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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보다 더 나쁜 일본의 영토욕(領土慾)

풍월 사선암 2014. 8. 19. 09:32

북한보다 더 나쁜 일본의 영토욕(領土慾)

 

요즘 아들 가진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아들 군대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납세교육근로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 중의 하나인 국방(國防)의 의무는 한마디로 모든 국민이 국방에 관하여 지는 의무이다. 건강상의 특별한 사유가 없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남성이라면 반드시 군무에 복역해야하는 병역의 의무 외에도 모든 국민들이 지켜야하는 방공방첩의 의무, 군사 작전에 협력할 의무, 군의 노무 동원에 응할 의무 등이 포괄적인 국방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국방은 늘 북한만을 상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적을 대상으로 평소에 대비해야하는 것이다. 오늘은 친하다고 웃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얼굴로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소중한 것은 이런 맥락의 대상을 거슬러 기록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그들의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속내뿐만 아니라 그런 그들에 대한 대처방법과 조상의 슬기로운 지혜 오판으로 인한 민족의 한도 들어 있다. 그래서 부끄러워도 왜곡되어선 절대 안 될 것이 역사이다.

 

갖은 억측과 만행으로 일관하는 북한만이 적국이 아니라 동북공정의 중국도 역사왜곡의 일본도 다 우리와 가까우면서도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대상국들이다.

 

일제강점기는 일제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대원군이란 임금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방계(傍系)로서 왕위를 이은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을 뜻한다. 흥선대원군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이름은 이하응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그는 조선 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다. 아들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으며 이른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펴 외국과의 문호를 걸어 잠근다. 그러나 고종 13년인 1876년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강제적으로 부산항을 비롯한 인천항원산항을 열게 되었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경제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에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힘겨루기를 하던 일제는 1894년 청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였다.

 

위기의 조선은 일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친러정책을 쓴다. 대륙지배의 야욕에 눈이 멀어있던 일제로서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점령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여 러시아와의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04년 일제는 노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그해 2,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다. 일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한다. 의정서는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과 이 협정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 3국과는 체결할 수 없다는 반강제적 내용이었다. 일본은 이로 인하여 많은 토지를 군용지로 차지하였고 인력도 징발하였다. 또한 항일투쟁을 탄압할 목적에서 치안 담당을 구실로 19047월부터는 군사경찰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한국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7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 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결과 일제는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놓은 상황에서 190511,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이른바 을사오적과 같은 매국노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이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가 되어버렸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세계만방에 호소하고자 1907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을 비롯해 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챈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통감 이토 로부미(伊藤博文)를 시켜 배일사상(排日思想)이 강했던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무능한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국 식민지화에 최대의 장애요소가 되는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을 감행하자 상당수의 한국 군인이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발전된 의병항전은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항전은 일제가 1909년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그 기세를 누그러뜨려버린다.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의 항일 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만주시베리아 등지로 피신했으며 우리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민족영웅 안중근선생이 사살했다.

 

이듬해인 1910년 일제는 한국의 식민화의 완성을 위하여 후임 통감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보내 당시의 총리대신이었던 매국노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받아냄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강점기를 36년간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써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27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데라우치 총독체제로 본격적인 조선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한편 19399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2차 세계대전의 시발로 보는데, 제국건설의 야욕을 가진 나치 당수 히틀러는 유럽 전역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 갔다. 연전연승하던 독일에게 자극을 받은 일본은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을 하자 당시 프랑스령이던 인도네시아를 침공한다. 유럽 대부분을 집어삼키던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그리고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전역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이른바 ‘3국 동맹조약의 내용대로 군사적 동맹의 약속을 지켰다면 아마도 전쟁의 결과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참혹한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일본은 남진에 집중하기 위하여 소련과 일소중립조약을 맺는 바람에 독일과 틀어지고 일본의 194112월 미국의 진주만 침공으로 전쟁의 양상이 이 추축국을 제외한 연합국의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미리 내다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 측 3개국 수뇌들은 19452얄타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소련은 대일참전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적절한 시기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고,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체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을 조직할 것.”

