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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국의 '한없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풍월 사선암 2013. 8. 25. 23:44

전재국의 '한없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1980년 대학생이던 전재국의 신문 기고

'아버지 눈물의 뜻 평생 헤아리며 살겠다'

하나님에게 맹세지금이 그 맹세 실천할 때

 

1980101일 조선일보에 특이한 글<사진>이 실렸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필자는 3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례적인 글을 기억하고 있다. 전두한(剪頭漢·머리 자르는 자당시 대학생들은 전두환을 그렇게 불렀다)의 아들이 쓴 글이었다. 그때 필자의 느낌은 이랬다. 이 혐오스러운 인물에게도 자식이 있구나, 그 자식이 나와 동갑인 대학생이구나, 그 자식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구나. 그 아들의 이름은 전재국이었다.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문제가 다시 불거진 뒤에 갑자기 재국씨가 썼던 그 글이 생각났다. 조선일보 인터넷 사이트에 그 글이 남아 있었다. '젊은이 발언대'라는 코너에 실린 글의 제목은 '한없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해당 기사 PDF 보기)였다. 재국씨는 대학 교정에서 벌어진 '剪頭漢 화형식'을 지켜본 심정을 썼다. 모멸감과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담담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집에는 늘 일찍 들어가 대학생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고 썼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도 욕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소리도 했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 추징금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재국씨일 것이다. 아버지는 고령이고 자신은 장남이다. 재산도 재국씨가 제일 많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재국씨가 33년 전에 자신이 썼던 그 글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읽어 보았으면 한다.

 

재국씨 글에 따르면 12·12 사태가 난 그 겨울날 밤, 전 전 대통령은 집을 나서며 가족에게 "나는 시골 빈농에서 태어나 군 장성이 되었으니 내 인생에 결단코 후회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시골 빈농 출신이 죽어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성공했는데 무엇이 아쉬워 돈 때문에 이 치욕을 당하는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순간에 아내와 자식들을 바라보며 했던 그 생각으로 돌아간다면 이 모든 문제는 한순간에 끝난다. 재국씨는 "이제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아집과 사심 없이 국가에 봉사하시길 바란다"고 글을 맺었다. 그런데 지금 전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게 남은 것은 아집과 사심뿐인 것으로 보인다.

 

<1980101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재국씨는 19804월에 전 전 대통령이 술 취해 집에 돌아와 울었다고 했다. "네 친구들이 내 화형식을 한다며"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는 것이다. 재국씨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 눈물의 뜻을 평생 헤아려 보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 맹세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린다면 벌하여 주십사 하고." 재국씨는 그때의 그 맹세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1년 전에조차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어쩌다 보니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신을 향한 국민의 분노를 보고 아들 앞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대통령이 되어서 돈을 많이 받고 나중에 그 돈으로 떵떵거리며 잘살아야겠다는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도 국민으로부터 분노의 대상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들까지 욕을 먹게 하겠다는 것도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재국씨는 그 눈물의 뜻을 평생 헤아리며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 맹세를 다시 떠올리면 몇천억 재산은 한낱 종잇조각일 뿐이다.

 

지금 전 전 대통령에게 '당신의 인생은 무엇이었나?'고 물어보면 "대통령이었다"고 하기보다는 "군인이었다"고 답할 것 같다. 재국씨와 필자가 젊었던 시절 자주 불렸던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있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라고 부른다.

 

최근 만난 한 현역 군인은 재국씨 얘기가 나오자 "군인 아들이 어떻게 부자냐?"고 했다. 군인 아들도 사업을 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재국씨는 한 군인이 던진 이 소박한 의문에 담긴 뜻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 의문은 재국씨에게 '당신은 자랑스러운 군인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이다. 좋은 옷 맛난 것을 탐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하루빨리 형제자매가 모두 모여 전 재산을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했으면 한다. 이 상황에서 비자금으로 번 돈이다, 아니다를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법을 어긴 것이 있다면 처벌도 받겠다고 했으면 한다. 재국씨가 33년 전에 스스로 맹세한 대로 그 눈물의 뜻을 잠시 잊었던 것에 대한 벌로 생각했으면 한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 86세가 넘었다. 그 모든 사태와 사건을 뒤로하고 늙은 군인으로 돌아가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라고 노래했으면 한다. 그래서 재국씨가 "나는 군인의 아들이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양상훈 논설위원 / 입력 : 2013.08.21 03:04

 


 늙은군인의 노래-김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