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무관심’이 강한 아들을 만든다고?
요즘은 ‘근엄한 아빠’보다 ‘친구 같은 아빠(프렌디)’가 대세…‘아빠와 육아’ 소재로 한 예능·서적·교양강좌 인기몰이
◀친구 같은 아빠, ‘프렌디’가 대세다.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육아에서도 아빠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남자들은 /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문정희 시인의 시 <남자를 위하여> 이다. 아버지가 되어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 남자는 시의 말미에서 ‘비로소 자신 속에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딸을 낳은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기는 하나, 딸이든 아들이든 세상 모든 아버지는 이 시를 읽고 어딘가 짠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슴 한쪽이 묵직해온다면 시인의 말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어른’이 되는 것이리라.
아빠들의 전성시대가 왔다.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오! 마이 베이비> 등 남자의 육아를 본격적으로 내세운 프로그램은 벌써 많은 고정 팬을 확보했다. 단지 TV 속 유행만은 아니다. ‘아빠’는 이제 거리로 나와서 활보하고 있다. 상점에서는 아빠와 함께 할 만한 무언가(이를테면 캠핑 같은 것)를 팔고, 여러 기업체와 공공기관에서 아빠들을 위한 강좌를 연다.
‘아빠랑 군대리아 만들기’, ‘아빠랑 별 보기’, ‘아빠와 함께 변신로봇케이크 만들기’, ‘아빠가 해주는 베이비마사지’ 등이다. 2014년 여름, 이마트 문화센터에서는 아빠 참여형 강좌를 1536개 새로 개설했다. 구체적이고 다채로운 강좌명을 보면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놀이가 이렇게 많았는지 새삼스러울 정도다. 아빠가 이렇게 잘 팔릴 줄이야!
‘옆집 아빠’ 따라잡기에 바빠진 아빠들
◀남자 연예인들의 육아체험기를 다룬 <슈퍼맨이 돌아왔다>(KBS). 아빠와 육아를 소재로 한 TV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끈다.
아빠가 불티나는 상품이 되면서 가장 바빠진 건 역시 아빠들이다. 그러니까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옆집 아빠’ 혹은 ‘친구 아빠’를 따라잡기 위해 우리의 아빠들이 바빠진 것이다. 몸이 아니라면 마음이라도 분명 바빠졌을 터. 이제야 알았냐는 듯 자주 인용되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결과는 아빠들의 마음을 더 부채질한다.
아빠의 육아 참여가 아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파급력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이미 시작되었지만, 요즘 들어 유독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영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램은 아빠를 ‘아동 발달의 잊혀진 공헌자’라고 부른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빠와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자란 아들이 자라서 더 남성적이 된다. 흔히 생각하는 다소 무뚝뚝하고 투박한 성향의 아빠가 아들에게 남성적인 역할을 물려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이것은 단지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하워드 스틸은 아빠와의 관계가 훗날 아이의 교우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그의 연구팀이 2001년부터 14년간 100명의 아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아기 때 아빠와 목욕을 함께한 아이가 교우관계에서 문제를 겪는 비율은 그렇지 않은 아이의 10분의 1 정도였다. 미국의 심리학자 칼데라는 아빠가 얼마나 육아에 참여하는지가 아이의 자존감을 좌우한다고 말하고, 미국의 심리학자 로스 파크는 ‘아빠 효과’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아빠와 아이 사이의 유대감이 아이의 지능과 정서를 높인다는 내용이다. 단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벤지스는 아빠와 아이의 유대감이 아이의 신체발달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아빠가 쓰는 어휘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빠와 함께 하는 놀이가 아이의 삶을 어떻게 좌우하는지에 대한 연구결과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연구결과들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이제야 아빠를 알게 됐지?
어릴 때 또래들과 자주 불렀던 노래 중에 <아빠와 크레파스>가 있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술에 취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로 시작되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던, 그래서 ‘술에 취한’ 대신 ‘다정하신’으로 가사를 바꿨다던 그 노래 말이다. 그 노래 속의 아빠,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엄마는 잘 사주지 않는) 사 들고 오는 아빠의 이미지는 당시 아빠들이 다가갈 수 있는 ‘다정한 아빠’의 전형이었다.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는, 좀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물론 자식들이 아빠에게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 아빠의 다정함이란 그 정도면 꽤 무난했다.
