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은퇴하면 예체능으로 사세요.- 이계익 전 교통장관

풍월 사선암 2013. 11. 28. 23:24

[뷰티풀 시니어] 아코디언 가르치는 이계익 전 장관

 

예술가의 끼가 넘치는 걸 예전엔 나도 몰랐어!

환갑돼 아코디언 배워 강사로 나서, 오피스텔서 무료 강습

5년 전에 시작한 그림도 수준급, 개인전 벌써 3차례 열어

 

지난 5월 말 강원도 영월에서 세계문화예술대학 총·학장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석한 화가, 음악가 등 40여개국 대표들은 부근에 있는 하이원호텔에서 환영만찬을 가졌다. ·학장회의에 참석한 인사들 중에는 러시아 총·학장들이 가장 많았다.

 

만찬장의 분위기를 띄운 사람은 교통부장관을 지낸 이계익(李啓謚·72)씨였다. 대회 준비위원회 고문인 이계익 전 장관은 아코디언을 들고 나와 러시아 민요 광활한 들판을 연주하며 러시아어로 노래를 불렀다. ‘광활한 들판19세기부터 불린 러시아인의 애창곡. 러시아 대표들은 한국의 강원도에서 러시아인의 국민가요인 광활한 들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군다나 직업 음악가가 아닌 전직 장관이 러시아어로 광활한 들판을 불렀으니 그들의 감동이 어땠을까.

 

분위기 메이커로 모임초청 1순위

 

이계익씨의 아코디언 연주는 인사동 골목에서도 꽤 알려졌다. 인사동에 있는 주막 무다헌(無茶軒)’. 이씨가 지인들과 자주 들르는 술집이다. 그는 종종 무다헌에서도 아코디언을 연주할 때가 있다. 피아노 연주가 있는 날 그는 아코디언을 들고와 레퍼토리를 연주한다. 물론 따로 연주비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씨는 또 수년째 자신이 인연을 맺은 기관의 연말연시 모임에 아코디언 연주자로 극진히 모셔진다.

이씨는 서울 성수동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지인들을 상대로 아코디언을 무료강습한다. 지난 97일 오전 사진기자와 함께 전철 2호선을 타고 성수동 사무실로 가면서 그가 걸어온 길을 반추했다. 1937년 경기 평택에서 나서 양정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해직기자, KBS해설위원장, 2000년 위원회 위원장, 한국관광공사 사장, 교통부 장관, 프라임프로덕션 회장, 문화일보 부사장 등의 이력을 가진 인물. 일흔두 살의 아코디어니스트(accordionist) 이계익! 지겹고 힘든 밥벌이를 다 끝낸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멋진 모습 아닌가.

 

오피스텔 현관문에는 아카데미 스튜디오(Academy Studio)’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 그곳에는 예술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33(10)가 겨우 넘는 오피스텔은 아코디언의 전시장 같았다. 코로나 , 이 소프라니(E-Soprani), 콘발라리아(Convallaria) 10개였다. 바닥에 놓인 아코디언 박스에는 흰색 페인트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수강생용 아코디언이다.

 

벽면에는 누드 크로키가 5점이 걸려 있어 또 한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드 크로키 옆에는 그가 마라톤을 하는 사진 5점이 걸려있었다. 그중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핌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와 달리는 사진과 1993년 김영삼 정부 초대 교통부 장관으로서 김 대통령과 조깅을 하는 사진도 있었다.

 

많은 월급쟁이들이 은퇴 후에 악기를 배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왜 하필 아코디언을 선택했나. “아코디언은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가장 대중적인 악기다. 독주(獨奏)하는 사람은 대개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듣고 배운 노래들이 대부분 트로트이다. 상실, 실연, 망향 등과 같은 애절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 아코디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코디언이 세계인에게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보편적인 악기라는 뜻인가. “그렇다. 프랑스의 샹송은 아코디언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1950~1960년대 샹송 가수로 이름을 날린 이베트 지로와 줄리에트 그레코는 모두 여성으로 아코디언 연주자이면서 가수였다.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의 필수품이 아코디언이었다. 모든 전선의 소대 악기가 아코디언이었다. 전투병의 사기 진작에는 아코디언이 최고라고 본 것이다. 남미로 이민 간 이탈리아 사람들이 뒷골목에서 연주하곤 했던 악기 역시 아코디언이었다.”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 악기를 배운 적이 있나. “전혀 없다.”

