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천국- 덕유산(4)고종의 행궁자리 명례궁
아름다운 산수 식량걱정 없는 도화원
민비 위한 고종 행궁 '명례궁' 짓기로
공사 건설비용 무주군민 혈세로 충당
해방 이후 관리자 없어 유적 모두 훼손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은 산에는 기(氣)를 모아주는 산이 있는가하면 기를 발산하고 소진해버리는 산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태백산, 소백산과 함께 덕유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의 허리뼈에 해당되는 곳으로 중앙에 덕유산이 자리하고 있어서 아래로는 지리산, 위로는 속리산,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계룡산이 자리했다. 기를 모으는 산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이지만 기를 거두고 간직하는 데는 덕유산이 제일이라고 여겼다.
기를 키우고 정신을 가다듬고자한 이들은 덕유산을 좋아했다. 덕유산의 기가 모아진 포인트는 무풍(茂豊)이다. 덕유산 국립공원 나제통문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무주군의 동쪽에 자리한 무풍면이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벽지 중의 벽지로 첩첩산중에 박혀 있어서 가장 찾아가기 힘든 곳을 말할 때 흔히 무주구천동을 꼽는다. 북한의 삼수(三水), 갑산(甲山)과 함께 오지의 대명사로 쓰여 오는 말이다.
무풍은 동남이 소백산맥의 주맥으로 막혔고 서쪽, 북쪽도 산으로 막힌 지맥으로 둘러싸여 산속에 갇힌 땅이다. 대덕산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모두 무주읍에서 합쳐져 남대천(南大川)을 이루고 금강으로 흘러간다. 서쪽의 설천방면으로 흐르면서 그곳에 제법 넓은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 무풍이다.
나제통문은 길을 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바위터널을 중심으로 무풍지역은 신라 땅이고 바깥쪽은 백제 땅이었다. 이러한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무풍은 소백산맥의 서쪽에 있으면서도 백제의 예봉을 막고 신라 땅으로 남아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택리지의 이중환이나 십승지를 주창했던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 중에서도 상 복지(福地)라고 했다. 무풍면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네 바깥은 기름진 논밭이라 인근 주민들이 식량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윤기 나는 땅은 우복동의 검은흙 찰진 앞뜰 논배미보다 더 좋다고 했다. 결국 정감록에서도 무주의 무풍을 여덟 번째의 십승지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다.
십승지의 무풍은 역사적인 입지조건이 뛰어나다. 지리적으로 보아도 무풍은 서쪽으로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삼도봉 구간이다. 남쪽에서 동쪽으로 나와 있는 연맥을 거쳐 북쪽으로는 민주지산이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곳에 위치했다. 물 흐름도 남대천의 지류가 주위의 산록에서 발원하여 구불거리면서 흐르다가 무풍에 오면 합해지고 면소재지를 휘돌며 서쪽으로 흘러가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풍수적인 조건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실제로도 이곳을 찾아오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피난지로는 안성맞춤이다. 산수도 아름다우며 식량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곳이라서 도화원(桃花源)같다고 했다. 결국 좋은 땅은 더 좋게 이용하자고 했다. 조선말기 나라가 어수선할 지음 유사시에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이곳에 왕과 왕비가 몸을 피할 수 있는 궁궐을 지어 민비(閔妃)에게 바치기로 한 것이다.
행궁(行宮)은 막대한 예산이 있어야 지을 수 있다. 무주의 명례궁은 무풍면 현내리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다. 이곳 출신으로 고종의 척신이었던 민병석이 건립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고종 때 행서를 잘 쓰던 서예가로 필명을 날렸으며 많은 이들의 청탁을 받아 양반가문의 비문을 써주기도 했던 자이다. 벼슬이 내부대신까지 올랐던 그는 한일합방(1910년)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고 망국내각의 궁내대신이 되기도 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일본의 앞잡이였던 그는 여흥 민씨로서 민비의 친척으로 대왕마마를 직접 뵙고 꼬드겼다.
결국 그는 민비를 위한 고종의 행궁인 명례궁(明禮宮)을 지을 책임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궁궐을 지을만한 돈이 없었다. 정권의 실세에 접근한 그는 제원마련을 위한 방편으로 권력을 이용하기로 한다.