그러나 요즘엔 달라졌다. 이제 지갑보다도 입을 열어야 한다. 입과 손과 발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너무 가혹한 주문이라고? 그렇다면 두 문단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저 연구결과들을 읽어보시길. 설령 이제 와서 아빠의 육아 참여와 아이의 삶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이런 결과가 나올 수는 없겠지만!) 연구결과가 추가된다고 해도, 이미 육아에 발을 들인 새 시대의 아빠들은 멈출 생각이 없을 것이다.
<스칸디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의 저자 황선준·황레나 부부는 책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더 티 나는, 수두룩하게 널린 집안일을 하면서 아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형적인 북유럽 남자, 스칸디 대디의 일상적인 일을 큰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기까지,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으로는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했지만 행동은 남성 중심적인 경상도 사나이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나를 아내는 여자의 영역이라고 여기기 쉬운 출산과 양육으로 기가 막히게 끌어들였다.”
경상도 사나이가 스칸디 대디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읽는 것은 아빠가 아니더라도, 남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지금의 우리 사회야말로 머리와 손발, 말과 행동이 다르게 돌아가는 중이니까 말이다. 북유럽에서 훌륭한 지역 토산품 같은 아빠들(‘스칸디 대디’)이 태어나는 동안, 우리의 아빠들은 뭘 하고 있었던 말인가. 교육열 높기로는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왜 남의 아빠를 흠모해야 하느냔 말이다.
우리의 아빠들이 그 역할에 대해 무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물론 그걸 아빠들의 실수 정도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 무심함을 조장한 건 결국 이 사회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아빠에 대한 관심이 단지 한 철 유행이 아니기를 바라는 건 아빠들만이 아니다. <좋은 아빠로 살아보기>와 같은 책 제목을 보라. 우린 아빠의 존재에 대해 오히려 너무 늦게 주목한 셈이며, 이제 막 기회를 얻은 셈이다. 스칸디 대디 뿐만이 아니라 요즘 대세로 떠오른 ‘프렌디(프렌드+대디: 친구 같은 아빠)’, ‘바짓바람’까지 신조어들이 등장하며 우리 사회에 오래 비어있던 구멍들을 채우는 중이다.
슈퍼맨이 된 젊은 아빠
여기 젊은 아빠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서준이 아빠 강병구(34) 씨의 하루는 아침 여섯 시 반부터 시작된다. 일어나자마자 쌀을 씻어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이제 30개월 된 아들, 서준이는 올해 3월부터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서준이를 여덟 시에 깨워 밥을 먹이고 아홉 시 반에 어린이집으로 보낸다. 열 시부터 아빠의 일상이 시작된다. 청소기, 걸레질, 세탁기, 설거지. 밑반찬과 간식 만들기까지 모든 것을 하고 나면 벌써 오후 한두 시가 된다. 그때부터 두세 시간이 아빠에게 주어진 짧은 휴식이지만, 요즘엔 그 시간에도 쉴 수가 없다. 곧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할 예정인 그는 그 몇 시간까지도 활용하고 있다.
오후 네 시 반이 되면 서준이를 어린이집에서 픽업한다. 그리고 이제 기차역으로 간다. 동네의 1호선 기차역은 이들 부자의 단골 산책로다. 서준이는 기차를 유독 좋아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집에 있는 기차 장난감보다도 실제 기차 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기차역에 가서 뭘 하는 거냐고 묻자, 아빠 강병구 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한 시간 동안 기차를 보는 거예요. 기차가 온다, 간다, 온다, 간다. 그 과정을 즐기는 거죠.”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여섯 시 반. 아이와 저녁밥을 함께 먹는데 한 시간이 더 소요된다. 밤 아홉시가 되는 건 금방이다. 그러면 아이에게 잠옷을 입혀주고, 열 시가 되면 책을 읽어주며 아기를 재운다. 물론 아빠는 한참 후에 잠이 든다.