 

인생은 60부터! 새로운 도전

 

언제 아코디언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나. “1996년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내 나이 60인데 앞으론 뭘 할까, 하고 생각했다. 나이가 같은 언론사 친구들(임재경, 성유보)과 유럽 배낭여행을 했다. 뮌헨에서 머물 때 전화번호부 책을 뒤져 아코디언 가게를 찾아갔다. 그 가게는 뮌헨 교외에 있었는데 1600달러짜리를 1200달러에 샀다.”

 

이씨는 당시 경제방송 외주 제작사 경제방송제작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회사는 1997년 회사명이 프라임프로덕션으로 바뀐다.

 

아코디언은 어디서 배웠나. “당시 여의도에 동아문화센터가 있었다. 거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3년을 다녔다. 처음에는 초급반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중급반과 고급반을 한꺼번에 수강했다. 그러던 중 아코디언 강사가 목사가 되어 미국 이민을 떠나게 됐다. 그러자 동아문화센터 측은 강사가 없다는 이유로 아코디언반을 폐강하려고 했다. 그때 다른 수강생들이 이계익씨한테 가르치라고 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내가 졸지에 초급반 강사가 됐다. 그게 1999년이다.”

 

수강생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강사로 승격한 이계익. 주인공이 갑자기 하차해 대타(代打)로 뛰어든 배역에서 성공한다는 전형적인 스타탄생의 스토리와 흡사하다. 이계익씨는 대타 강사를 무리없이 소화해 수강생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코디언을 잡은 지 3년 만에 아코디언 강사로 거듭났다. 이후 그는 문화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아코디언 사랑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회사가 쉬는 토요일마다 언론계 후배들에게 무료로 아코디언을 가르쳤다.

 

아코디언 사러 독일로, 모스크바로

 

그에게 아코디언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노사연이 부른 만남과 러시아 민요 광활한 들판을 잇달아 연주했다.

 

음악에 소질이 없는 사람도 연습하면 그만큼 할 수 있나. “자동차 엔진을 설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운전은 한다. 운전을 하다 보면 나중에 엔진 소리만 들어도 엔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소질이 없더라도 악기를 연주하다 보면 악보가 궁금해지고 저절로 알고 싶어진다. 연주를 하면 자연 악보가 눈에 들어온다. 악보는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는 지도 같은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클라리넷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클라리넷? 좋은 악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배우는 것은 한번 고려해봐야 한다. ()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클라리넷은 리드(reed)악기라 뻐드렁니가 되기 싶다.”

 

그는 여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대학 3학년을 끝내고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게 1959년이다. 전곡에 있던 28사단 군악대에 배속되었다. 그때 내게 주어진 악기가 클라리넷이었다. 나는 못한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대에서 못하는 놈이란 없다, 안 하는 놈만 있을 뿐이지라는 말과 함께 수없이 얻어 맞으며 클라리넷을 배웠다. 나는 2대 독자여서 제대 신청을 했고 1년 만에 제대했다. 클라리넷은 제대 이후 지금까지 잡아본 일이 없다.”

 

일반인이 아코디언을 배우고 싶으면 어디서 배울 수 있나. “많지는 않다. 내가 알기로는 문화센터에서 아코디언을 가르치는 곳은 없다. 종로2YMCA 골목에 있고, 성음악기 사장이 아코디언 강사로 활동한다. 일산에도 있다고 들었다.”

 

이곳에서 배우면 수강료를 받나. “나는 지인들을 상대로 완전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 사무실도 오피스텔 사장인 고교 동기생이 동창생들에게 강습해달라고 무료로 빌려준 것이다. 하지만 오전에 강습 끝나고 밥 먹을 때 점심값은 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내가 밥까지 사 줄 수는 없으니까.(웃음)”

 

아코디언이 외견상으로도 참 다양한데, 어디서 산 것인가. “집에는 다섯 대가 있고 이곳에는 모두 열 대가 있다. 독일 트로싱겐 공장에 가서도 샀고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스트라델라 아코디언도 있다. 모스크바에서 산 소련제도 있고 북한제도 3개나 있다. 북한제는 은방울평양악기공장에서 생산한 것이다. 14짜리 표준형 외제 아코디언이 국내 악기상에서는 1000만원가량 한다. 하지만 같은 제품을 외국에서 사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다.”

