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가진 사돈댁 며느리 데려가 차례 지내겠다네요
한가위 보름달은 둥실 떠올라 한결같은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데, 우리 생각과 마음은 이리저리 엇갈리고 부딪쳐 어지러운 무늬를 만드는군요. 위 세대와 아래 세대, 남자와 여자, 전통과 현실이 서로 눈 흘기며 어긋나는 명절 풍경….
그 안에서 자기 나름의 지혜와 아량으로 자기 나름의 가풍과 원칙을 세워나가려 애쓰시는 노년 가장 한 분이 별별다방의 문을 두드려주셨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시다는 이분에게 여러분의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세요. 과연 고개 끄덕이며 동감하실 분이 많을지, 반대쪽 의견이 많을지 저 역시 궁금해지네요.
홍 여사 드림
저는 육십 대 후반 노인으로 삼 형제를 둔 아버지입니다. 셋 중 위의 둘은 이미 장가를 들어 손자 손녀도 본 할아버지이고요.
시집온 지 십 년이 된 우리 맏며느리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란 아이입니다. 결혼 말이 나올 때부터 저는 그 점이 조금 걸리더군요. 하지만 내색은 안 했습니다. 벌써 둘이 연애를 오래 해온 사이고, 다른 점에서는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였거든요. 그렇게 시집온 뒤로 괜한 걱정을 했던 저 자신이 미안해질 정도로 우리 맏며느리는 매사에 야무지고 음전했습니다. 그래도 명절 같은 때면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그래서 둘째 며느리 들인 후에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마침 둘째도 딸만 둘인 집안의 맏딸이니, 둘이 격년으로 친정에 가서 차례를 지내라고요. 조상을 모시는 차례라는 것은 원칙상 아들과 며느리들에게로 이어지는 것이지 출가외인 몫은 아니지만, 세상이 이만큼 달라졌고, 며늘아기 하는 행동이 어여쁘고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큰맘 먹고 용단을 내린 것인데, 어째 집안 식구들 반응은 시원찮았습니다. 우선 아내가 부루퉁해지더군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둘째 며느리 데리고 명절 차례 지낼 일이 아득하다나요. 최근 몇 년간 시어머니는 신경 쓸 것도 없이 큰애가 다 준비했고, 큰아들 집에서 명절을 지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지요. 둘째 며느리도 썩 반가워하지 않더군요. 친정에 아직 시집 안 간 동생이 있어서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격년으로 명절을 떠맡을 자신이 도무지 없는 것인지….
게다가 큰며느리 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친정 부모님한테는 어림도 없는 소리랍니다.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으면 그 집안 제사가 네 책임이니, 친정 일로 소홀히 하지 말라고 일언지하 거절하시더랍니다.
다들 반대하고 사양하니, 그 일은 그대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오륙 년 세월이 흐른 올해 추석. 안사람에게서 참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둘째 며느리의 친정 동생이 시집을 가서 이제 그 집안에 남은 자식이 없으니, 둘째는 앞으로 친정에서 차례 지내게 보내주잡니다. 하도 기가 차서 따져 물어보니, 며느리가 그렇게 청을 하더라는군요. 시어머니라는 사람은 그걸 또 허락했고요. 어차피 우리 집 명절은 큰애가 잘 지내고 있고 둘째는 거드는 것도 없으니 그리해도 큰 상관이 없답니다. 저는 당치 않은 소리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거드는 게 없으면 거들도록 가르쳐야지, 다 같이 아들 없는 집안의 딸인데, 누구는 맏며느리라 시집 제사 탕국에 빠져 죽게 생기고, 누구는 둘째라 매년 친정 나들이냐고요.
보자 하니, 두 사람 하는 짓이 얄미웠습니다. 평소에 둘째 며느리가 유난히 시어머니한테 사다 안기는 게 많고, 듣기 좋은 소리를 잘합니다. 집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데, 늙을수록 눈앞의 즐거움에 약해지는 것인지, 둘째 며느리한테는 뭐든 수월하게 넘어가주는 것을 옆에서 느껴온 바입니다. 둘째는 큰애 따라가려면 멀었다 소리는 곧잘 하면서 어찌하여 부담을 줄 때는 균형을 맞출 생각을 못 하는지.
또한 내가 허락만 하면 사돈댁도 허락한다는 소리인가? 아들 필요 없다던 애초의 그 기세와는 도무지 맞지를 않는 모습이네요. 둘째 아이 상견례 때 일입니다. 우리 집은 아들 삼 형제, 사돈댁은 딸만 둘. 그래서 제가 농담 삼아 그랬습니다. "세상 참 고르잖네요. 두 집안 아들 딸이 고루 섞여서 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자 사부인이 정색을 하고 그러더군요. "사돈은 딸이 부러우신지 몰라도 저는 아들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요즘 세상에 조상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아들 없어서 아쉬울 일은 없더라고요. 오히려 딸 없으신 사부인이 나중에 많이 외로우실 거 같네요."
농담을 건넸다가 면박을 받고 제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조상 필요 없고 아들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던 양반이 매년 명절에 시집간 딸을 불러다 차례를 지내고 남의 집 아들을 제사에 불참시켜도 되는 겁니까?
저의 반대로 친정으로 못 가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시집 차례상 앞에 불려온 둘째 며느리. 당연히 입이 나와 있더군요. 보는 저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군말 없이 의무를 다하는 사람한테만 등짐을 얹어주는 짓은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습니다. 또한 이해와 아량을 얻으려면 본인의 마음 자세가 어여쁘고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꼭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시집 조상 모시는 일을 건성으로 생각해온 며느리를 친정 조상 모시도록 보내줄 수는 없지요. 보내도 고생한 맏며느리가 먼저지요. 언제든 며느리 격년제나 한번 더 꺼내볼 요량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마누라는 이런 나를 앞뒤가 꽉 막힌 구닥다리 영감탱이라고 눈을 흘기는데, 젊고 많이 배운 세상 사람들 생각이 저는 궁금합니다.
-조선일보 입력 : 2014.09.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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