“아이에게 만 3세까지의 시간은 무척 중요하다고들 하잖아요. 어느 시기까지는 아이를 온전히 전담해 돌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엄마든 아빠든,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가족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누군가 한 명은 아이의 성장을 공백 없이 지켜볼 사람이 있어야 해요.”
지금 그 역할을 아빠가 하고 있다. 그가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게 된 건 지난해 9월부터다. 이전까지 그들 부부도 맞벌이를 했다. 서준이가 태어난 후 아내가 회사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아내가 1년 6개월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다시 직장맘이 되기로 했을 때, 이번엔 남편인 강병구 씨가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기로 한 것이다. 번갈아가면서 육아와 살림을 맡는 것, 요즘 30대 젊은 부부들에게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남자는 집밖, 여자는 집 안에 고정시키는 그 역할 관념은 이제 낡은 것. 사회활동이 주는 행복감과 육아가 주는 행복감을 어느 한 쪽에게만 몰아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에 따르는 책임과 수고 역시 어느 한 쪽에게만 몰아줄 필요가 없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고속도로 같은 삶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풍경,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감들을 살펴볼 수 있는 산책로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엄마와 옷 때문에 씨름한 적이 많았어요. 엄마가 의상실을 하셨거든요. 엄마가 아들에게 입히고 싶은 패션스타일이 있는데, 어린 제 취향과 맞지가 않았던 거예요. 전 추리닝만 입고 싶었거든요. 멋진 옷보다는 편한 옷, 늘 입던 옷이 좋았죠. 이제 아이도 옷에 대해 의견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이를테면 추운데 외투를 안 입으려고 한다든지, 더운데 긴 팔 옷을 입으려고 한다든지 그런 거죠.”
◀30개월 된 서준이 아빠 강병구(사진)씨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아내 대신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고 있다.
“육아일기 쓰는 것도 사치죠”
강병구 씨는 아이의 고집을 존중해준다. 아이가 원하는 옷이 있으면 최대한 그대로(계절감에 맞지 않아도) 입힌다. 대신 혹시 모르니 외투는 아이의 가방에 넣어두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아이가 추워하면 외투를 입혀달라고 슬쩍 부탁하는 거다. 강 씨는 육아에 대한 철학이 뚜렷한 편이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꾸리고 가르치는 일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부터 나중에 자녀가 생기면 어떻게 키우고 싶다는 소신이 굵은 편이었다. 그에게 육아일기를 인터넷 공간에 연재하지는 않느냐고 묻자, 돌아오는 답은 이랬다.
“글쎄요. 지금 저한테 블로그나 페이스북은 사치랄까요.”
처음에는 그도 육아일기를 하루에 한 줄이라도 남겨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기를 돌보다 보니 육아일기를 남길 틈도 없었다. 아기가 잠들면 조금 틈이 생기지만 그때는 많은 엄마가 그런 것처럼, 아빠도 잠이 든다. SNS와 같은 공간에 아이의 사진을 올리는 아빠는 많지만, 직접 아이를 키우는 아빠들은 그렇게 한순간을 포착할 틈을 찾기도 힘들다. 그 대신 감동이 이어진다. 순간순간이 벅차서 특별한 어떤 지점을 골라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는 아기가 불쑥 내뱉는 말 하나에 놀라고 배우고 감동한다.
“서준아, 맛있지?” 이렇게 물었을 때, 아이가 이렇게 대답한다면. “아빠, 맛있다!” 그걸로 된 거다.
아이에게 ‘엄마’의 독보적인 입지를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어떤 면에서 육아는 아빠가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약 1년간 육아를 전담한 그는 육아가 남자에게 더 잘 맞는 일이라고 했다. 육아는 힘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근력이 필요하고, 체구도 더 크면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돌이 넘으면 아이는 10㎏이 넘는데, 엄마들에게는 쉽지 않은 무게죠. 그런데 아이는 많이 안아줘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엄마보다는 아빠가 아이를 들어 안아주는 게 좋아요. 물리적인 무게를 생각하면 정말 그렇죠. 유모차의 무게까지 합하면 거의 20㎏이 됩니다. 엄마들이 유모차까지 번쩍 들고 다니는 건 정말 정신력이에요. 한국 사회엔 유모차가 가기 편한 길도 많지 않거든요.”
