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그리움 - 이용악

풍월 사선암 2014. 3. 29. 09:34

술 취한 김지하 읊고 곁에 선배는 울었던 '눈이 오는가, 북쪽엔'

 

김지하가 한 주점 벽에 낙서한 월북 시인 이용악의 '그리움', 벽지 그대로 경매에 나와

김 시인 "내 글씨 말고 봐달라"

 

◀이용악 시인, 김지하 시인

 

취흥(醉興)이 가슴을 타고 손끝으로 흘렀다. 통음(痛飮)하는 와중에 시인은 까만 매직을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선배가 취기 오르면 늘 읊어달라 하던 시(), 그래서 읊어주면 눈물 줄줄 흘리던 시, 그 시를 휘갈겼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 우에 /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 연달린 산과 산 사이 /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어쩌자고 잠을 깨어 /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월북 시인 이용악의 '그리움'이었다.

 

20여년 전 시인 김지하는 이렇게 서울 인사동의 주점 '평화만들기' 벽에 낙서를 남겼다. 빈속에 깡소주 몇 병 들이켜고 한달음에 외워 토해낸 시다. 1990년대 평화만들기는 당대 문사(文士)와 좌우를 넘어선 언론인들이 주로 찾던 문화 살롱 같은 곳이었다. 김지하의 낙서는 "이름은 평화만들기였지만 좀처럼 평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모 단골 문인의 증언대로 밤마다 날 선 논쟁이 오가던 그곳을 늘 지켰다.

 

이 낙서시가 돌고 돌아 경매에 나왔다. 고미술 전문 경매 회사 옥션단이 26일 서울 인사동 전시장에서 여는 제17회 메이저 경매에서다. 평화만들기는 인사동 내에서 두 번 더 자리를 옮겼다가 얼마 전 문을 닫았고, 그 사이 주인도 바뀌었지만 낙서는 살아남았다. 첫 번째 주인이 가게를 옮기며 김지하의 낙서가 쓰인 벽을 아예 떼 가지고 갔다. 주인이 바뀐 다음 또 한 차례 이사를 갔지만 새 주인도 낙서를 걸어놨다가 이번에 경매에 내놨다. 마침 경매를 맡게 된 옥션단 김영복 대표는 시인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다. 김 대표는 강원도 원주에 사는 시인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발문(跋文)을 받았다.

 

시인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나 시인이 휘갈긴 낙서는 세월을 견뎠다. 김지하가 20여년 전 서울 인사동 주점 평화만들기에서 술 취해 벽지에 휘갈겨 쓴 이용악의 시 그리움’(가로 119cm, 세로 103cm). 이용악 시의 원문과는 약간 다르다. 김지하는 내 글씨가 아니라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고 했다.

 

'언제였던가/ 술 취했던가/ 용악의 詩行(시행)을 벽에 갈겨쓰고 지금 기억도 못 한다/ / ()가 어떻게 이렇게 나타나는가?/ 중요한 사건이다/ / 허허허/ 한 번 더 웃자/ 허허허허허/ ?/ 난 요즘 술을 못하니 웃음밖에 허!'

 

놀라움과 반가움과 그리움이 해학 속에 뭉그러진 시 한 편이었다. 알코올 빠진 시인의 필체는 20년 전 매직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갔던 낙서와는 달리 차분하다.

 

지난주 시인의 원주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쓴 시도 아니고, 술 취해 쓴 건데 경매 부친다니 웃기는구먼. 아니, 뭐 종로에 김지하가 오줌 누는 거 누가 찍으면 그것도 팔겠네그려. 허허. 분명히 해둡시다. 이 시는 이용악 거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이용악이란 점을 수화기 건너편 시인은 몇 차례 말했다.

 

껄껄 웃던 김지하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낙서를) 파는 건 파는 거고, 이 일을 계기로 두 가지가 확실히 알려졌으면 좋겠소. 하나는 이용악이라는 훌륭한 시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민족 통일을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이오." '그리움'은 광복이 되자 함경도 무산 처가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상경한 이용악이 1945년 겨울 어느 눈 내리는 밤 가족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이용악은 진짜 위대한 시인이오. 예세닌, 미당과 맞먹소. 우리 민족의 서러움을 이토록 우아하게 담다니. 그런데 반세기가 흘렀는데 우리 민족은 여전히 갈라져 있소. 이제 이런 슬픔 털어낼 때 아니겠소?"

 

이용악(1914~1971)

 

함북 경성 출생. 일본 조치(上智)대 신문학과를 졸업했고, ‘인문평론기자로 근무했다. 일제 치하 민중의 고뇌를 서정적으로 그린 시를 썼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회원으로 활약하다가 군정 당국에 의해 수감됐고, 6·25 때 월북했다. 대표작 북국의 가을’ ‘오랑캐꽃.

 

 

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백무선 : 함경북도 백암에서 두만강의 삼림 지대를 가로질러 무산을 잇는 철도

 

이용악 / 1914. 11. 23 함북 경성~ 1971. 2. 15. 시인

 

그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드는 상업에 종사했으며, 줄곧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도쿄[東京]에 있는 죠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시절 김종한과 동인지 이인 二人을 펴냈다. 형 억()과 동생 용해(庸海)신인문학·국민문학등에 시를 발표한 바 있다.

 

1939년 귀국해 인문평론편집기자로 근무했고, 19426월까지 조선일보·춘추등에 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 8·15해방 후 중앙신문기자로 있으면서 194628~9일 조선문학가동맹이 개최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 참가한 인상기를 남겼다. 같은 해 3월 윤곤강과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시부(詩部)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뒤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신인문학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1937년 도쿄 삼문사에서 첫시집 분수령1938년 제2시집 낡은 집을 펴냈다. 1949년 시 오월에의 노래가 오장환의 시 병든 서울, 이태준의 소설 해방전후와 함께 해방기념 조선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이어 제3시집 오랑캐꽃(1947)을 펴냈고, 19491월 동지사에서 현대시인전집의 제1집으로 이용악집이 나왔다. 그의 시는 북국 유랑 체험과 가난, 노동으로 지탱했던 유학 체험이 바탕을 이룬다.

 

초기에는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고향을 배경으로 한 북국의 가을(조선일보, 1935. 9. 26)·두메산골(순문예, 1939. 8) 등을 발표했고, 이어 만주 등지를 유랑하는 한민족의 피폐한 삶을 탁월한 시어로 형상화한 오랑캐꽃(인문평론, 1939. 10)·전라도 가시내(시학, 1940. 8) 등을 발표했다. 8·15해방 후에는 새나라 건설로의 열려진 가능성과 투쟁을 노래한 거리에서(신천지, 1946. 12)·빗발 속에서(신세대, 1948. 1) 등을 발표해 민족시의 다양한 진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월북 후 1952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 위원장, 1956년 조선작가동맹 출판사 부주필로 근무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유명한 서정시 평남관개시초(조선문학, 1956. 8)와 가사 땅의 노래(문학신문, 1967) 등을 발표했다. 그밖의 시집으로 북한에서 이용악 시선집(1957), 남한에서 이용악 시전집(1988)·북쪽은 고향(1989)·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등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