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투성이 우리들, 하루하루가 두려워… 아버지와 같은 미소로 어루만져 주세요"
정호승 詩人이 염수정 추기경께 보내는 편지
염수정 추기경님! 축하드립니다. 로마 바티칸에서 서임하시는 장면을 서울에서 영상을 통해 감동적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추기경님의 서임식 장면을 보면서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에 실제 크기로 복원된 라파엘호 안에 들어가 봤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상하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바 있습니다.
널빤지로 만든 라파엘호는 길이 13.5m밖에 안 되는 너무나 좁고 작은 배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이토록 허술한 목선으로 망망대해를 28일간이나 표류하다가 돌아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항해의 용단을 내릴 수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해 경로를 나타낸 지도 위에 크게 쓰여진 '하느님의 섭리로 뱃길을 가다'라는 글귀를 보고 곧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추기경님 사명의 뱃길은 험난할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 사목하시는 이곳이 그리 평화로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갈등과 분열이 고조돼 있습니다. 이념과 계층과 지역과 세대별로 분열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이념적 분열의 싹이 돋아 있습니다. '나'만 주장하고 '너'는 이해하지 않습니다. '너'가 바로 '나'이고 네가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가톨릭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가톨릭이 우리 삶에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 추기경님께서 그 가치의 방향을 제시해주셔야 우리는 그 방향을 따르게 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 시골 할아버지 같아서 참 좋습니다. 논두렁에 서서 잘 자란 벼를 보며 슬그머니 웃는 농부와 같은 교황님의 미소에서 평화를 느낍니다. 남대문시장이든 지하철이든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염 추기경님의 미소 또한 자본주의의 경쟁적 일상에 찌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추기경님! 북한의 모든 인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핵의 위험으로부터 남북이 해방되고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통일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평화통일을 이루는 추기경님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저희들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아무리 갈등과 분열의 상처가 크다 하더라도 깨끗한 희망을 나누고 순결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내면에 평화가 깃들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저희들도 추기경님의 건강과 평화적 사명을 위해 늘 기도하겠지만 추기경님 또한 저희들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늘 기도해주세요. 기도만이 사랑과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가르침, 늘 잊지 않겠습니다.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22일(현지시각) 오전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주케토와 비레타를 수여받고 있다.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22일 오전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추기경단과 인사를 하고 있다.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22일 오전(현지시각)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한국 성지순례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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