그의 동네 지하철역만 예를 들더라도,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집에서 그 역까지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육교는 계단으로 되어 있다. 버스도 자유롭지 않다. 그가 살고 있는 경기권만 보더라도 저상버스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배우고 연구할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직접 육아를 맡은 후에 새롭게 보게 된 것들이 많다고 했다.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현재 한국 사회의 육아 및 교육 정책이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서울 코엑스에서 베이비페어 같은 행사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지하철을 이용해서 전시장에 가려고 할 때 동선을 살펴보면 너무 불편해요. 삼성역에서 올라와서 코엑스 전시장까지 가는 길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걸 아세요?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 출구는 코엑스와 연결되는 쪽은 아니거든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건널목을 건너고 굽이굽이 가야 하죠. 코엑스로 바로 빠지는 연결통로에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있는 비탈길조차 없어요. 그래서 행사에 참가하는 아기용품 업체들이 유모차를 계단 아래서 위까지 들어주는 서비스를 해요.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바로 그 부분인데요.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면 예산이 많이 들겠죠. 그게 어렵다면, 젊은 인력을 활용하라는 거예요.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육교를 거쳐야 하면, 그 육교 아래에 상시대기하는 젊은 인력을 써서 유모차를 육교 위 아래로 연결해주는 일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아르바이트나 어떤 서포터즈같은 개념도 괜찮고요. 수당을 지급하면 되죠.”
그는 육아 현장에 있는 사람이 체감하기엔 거리감이 있는 정책이 많다고 했다. 그는 보육 문제는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육아로 인한 공백기가 경력단절로 이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좀 더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
◀강병구 씨는 육아에 대해 “내가 아이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조건
기차를 좋아하는 아들만큼이나 아빠 역시 기차를 좋아한다. 언젠가 그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이동한 경험이 있다. 그 여행에서 꽤 인상적이었던 지역이 스웨덴이었는데, 특히 스톡홀름 시내를 걷다가 불쑥 찾아오는 문화적 충격들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일단 길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그곳의 모든 계단은 다 비탈길과 함께 존재했다.
당시에는 휠체어를 먼저 떠올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휠체어가 가기 편한 길은 유모차도 가기 편한 길 아니던가.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계단을 빼놓고는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이동경로를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비탈길 없는 계단이 많다. 물론 계단이 비탈길에 비해 공간을 덜 차지하기 때문에 만들어질 때부터 공간 효율을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도시는 사용자 입장에서 살기 편한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일 낮에 엄마와 아빠가 함께 유모차를 끌고 걷는 풍경이 정말 많이 보였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때는 그의 나이가 스물여섯. 아직 한 아이의 아빠가 되기 전, 한 여자의 남편이 되기도 전이었던 시절에 20대 대학생이 보기에도 그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한인민박집에 머물렀는데, 주인 남자가 오후 4시면 퇴근해서 집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릭슨이라는 큰 기업에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퇴근하고 집에 와도 오후 4시. 충분히 두 번째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시간 아닌가. 그는 집으로 오면 민박집도 꾸리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청소와 빨래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 광경을 신기한 듯 보고 있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국에서는 일을 너무 많이 해.”
한국의 시스템은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든 구조다. 승진이나 평판, 급여와 같은 부분들을 포기해야만 육아가 가능한 구조다. “한국 사회 안에서 좋은 아빠가 되려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선택해야 하는 부분이죠. 보건복지부와 여성부가 아니라 재정경제부와 고용노동부가 좀 더 보육정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요.”
그 역시 언젠가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더 다행스럽다. 아이가 자라면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린 시간, 그래서 더 많은 부분이 형성되는 시간, 그 인생의 한 부분에 아빠로서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요즘에는 아이가 단어 한두 개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된 말을 하기 시작해서 부쩍 놀라곤 한다.