 

그가 취재진 앞에서 연주해 보인 아코디언은 미국 호너(Hohner)사에서 만든 코로나. 표준형보다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편하다. 미국 여행 중 뉴저지주의 작은 도시에서 구입했다.

 

왜 여러 나라에서 만든 아코디언이 필요한가. “아코디언은 악기마다 소리가 다 다르다. 그 소리를 알고 나면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하지만 마누라는 내가 악기 사들이는 걸 싫어한다.(웃음)”

 

국산 아코디언은 없나. “중국제 부품을 수입해 악기상들이 조립해서 파는 정도다. 낙원악기상가에 가면 그런 제품들을 살 수 있다. 조립해서 팔다 보니 특별히 브랜드가 있을 수 없다.”

 

러시아 노래는 몇 곡이나 악보 안보고 연주할 수 있나. “스텐카라친, 모스크바의 저녁 노을, 카츄샤, 광활한 들판 등이다.”

 

러시아어는 언제 배웠나.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마치고 198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 가서 1년간 유학했다. 그때 러시아어를 수강해 16학점을 땄다. 러시아곡을 연주하면서 러시아어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 러시아 사람들이 너무 좋아한다.”

 

지난해 9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러시아 우호축제가 열렸다. 그는 한·러교류협력위원회 고문 자격으로 이 행사에 초청되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대학 한국학 전공 대학원생들 앞에서 러시아 민요를 연주하며 직접 노래해 갈채를 받았다.

 

치매 예방에도 그만이지!

 

아코디언을 하면 좋은 게 뭐라고 생각하나. “아코디언을 하면 치매예방에 좋다. 악보를 보면서 아코디언 건반을 틀리지 않게 잡으려면 뇌와 손가락이 활성화된다. 유명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94세로 죽을 때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짚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스케일(Scale)을 반복했다고 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손 움직임이 느려지니까 손이 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아코디언을 하면 심리적인 면에서 어떤가. “아무리 건강을 잘 관리해도 노화에 따른 심리적 불안이 종종 찾아온다. 나는 그 심리적 불안을 음악과 노래로 희석시켜 버린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니까 재미있다. 슬픈 것은 슬퍼서 재미있고, 기쁜 것은 기뻐서 재미가 있다.”

 

골프는 안 치나. “골프를 안 친 지 5년 됐다. 분당에서 살다가 광화문 내수동으로 이사온 뒤로 자동차를 없앴다. 골프는 승용차가 없으면 치기 힘들다. 다른 사람한테 신세지는 것도 한두 번이고. 술 마시러 인사동에 갈 때도 여기서 걸어가면 금방이고 성수동 사무실에는 2호선 타면 20분이면 간다.”

 

또 다른 명함은 화가

 

앞서 묘사한 대로 33가 조금 넘는 오피스텔의 벽면에는 누드 크로키가 5점이 걸려 있다. 자칭 무면허 아코디언 강사의 강습소에 왜 누드 크로키가 붙어 있을까. 비전문가가 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다.

 

누드 크로키는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나. “2005년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니 벌써 5년 됐다. 한국누드크로키 동호인회에 가입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반포동 화실에서 누드모델을 보고 크로키를 한다. 하루에 수십 장 그리는데 5년 동안 빼먹은 적이 거의 없다. 풍경화도 틈틈이 그린다.”

 

그림은 어려서부터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나. “그림은 어려서부터 잘 그렸던 것 같다. 배운 적이 없는데도 잘 그렸다. 서오능에 비닐하우스를 개조해 작은 화실을 꾸며놓았고 틈틈이 거기 가서 그림을 그린다.”

 

그림 전시회도 연 것으로 안다. “단골로 가는 인사동 술집에서 그림을 그려 주인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내 그림을 액자에 넣어 술집 벽면에 붙여놓았다. 어느 날 홍익대 미대 교수가 내 그림을 전시회를 해도 될 정도라고 해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올해까지 개인전을 모두 세 번 열었다.”

 

그림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하나. “2008년 전시회에서 누드 크로키 20점을 팔았다. 한 점당 10만원씩을 받았다. 아파트 노인정에 100만원을 내놓았고 나머지 100만원도 자선활동에 썼다. 하지만 직업 화가들은 나를 싫어한다고 들었다. 내가 그림을 싸게 팔아 그림값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2007년에는 유화전을 열었다. 그림 판 돈으로 종부세를 냈다.”

