 '사과할 뜻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온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는 안 받아도 좋은데, 좀 그렇구나 싶었어요. 연좌제(緣坐制) 비슷한 게 있으니 제 팔자는 민족 앞에서 사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섭섭함이 있군요.

 

"세월이 가면서 정리가 됐어요.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감사를, 미워하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제 입장을 이렇게 밝히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는 미국서 살면서 1998년까지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인도인 독립운동가(작고)와 결혼해 12녀를 뒀다.

 

<입력 : 2014.10.13 05:55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겐 감사를미워하는 분들에겐 사과를"(13일자 A28)

 

"춘원 이광수 선생에겐 공과(功過)가 함께 있다. '춘원은 공이 7, 과가 3' 식으로 균형 있게 말해야지,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춘원을 비판하는 분들에게 미안함을, 칭찬하는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는 이정화 박사 말과 태도는 옳지만, 더 이상 선친 때문에 사과하지 말고 이국 땅에서 한민족임을 잊지 말고 살아주기를 바란다. 춘원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해줄 것이다."

김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