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무주, 무주 사람들]茂朱(무주) 그 순정한 사람들의 땅

풍월 사선암 2013. 10. 2. 11:16

[무주, 무주 사람들]茂朱(무주) 그 순정한 사람들의 땅

 

◀태권도지킴이 배재숙옹

 

여기 무주구상화강편마암(茂朱球狀花崗片麻巖)이 있다. 이 둥그런 돌은 아름다운 꽃무늬를 띠고 있지만 그 속내만은 어김없이 단단한 화강암이다. 무주와 무주사람들이 그렇다. 오랜 풍상 속에서 안으로 단단히 굳어졌건만 겉은 여전히 순정하기만 하다. 산 첩첩 물 첩첩, 사방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물은 연신 발목으로 감기어든다. 벗어날 수 없기에 때론 거친 산처럼 때론 부드러운 물처럼 부딪치며 흐르며 살아왔다. 전라북도의 지붕 무진장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용마루 무주에 올라보라. 덕유산은 우뚝하고 구천동은 길고도 깊다. 그 골에 이루어진 사람의 삶은 연면하고도 끈질기다. 이제 그 무진한 삶을 딛고 새로운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더 높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그들의 외침을 들어보라. 그 깊은 속내와 오랜 꿈, 여전히 순정하기만 한 삶을 따라가보라.

 

무주야 구천동에

 

어찌 무주와 구천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한여름에도 발이 시린 맑고도 찬 물과 반딧불이 날아다니던 옛 산골 정취는 많이도 퇴색했지만 이제 설원의 긴 슬로프와 형형색색의 젊음들이 그를 대신하고 있다. 해발 1614m의 덕유산 향적봉 정상은 곤돌라로 설천봉까지 올라 20분이면 너끈히 밟게 되었고, 젊음은 오히려 발아래로 가파르게 뻗어내려간 슬로프에 더 눈길을 뺏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 골짜기로 끝도 없이 이어지던 깊고 고단하던 삶을.

 

시집왔네 시집왔네 무주야 구천동에 시집왔네 -‘시집살이노래중에서

 

무주구천동과 무주리조트 중간에서 산채정식집 별미가든을 운영하는 최연표장월미 부부는 이제 쉰여덟의 동갑내기다. 30여 년 전 처음 음식점을 열 때만 해도 이곳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별미가든은 무주구천동의 산채음식을 대표하는 음식점으로 자리 잡았고, 여러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보다 더 큰 보람은 그들의 집이 스키 국가대표선수의 집으로 불리는 것이다. 부부의 세 자녀가 모두 스키 국가대표선수를 지냈거나 현재 국가대표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최연표씨 자신도 전북스키협회 이사를 지냈다. 특히 막내 최흥철 선수는 2003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스키점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지금도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의 가족이 스키가족이 된 것은 아이들이 자라던 때에 마침 무주리조트 스키장이 개장된 덕분이었다. 적극적인 성격의 최씨는 자녀들을 모두 스키부가 있는 학교에 보내 운동을 시켰고, 자신도 스키 심판에 나서는 등 스키인이 되었다. 아내 장씨 역시 세심하게 아이들의 건강을 챙기는 등 뒷바라지를 다했다. 별미가든 산채정식 상에 오르는 반찬 가짓수는 무려 40여 가지가 넘는다. 덕유산 일원에서 직접 채취한 두릅, 고사리, 당귀, 취나물, 곰취 등에다 굴비와 다슬기 된장국 등으로 상을 가득 채우고 때에 따라 오미자술도 반주로 내놓는다. 대부분의 산나물은 물냉동으로 그 싱싱함을 살리고 조미료 등 화학첨가제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 산골의 풍취와 정성을 담아내자던 초심에 따른 것이다. 그 음식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자라났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키우기도 했지 않았던가.

 

문은 소통을 위해 있으니

 

무주리조트와는 달리 겨울의 무주구천동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물은 얼음장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고 백련사는 눈에 푹 파묻혀 있다. 백련사는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32경이고 제33경은 덕유산 정상이니 실질적으로는 백련사가 무주구천동의 마지막 경승이나 마찬가지다. 한여름의 번잡함을 피해 겨울에 무주구천동을 찾는 이라면 백련사에서 겨울산사의 정취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 정취에 깊이 빠져 아예 며칠 묵고 싶은 이도 있을 법하니 절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기도 한다. 덕유산에는 얼른 떠오르는 대찰도 명찰도 없다. 백련사도 그 전해지는 역사에 비해 그리 뚜렷하거나 큰 절은 아니다. 빼어난 건물도 뛰어난 조형물도 없다. 그러나 무주구천동의 깊은 계곡을 따라 들어와 산사의 품에 안기면 무위조차도 이미 부처님의 나라다.