서준이는 또래에 비해 말이 빨리 트인 편인 데다가, 구사하는 어휘도 폭이 넓다. 이 역시 아빠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 그 아이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런 시간은 아빠인 그에게도 행복이지만 아이에게도 행복이다. 물론 아이는 지혜롭다. 아이에게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하고 물어보면 일주일에 6일(월~토요일)은 아빠가 더 좋다고 대답하고, 하루(일요일)는 엄마가 더 좋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원래 운동을 열심히 했던 그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따로 운동을 하러 갈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짬짬이 아이와 함께 운동한다. 집에서 윗몸일으키기나 맨손체조 정도를 하는 것인데, 아이와 놀아주듯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15분에서 길어야 30분 정도의 움직임이지만 효과가 있다. 그러다 땀이 나면 아이와 같이 목욕도 한다. 물론 먹는 것도 조절한다. 아이가 남긴 음식 역시 아빠의 몫이니 식사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체중관리, 또 체력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남매 아빠’ 이달수 씨가 퇴근 후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맏딸 상지, 둘째 상빈, 막내 상걸.
아빠와 함께 춤을
베테랑 아빠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판타지일지 모른다. 능숙해 보이지만 그 역시 아이가 아플 때면 매번 처음처럼 당황하는 초보아빠다. 아이가 쑥쑥 크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가끔 아프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엄마 뱃속에서 갓 나온 신생아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 앞에서 부모는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육아 관련 서적이나 그 외에 정보들을 찾기 위해 굳이 애쓰지는 않는다.
대신 기본에 충실하려 애쓴다. 그건 아이를 위해 부모는 늘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가 정해놓은 식사량을 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쫓아다니면서 먹일 필요가 없다는 것, 부모가 입히고 싶은 옷이 있어도 결과적으로 아이가 선택하도록 기다려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못 기다릴 것이 없다. 아이의 성장이 더디더라도, 학습성과가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 그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라고, 그는 말한다.
“처음에 생각했던 육아는 굉장히 이상적인 어떤 것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현실적이 되었죠. 처음엔 나의 삶과 아이의 삶이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현실은?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해요. 아이와 함께 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 역시 제 운동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시간은 지옥이 될 거예요. 아이는 도구가 아닐뿐더러 절대 아빠의 운동을 도와주지 않아요.
짜증을 낼 지도 모르죠. 아이는 우선적인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니까요. 답은 하나예요. 내가 아이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 태어나 어느 시점까지는 그게 꼭 필요해요. 육아요? 천사와 지옥에 사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천사잖아요. 천사의 얼굴을 보고 천사의 말을 들으며 사는 거예요. 물론 그 천사에게는 이곳이 천국이겠죠? 그럼 그걸로 된 거예요.”
이처럼 아이와의 시간을 위해 이력에 큰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현실은 남자의 육아에 대해 녹록하지 않다. 직장을 다니다가 아내의 출산 후 육아휴직을 신청해도 그조차 쉽지 않은 사회 아닌가. 육아휴직을 쓰는 남성들이 최근 10년 새 열 배 이상 증가했고 하나, 육아휴직을 쓰는 여성들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수다(2013년 육아휴직을 신청한 남성은 여성의 3.4%에 그쳤다는 발표가 있다).
법으로는 가능해도 상황상, 눈치상 불가능한 일이 육아휴직이다. 인터넷에는 육아휴직을 신청했다가 회사 전례에 없던 일이라 하여 거절당했다거나, 회사를 포기했다는 사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여성의 육아휴직조차 아직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결국 세상은 큰 물살을 따라 흘러가기 나름이다. 이미 ‘아빠의 육아’는 대세다. 잠깐의 유행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물건을 사고파는 일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아빠 육아휴직운동본부’ 라는 단체가 있다. 이들은 매주 잠실역에서 남자의 육아휴직을 위한 서명운동을 한다. 지금까지 60만 명이 서명했고,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 모임의 대표 역시 아빠고 많은 아빠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단체이지만, 이 단체에 관심을 표하는 이들,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이들은 아빠 만이 아니다. 엄마들, 그리고 대학생들도 기꺼이 움직인다. 궁금하다면 접속하시기를. 이 단체의 누리집 주소는 ‘Dance with my father’(루더 밴드로스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듯하다)다. 아이가 아빠와 함께 춤추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건 인생의 한 계절에 누릴 수 있는, 오로지 아빠라서 허락된 행복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9.09 00:05 / 윤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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