 

그러나 그 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하여 점령하기로 약정되었다. 19458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을 지지하던 김일성은 그를 등에 업고 1950625일 새벽, 남침을 강행한다. 이것이 바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다. 북한은 소련의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에 동족끼리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7월 휴전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쌍방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난항을 거듭하다가 수차례의 회담 끝에 드디어 195111월 소련을 등에 업고 있는 북측이 유엔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인하였다. 이른바 휴전협정을 한 것인데,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 지대의 확정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전쟁 포로에 관한 조치 따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합의한 지 30일이 되는 그 해 1227일까지 휴전이 성립되지 않아 이 협정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들이 가끔씩 현재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는데, 남북은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태인 것이다. 38선을 경계로 북으로 2킬로미터, 남으로 2킬로미터를 비무장지대(DMZ)로 두고 오늘날까지 일촉즉발의 극한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공동으로 생산하여 고르게 분배하여 다 같이 행복하자고 부르짖던 북의 공산주의 사상은 갖은 착취와 지배계층의 독식으로 공평분배는커녕 수많은 인민들이 배고픔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보내며 대를 이어가며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 반면 남한의 민주주의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기 일보직전까지 발전했다.

 

북은 ‘3대세습을 통하여 오늘에도 체제를 연명하고 있다. 외부와의 단절 그리고 철저한 관리 및 세뇌교육들에 많은 인민들은 속고 있다. 해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사이비 종교집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호의호식하고 나머지는 굶주리고 잉여 생산물은 철저하게 감춰지고...이것을 두고 어찌 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의 형국인 북은 이제는 같이 죽자고 덤벼드는 지경까지 이르렀기에, 오랜 역사가 우리에게 항상 가르쳐주듯 늘 가진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의 막장싸움에는 가진 자가 양보를 해야 끝이 나듯 남한은 북한이 울면 원하는 것들을 나눠주며 달래어 왔다.

 

그러나 북은 그런 남한에게 단 한 번도 고마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가난은 남한의 탓이라고 떠들어댄다. 쌀을 퍼다 주면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모진 비난과 무서운 총부리였다.

 

국가의 국방력은 한마디로 돈이다. 경제대국 일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각 나라마다 무기의 첨단화와 현대화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붇는다. 과거처럼 지상으로 탱크를 앞세워 인접국을 공격하는 형태의 전쟁이 아니라 가장 정밀한 장비로 위성과 연계하여 좌표를 찍어 버튼만 누르면 예전보다 수 천 배 이상 강력한 무기들이 오차도 없이 적지에 꽂히는 그런 형태의 전쟁들로 점점 바뀔 것이다. 대한민국도 최근 차세대전투기 사업을 위해 막대한 국방예산을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육군도 기계화사단의 장비가 현대전을 대비한 최첨단 무기들로 배치되고 있다. 필자의 짧은 생각에는 무기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제는 선진국처럼 휴먼웨어의 관리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보강되어야 할 듯싶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윤일병사건이 말해주듯 우리 군인들의 적응 프로그램이 첨단 무기장비들에 비해 너무 노후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와 가까운 팔순이 훌쩍 넘으신 공군장군님의 말씀에 의하면 북한은 전투기를 연습 비행시킬 연료비가 모자라 훈련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인 것 같다고 들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북의 체제에 적잖은 위기가 올 터이고 우리 군인들의 정신이 흐트러짐 없이 굳건하려면 과거의 배고프던 시절의 군기잡기식의 관리 프로그램으로는 많은 문제가 뒤따를 것으로 판단된다. 시대가 바뀐 만치 그에 걸 맞는 인력양성이 병행되어야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북과의 대결에서도 더 나아가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도 맞대응 할 수 있을 것임이 확실하다.

 

역사가 말해주듯 본디 일본은 양심에 털이 난 민족이라서 언제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망동도 불사할 것이다. 일본을 이끄는 지도 세력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만 보아도 자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주변의 그나마 양심이 남아있는 세력들의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수의 지지기반을 다지기위해 당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1급 전범들이어도 자국민들에게는 나라를 지킨 위인의 대접을 위해 숭배하고 그런 모습들을 두고 환호하고 저지른 만행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하는 엄청난 일들을 식은 죽 먹듯 쉽게 저지르고 있다. 그들이 과거를 반성하고 있다면 최소한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끌려 나가 군인들의 노리개로 꽃다운 청춘과 영혼과 몸을 빼앗겼던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제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 하나 둘씩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악질들이어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에 우리 국민들은 분개하는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늘 경계하라.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북한만치나 어쩌면 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가 우리와 가장 친한척하고 웃는 얼굴을 하며 인접해 있음이 왠지 꺼림칙하다.

 

< 2014.08.14 한림(漢林)최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