 

무주구천동 33경의 시작은 나제통문이다. 신라와 백제가 통하던 문이니 으레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로 짐작하기 십상이지만 문 이쪽도 문 저쪽도 다 같은 무주 땅이다. 원래 무주고을이 각기 다른 나라에 속해 있던 두 지역이 합쳐진 곳이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로는 이 일대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경계기도 했으니 그 뜻만큼은 그리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통문이 뚫린 것은 일제 때 신작로를 놓으면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그 실제 역할보다 사람들의 뜻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을는지. 실제로 지금도 이 문을 사이에 두고 동쪽 무풍 방면의 이남마을과 서쪽 무주 방면의 새말은 같은 소천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말투가 다르고 제사 등 풍속도 판이하고 심지어 오랫동안 서로 통혼(通婚)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저 신기하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문은 열기도 닫기도 하지만 통문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소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단지 의미로서뿐 아니라 그 문으로 해서 모든 가로막음과 갈림도 다 뚫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따름이다.

 

나제통문에서 수문병 역을 재현하고 있는 김상수(50)씨는 설천면 월현리 사람이다. ‘배운 게 짧아서고향에서 벌도 키우고 소도 먹이고 무주리조트에서 용역일도 하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다가 전임자가 비운 수문병 자리를 자원하고 나섰다. 전임자를 비롯해 주변에서 이라는 부추김도 있었지만, 본인 스스로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게 벌써 4년째인데, 처음의 그 신명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빠지지 않고 굳세게 통문을 지킨다.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등 이제는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본인은 오히려 여기서 알 만한 사람을 만나는 게 놀랍고 반갑고 즐겁다. 얼마 전 국토순례 중인 유인촌씨와 인사를 나눴다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군대간 아들이 벌써 제대해 예비역이 되었건만 그의 수문병 생활은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나제통문을 통과하면 무풍장이 나온다. 한때 전라경상충청 3도의 문물이 몰려들어 흥성거리던 무풍장(38일장)은 이제 가뭇없이 시들어버렸다. 한동안 전통장터 복원이 추진되는 듯하더니 그마저 어디로 갔는지 장터는 갈수록 뉘엿해지기만 한다. 해가 채 지기도 전인데도 늘여놓은 물건을 걷는 황현성(65)씨 부부의 손길이 조급하다. 날은 춥고 손님은 없으니 어차피 오늘은 빨리 을 치고 내일 영동장을 준비하는 게 상책이라 싶은 것이다. 읍내리에 사는 황씨는 무주설천무풍안성장뿐 아니라 영동장 등에까지 용달차로 돌며 과일과 야채 등을 판다. 장을 돌아다닌 것도 벌써 40년이 다 되어간다. 옛날 장의 재미야 애당초 돌리기 힘든 일이니 그저 부부 무탈하게 장돌뱅이생활을 마쳤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태권도지킴이와 트리스쿨

 

◀나제통문에서 수문병을 재현하고 있는 김상수씨

 

지금 무주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태권도 공원과 안성면 일대에 조성될 관광레저형 기업도시에 쏠려 있다. 전라북도에서 완주군 다음으로 넓지만 경작지 비율은 도내에서 가장 낮은 무주니 관광산업에 거는 기대가 거의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숙원이던 태권도공원을 유치한 기쁨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지만, 기업도시 조성에 거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어쨌거나 백운산 자락의 태권도공원 전망대를 지키고 있는 태권도지킴이배재숙(79)옹의 어깨에는 기운이 넘쳐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의 전망대를 오르내리면서도 조금도 힘든 줄을 모른다.

 

사실 배옹은 젊은 시절부터 온갖 운동으로 몸을 단련해왔지만 태권도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다. 나제통문이 있는 소천리에 살면서 한때 의용소방대장을 하는 등 유달리 봉사의식이 강했던 그는 무주가 태권도공원을 유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유치 운동에 자원봉사자로 나섰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장한 풍채와 마치 선인과도 같은 은빛수염으로 유치단의 마스코트가 되다시피 했다. 태권도공원 유치가 확정되고 예정부지에 전망대가 세워지자 그 지킴이 역할은 당연히 그의 몫이 되었다. 배옹은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안내하고 전망대에서 무주 일원의 조망을 가리키며 이 땅에 담긴 의미를 일갈한다. 노령산맥의 웅자 속에 녹존대성처가 자리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그가 노령을 물리치는 기합을 지르면 전라북도의 지붕이 잠시 유쾌하게 들썩인다.