 

나이 들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젊은 시절의 공통점은 불안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불안감은 사라지고 화가 잘난다.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게 좋다.”

 

건강 비결은 마라톤완주 37

 

아코디언 강사 겸 화가 이계익. 예술 분야에서 끼를 발산하며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남자. 모두가 부러워할 만하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건강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의 건강 유지 비결은 걷기와 달리기. 작업실 벽면에 붙어 있는 마라톤 사진에 얽힌 사연이 궁금했다.

 

매년 두세 번은 풀코스를 뛰는데 완주 메달만 37개를 갖고 있다.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동아일보 국제마라톤, 서울마라톤 등 주요 마라톤 대회에 다 참가했다. 최고 기록은 서울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44분이다.”

 

마라톤은 중독성이 있다고 하던데. “출발해 10쯤 넘어가면 황홀감이 밀려온다. 그러다 30를 넘기면 기진맥진해서 에너지가 고갈된다. 근육이 아파오면서 쥐가 나기도 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기권한다. 나는 이때 ‘10밖에 안 남았다. 다왔다, 다왔다하며 스스로에게 체면을 건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결코 완주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완주하면 해냈다고 하는 만족감이 밀려온다. 그 황홀감과 만족감을 한번 경험하고 나면 마라톤을 계속하게 된다. 중독성이 강하다. 물론 마라톤을 하면 심폐에 좋아서 혈관이 깨끗해진다. 혈전 같은 게 남아있지 않게 된다.”

 

50대 못지않은 젊음을 만끽하고 있는 이계익. 그에게 언제 나이 먹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는지를 물었다.

 

올해 처음 나이 먹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왜 우리 할머니는 아침마다 주무실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요즘 아침 먹고 나면 마구 졸음이 쏟아진다. 할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면허 아코디언 강사 이계익. 그는 조만간 집에 있는 아코디언을 아파트 단지 내 노인정에 갖다놓을 계획이다. “심심해 하는 노인들에게 아코디언을 가르쳐주고 싶다.”

 

[주간조선] 2009년 09월 22일(화) /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아코디언으로 제2의 인생 즐기는 이계익 전 교통장관 

 

# 취미 : 누드 크로키, 아코디언 연주

# 별명 : 도깨비

# 특이사항 : 매년 마라톤 풀코스 23회 완주(최고 기록 3시간40), 지난 4월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 이끌고 해발 5400m까지 오름.

# 희망 : 실버 아코디언연주단 창단, 실버 마라톤클럽 조직. 그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음.

 

사회활동에서 떠난 후에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나 고민하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화두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오거든 다음을 주목해 보자.

 

은퇴하면 예체능으로 사세요.

 

#문제 : 현역 시절을 국영수로 살았다면, 나이 들어서는?

#: ‘예체능이다.

 

맞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무수히 많은 철조망을 통과하기 위해 국어, 영어, 수학이 필요했겠지만 은퇴 후에는 예체능으로 재무장해야 인생을 90세까지 건강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여유있고 괜찮게 늙어가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 한 사람을 소개한다.

 

주인공은 바로 이계익(70) 전 교통부장관.19938월 우리나라 고속철 차량 선정 때 최종 도장을 찍은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소 만나는 사람에게 장관될 때까지 정말이지 국영수로 많은 관문을 통과했다.”면서 이제는 예체능이야.”를 항상 강조한다.어느날 문득 그에게 준비하지 못한 은퇴가 찾아왔지만 곧바로 국영수를 버리고 예체능을 택했다. 적어도 비참하게 늙지는 않을 방법이라고 자신한다.그도 그럴 것이 아코디언 연주를 배우고 누드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하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뛰었다.

 

또 일주일에 한번씩 젊은 여인의 누드를 보면서 스케치북에 정성껏 옮기다보니 개인전을 두어번은 열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럽지 않은 작품들이 쌓였다. 정신·신체가 10년 전보다 더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머리가 맑고, 가슴이 따뜻해지고 또 다리가 튼실하니 충분히 그럴만도 할 터. 지난주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위치한 이 전 장관의 자택을 찾았을 때에도 그는 아코디언으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연주하고 있었다.“악보도 없이.”라고 말을 건네자 운전할 때 브레이크를 쳐다보고 밟느냐. 운전하다 보면 엔진도 보이고 하는 것이지.”라며 웃는다.