먼저 무주부사 서완순에게 말해서 궁을 짓기 시작했다. 건평 99칸의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대궐을 짓고 거기에다 논밭 300마지기를 붙이고 쌀1천500을 비축한 다음 민비에게 헌납할 계획을 짰다.
경비충당을 위해 그는 무주의 모든 공물을 대납하고 그 이상으로 이익을 포함한 액수를 군민들로부터 긁어냈다. 일종의 갈취형태의 세금대행업이다. 어수선했던 조선 말기에는 세금을 대납하기도 했는데 한 고을의 세금을 전액 대납한 다음에 그 후로 거둬들인 세금은 자신이 갖는 제도가 있었다. 민병석은 이를 이용한 것이다. 그는 세금으로 대납한 액수보다 훨씬 많은 돈을 거둬들였다. 권력을 이용한 막강한 힘으로 억지를 부려 더 많은 액수를 빼앗다시피 강제로 긁어모아 들였던 것이다.
지역의 호응을 얻지 못한 행궁건설은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결국에는 무주군민들이 강제로 낸 세금으로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사에 쓰인 사업비는 무주군에서 상납해야할 공물을 대납했으니 받아들인 족족 공사대금으로 충당하고 민병석의 차지가 되었다. 궁궐공사가 완공되자 이 고장에도 유사시에 임금이 거동 할 수 있는 이궁 즉 행궁이 자리하게 되었다. 말로만 떠돌던 십승지의 길지가 임금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명례궁의 건립으로 이고장의 백성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간신배 민병석은 국가의 세금을 대납한 대신에 무주군민들로부터 훨씬 많은 과도한 세금을 긁어냈다.
때를 만난 대왕마마는 왕손을 잇기 위해 전국의 명산을 쫓아 다니며 산신제를 드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튼튼한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텃자리로 명례궁이 건설되자 이를 받아 들였다. 조정에서는 승지를 초대 감관(監官)으로 임명하고 즉시 부임토록 했다. 또 명례궁에서 제원찰방까지 겸임하도록 조치했다.
그 후 2대 관감으로는 민병석의 사촌 민병형이 부임했고 회덕군수로 전출하면서 초임 승지의 양자이던 구일모가 3대 감관으로 임명됐는데 그는 명례궁의 마지막 감관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이에 나라 안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면서 정국이 요동을 쳤다. 시대의 격변기였다. 고종32년(1895)에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민비가 일본의 칼잡이에 의해 궁 안에서 주살당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십년 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로 모든 권력이 이양되는 비극적인 일까지 벌어졌다.
조정에서는 명례궁의 감관을 폐지해버렸다. 결국 무주의 별궁은 맨 처음에 지었던 민병석이라는 개인에게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막대한 돈을 들인 지방 궁궐 공사는 완공되었지만 왕은 단 한 차례도 행차하지 못하고 말았으며 행궁의 기능도 저절로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에는 조선왕조를 저주하며 그 왕조를 무너뜨리려는 혁명군의 근거지로 이용되었던 십승지는 빛을 잃고 말았다.
아부아첨하며 벼슬자리를 높이려는 무리들은 승지를 찾아 그곳에 궁을 짓고 헌납하는 권력남용의 잔꾀를 부렸지만 이를 허용한 조정은 정식으로 행궁의 이름까지 지어 붙였다. 역사의 흐름이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8·15 해방 이후에는 이궁에 딸린 토지마저 금융조합 농지로 변해버렸고 건물은 각각 따로 따로 뜯겨 나가고 말았다. 정자를 짓거나 경찰지서 건축용으로 팔려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자가 없던 관계로 모두 훼손되고 말았던 것이다.
으리으리했던 99칸의 궁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천주교 교회와 민가가 들어차고 일부는 무풍장터가 되면서 길이 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역민들도 너무 원성을 샀던 건물이라 궁이 없어지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면서 바라만 볼뿐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가 무풍의 궁터현장을 찾아갔을 때는 나라님의 궁터였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부 남아있는 공터를 뒤덮는 무성한 잡초가 지나온 아픈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 무등일보 / 글 : 淸山 윤영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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