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천국- 덕유산(1)
'나제통문'은 백제 신라가 힘겨루던 곳
무주 구천동 33경 첫째관문
산 속 구멍 뚫어 낸 작은길
계곡 따라 백련사까지 산행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무주의 설천, 무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 속에 구멍을 뚫어낸 작은 길이 나제통문이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로의 규모와 발달을 알아보는 소중한 자료다.
가을비는 모든 것들을 축축하고 슬프게만 한다. 비 내린 오후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1박 2일의 덕유산여행길에 나섰다. 내일은 개천절이고 연휴라서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가 타고 갈 미니봉고가 문을 열고 차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로 마른오징어와 술을 싣자 드디어 차가 출발했다. 오늘 도착할 목적지는 무주 구천동이고 내일이 되면 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덕유산을 오를 작정이다.
광주에서 출발한 차가 88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시멘트 포장길로 변하면서 차체의 떨림이 부드럽지 못하다. 30여 분쯤 지나자 어느 덧 차는 섬진교위를 달리고 있었다.
몇 해 전 섬진강 탐석활동은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그날 따라 공치는 날이었다. 지금은 모든 강바닥을 헤집고 다녀도 수석감이 남아있는 강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강바람을 쏘인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석을 건져 올리면 즐겁고, 줍지 못하면 그런대로 낭만이 있는 추억으로 기억되는 욕심을 버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남농 선생이 살아계실 때 수석공부를 위해 멀리 목포까지 찾아가면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유달산 아래 죽교동에 계실 때였다.
“일생 일석.”
돌에 욕심 부리지 말라는 선생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그 무렵 선생께서는 엄청난 숫자의 수석을 갖고 계시면서도 제자로서 배움을 청한 저에게는 한 개의 돌만을 탐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변치 않을 하나의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라는 교훈으로 이해된다.
30여 년 전 나는 수석의 매력에 빠져 전국의 모든 수석 산지인 산이면 산, 강이면 강을 빠짐없이 헤맸던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맘에 든 돌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탐석(探石)에 공치는 날에는 주변 돌 가게에서 한 두 점씩을 사와서 마누라쟁이한테는 내손으로 직접 주웠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차안에서는 보해소주가 한 순배 돌았는가? 했더니 어느새 독한 양주가 두병 체 바닥이 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산우의 입에서는 마른 오징어 씹는 소리가 요란했고, 차안은 마이크를 잡은 젊은 산우들의 열창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젊은 친구들의 배호 노래 부르기는 가수 이상의 솜씨로 온몸을 던진 폼이 그럴듯하고 제법 구성지게 메아리쳤다.
3년 전 무주 구천동에 왔을 때는 '나제통문'을 차에 앉은 채로 두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통문을 지나 입산했었다. 나제통문은 머나먼 옛날 신라와 백제시절 두 나라의 국경지대로 이곳을 경계 삼아 다투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나제통문이라고 불렀다.
무주 구천동 33경의 첫째 관문이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별반 장비나 기술력도 뒤떨어지던 시절 무슨 재주로 바위산을 뚫고 터널을 만들었을까? 당시에는 겨우 하면 말 한필이 다닐 수 있는 도로 폭이면 넉넉할 진데 왕복2차선의 아스팔트길로 대형버스도 교차할 수 있는 깔끔한 터널로 만들었다.
옛날 옛적의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힘겨루기를 하면서 땅뺏기를 하고 이곳을 국경선으로 다투던 시절이 있었다. 통일신라이후 석모산의 기암절벽을 뚫고 동서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통문을 중심으로 지금까지도 양쪽의 언어와 풍습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한다. 멀고 먼 통문의 역사이다.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무주의 설천, 무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 속에 구멍을 뚫어낸 작은 길이 나제통문이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로의 규모와 발달을 알아보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준다. 통문 길옆에는 도로휴게소가 있어서 편리하게 이용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통문이 일제강점기(1910년)에 일본인들이 덕유산인근의 금광에서 캐낸 금을 운반하기위해 만든 ‘기니미굴’이였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일대의 산악지대에서 나는 농, 임산물을 옮겨가는데 통문을 통과하면 편리하다.
나제통문일대는 덕유산의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정문과 같다. 사실인 즉 설천면의 소천, 청량 하천은 반딧불과 그 먹이인 다슬기의 서식지이지만 멸종위험으로 인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요즈음은 환경 친화적인 아이템이라야만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새로 생긴 치목 터널을 통과해서 단숨에 덕유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앞까지 다다랐다. 보지 못한 나제통문이 안타깝지만 산을 뚫어 만든 새로운 길은, 변화를 추구하는 현대인을 닮아 싫지는 않았다.
이층 모텔에 잠자리를 정한 우리들은 저녁식사 후 모텔 앞의 나이트클럽으로 모여들었다. 맥주에 취기가 오른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성 산우들의 지르박 스텝이 돋보였으며 트롯도 춤도 일품이었다. 나이 지긋한 이들의 보릿대 춤, 한국형 막춤도 멋있었다. 젊은 산우들의 빙글빙글 잘도 도는 둥굴레 춤과, 딴따라 춤은 술값께나 없앴을 것이다.
나는 봉고버스 내에서의 막가파식 난장판에 가까운 음주가무로 비실거렸다. 여독과 겹친 피로에 지친 나머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했다. 깊은 밤 옆방에서 들려오는 잡담과 떠드는 소리에 잠을 깼더니 고스톱 판이 그때까지 진행 중이었다. 밤을 새며 진행된 화투판이었던 것이다.
한번 설친 잠은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조금은 이른 새벽이지만 잠자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다. 공원에 걸린 시계탑의 시계가 4시 30분으로 이른 새벽시간이다. 여관 앞 덕유교 밑에 지천으로 깔린 자갈밭으로 들어갔다.
넓적하게 펼쳐진 돌밭에 끌린 나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탐석을 시작했다. 며칠 전의 큰 비로 하천 바닥이 뒤집혀 밑에 숨겨있던 돌들이 위로 나왔다면 수석 감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 허리를 굽히며 수석 찾기에 신경을 집중했다.
가로등 불빛에 의한 탐석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저기 헤맨 끝에 두 점을 건졌다. 무늬석과 평원석이었다. 아쉽지만 흡족한 마음으로 배낭 속에 넣었다.
5시가 되자 일행 중 다섯 사람이 새벽 등산길에 나섰다. 무주구천동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백련사(6Km)까지의 산행은 약간 힘에 버겁지만 포기할 수 없는 코스이다. 몇 해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자연휴식년제(Closed System)로 인해 입산자체가 불허되어 아예 산의 초입에도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그날의 아쉬움까지 털어낼 요량으로 각오를 다지며 오르기 시작했다.
- 무등일보 / 글 : 淸山 윤영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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