 

근황을 묻자, 소문대로 매주 화요일이면 서울 반포동 화실에 나가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를 감상한다고 답했다. 회원이 15명으로 홍익대 미대 출신 전문가들과 자신처럼 아마추어도 몇명 포함돼 있단다.또 매주 토요일 아침 9시에 친구들과 함께 인천 강화도나, 경기 양평·장호원 등으로 풍경화를 캔버스에 담으러 떠난다.

 

아울러 일주일에 2,3회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마련한 아코디언 연주공간에 가서 무료로 아코디언을 가르쳐 준다. 교통부장관을 그만둔 직후 독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악기점에서 아코디언을 구입, 독학으로 배운 실력이 어느새 강사 수준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강사 노릇도 했다. 아코디언 연주시범을 보이며 혼자 할 수 있는 유일한 오케스트라가 바로 아코디언이라는 예찬론을 폈다.

 

그는 은퇴하면서 몇 가지 생활신조를 정했다. 남한테 욕 안 하기, 일주일에 서점 세번 들르기, 지하철 타면 서서 가기, 외출할 때 수염 깎고 넥타이 매기, 걸어서 가기 등이다.

 

양보하고 즐겁게 천천히 사는 방법을 터득했지요.나이들면 대개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변화에 저항하게 되지요. 다 허깨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는 현역시절 선생, 관료, 기자 등 안 해본 것이 없다면서 그때를 잊고 앞으로 90세까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지나온 시절이 문득 떠올랐을까.6·25때 아픈 기억을 회고한다. 그러니까 배재중학 1학년때 6·25를 만나 천안집에서 가족과 함께 피란을 준비 중이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 아버지를 보자 총을 겨눴다. 마침 비오는 날이어서 아버지는 군용 우의를 입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 차림의 아버지를 인민군으로 오인, 어린 이계익 등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두발 발사했다. 이를 본 여동생은 충격을 받아 실신했고,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19513월 어머니는 동생 하나를 더 낳았는데 몇 개월 안돼 굶어 죽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서인지 집을 훌쩍 떠나버렸다. 중학 1년생인 이계익이 동생 둘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다행히 먼 친척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천안시내 한복판에 좌판을 깔고 달러장사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수소문 끝에 경기도 의정부 25사단 위병소까지 갔다. 하지만 말도 안 통하고 미군들이 자꾸 쫓아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처없이 걷다가 소양강가에서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이때 강가에 떠 있는 배 한 척을 문득 봤다.20인승 전마선, 주인은 70대 노인이었다.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뱃사공을 하다 보면 어머니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노인한테 통사정을 했다. 이후 하루 종일 강을 건너는 노젓는 뱃사공이 됐다. 뱃삯으로 미군한테는 왕복 1달러, 민간인은 담배 1갑을 받았다. 사공 이계익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백마강 달밤에를 부르며 피곤을 달랬다. 그러기를 3개월여, 이번에는 어머니가 어느 산골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소문 끝에 어머니와 상봉했으나 새 살림을 차린 것을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그때가 1952년 겨울. 이후 천안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양정중학 3학년에 편입한 뒤 양정고를 졸업하면서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실버가 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실버 아코디언 악단, 또 실버 마라톤클럽을 만들 생각입니다.인간의 DNA는 꾀가 많거든요. 열심히 하는 주인한테 그 DNA는 꼼짝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라톤도 해보니까 되고, 그림과 아코디언도 해보니까 다 됩디다.노인들이 방안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보다 라콤파르시타를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좋습니까.”

 

2007-06-18 26면 / 김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37년 경기도 평택 출생 

56년 양정고 졸업

61년 서울대문리대 철학과 졸업

6375년 동아일보기자

7881년 럭키금성그룹 이사

81KBS해설주간

8689년 한국관광공사 사장

93년 교통부장관

99년 문화일보 부사장

2000년 디지털타임스 사장

현재 호서대 객원교수

 

#주요 저서=소양강의 뱃사공(정우사,1978), 이계익의 3분경제(한국방송공사,1985), 세계화에 속고 달러에 울고(정우사,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