 

태권도공원 예정부지 가까이에는 반디랜드가 있다. 반디랜드는 무주의 상징 반딧불이의 서식처인 남대천 가에 있던 반딧불이자연학교를 포함해 곤충박물관, 청소년야영장과 자연휴양림 등을 순차적으로 조성하면서 무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태어났다. 곤충박물관 입구에는 고생대에서 신생대까지의 대표 화석을 복원해 태곳적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3138(951)에 달하는 곤충관 내부에는 반딧불이를 비롯해 2000여 종 13500마리의 전 세계 희귀곤충 표본이, 식물관에는 150여 종의 열대식물이 조성되어 있어 사철 방문객을 불러모은다.

 

◀()별미가든의 최연표씨 부부. (가운데)무풍장터의 황현성씨 부부. (아래) 트리스쿨의 김승범 실장과 아들.

 

반디랜드를 중심으로 무주의 곳곳에는 자연친화적인 체험공간이 들어서고 있다. 덕지리에는 친환경 농촌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하늘땅별땅마을이 있고, 치목에는 삼베마을과 반디공작소가, 대소리에는 부남천문대가, 내도리에는 황토염색체험장인 황야와 다소니가, 안성면 공정에는 무주도예원이 들어섰다. 그런 곳들 중 활동이 가장 활발한 가옥리의 목공예학교 트리스쿨로 가보자. 트리스쿨은 김의만(67)씨가 세운 무주목공예학교를 그 모태로 하고 있다. 무주목공예학교 김의만 교장은 실제로 평생 교직에 몸담아오다가 첫 발령지였던 무주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는 평소 즐기던 목공예와 전각 등의 조예를 살려 목공예학교를 세웠다.

 

현재 무주목공예학교를 실질적으로 끌어가고 있는 사람은 김 교장의 아들인 김승범(36) 실장이다. 그는 무주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다. 그런데 2005년 목공예학교를 연 아버지에게서 이 왔다. 아무래도 연로한 아버지로서는 홀로 목공예학교를 이끌어가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무주로 내려온 그는 처음 한 달은 정말 무지하게 좋았다고 한다. 쫓기듯 살던 도회생활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와 느끼는 오랜만의 평온함이란! 그때의 평온함은 농촌 환경 적응과 학교 운영에 대한 압박감으로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에 대한 의욕으로 마음을 다잡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한 어린이 체험사업은 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어린이 교구 납품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무주는 이래저래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다. 오랫동안 침잠에 갇혀 살아 왔던 만큼 그 기대가 절실할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잠시 젊은 시절의 한때를 내도리에서 지냈다는 소설가 박범신씨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1968년 나는 무주군 내도리에 있었다. 그곳에 있을 때 나는 불과 스물셋의 피 뜨거운 젊은이였으므로 때로는 갇혀 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자연이 주는 놀라운 은혜 때문에 돌이켜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풍성했다. 내가 무주를 문학적 자궁이라고 느끼는 은혜의 반은 내도리의 자연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런데 200411, 오랜만에 내도리에 들렀다가 나는 망연자실했다. 200여 드넓은 하천폭 가운데로 볼썽사나운 제방이 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국가예산 260억 원을 들여 수해방지사업으로 시작된 공사라 했다.

 

20세기 미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자연주의자 스코트 니어링은 그의 자서전 조화로운 삶에서, 자신이 평생 농장을 가꾸고 살면서 유일하게 실패했던 일이 있다면 제방을 쌓아 물을 막는 일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물은 자연스레 제 길을 좇아 흐를 권리가 있다. 산이 있으면 돌아들고 풀과 나무가 있으면 그 뿌리를 적시면서 품안에 온갖 살아 있는 것들, 사람살이까지 품어준다. 내도리의 자연은 무주군민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한 번 망가뜨리고 나면 돈으로도 회복시키지 못할 소중한 자연재산을 지금, 나랏돈으로 망치고 있다면 솜뭉치로라도 가슴을 칠 일이다.

 

2008 02/26뉴스메이커 763 뉴스메이커 / 글·사진: 유 성 문<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