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名文추천 / 崔秉宇 기자의 휴전 조인식 보도

풍월 사선암 2013. 8. 4. 17:28

名文추천 / 崔秉宇 기자의 휴전 조인식 보도

 

19537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협정 조인식에 李承晩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의 비겁한 기습남침으로 국토가 난장판이 되고 31개월간 피터지게 싸운 결과는 거의 원위치로의 복귀였다. 李承晩대통령은 다 이겨놓은 전쟁을 미국이 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것이다.

 

이 휴전협정 조인식을 보도한 1953729일자 조선일보의 사회면 머리 기사 제목은오고야만 休戰의 날. 統一爭取는 이제부터였다. 그 아래에는 五列봉쇄에 主眼이란 제목으로 서울주변의 검문검색 강화 조치가 보도되었다. 원치 않던 휴전은 6·25전쟁이 이제는 모습을 바꾸어 진행될 것임을 예고했다. 열전에서 냉전의 형태로 바뀌어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한국전쟁. 열전에서 300만 명이 죽고, 냉전에선 북한에서 300만 명이 餓死의 형태로 전사했다.

 

도발은 북한이 먼저 했지만 최종승리는 남한에서 거둘 것임이 거의 확실해진 오늘날, 전쟁 반세기 기념일에 즈음하여 읽어볼 만한 名文이 바로 7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에 실린 崔秉宇기자의 휴전협정조인식 참관기이다. 단순한 보도 기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순간을 서정적인 수필처럼 잡아내 萬感이 교차하게 만드는 名文이다. 崔秉宇기자는 그 뒤 한국일보로 옮겨 대만해협 위기를 취재하다가 타고 있던 함정이 침몰할 때 순직했다.

 

◀1953727, 휴전협정 조인식장인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인 해리슨 미 육군 중장 일행(왼쪽 테이블)과 공산군 수석대표인 남일 일행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AP>

 

(板門店 調印式場에서 崔秉宇 特派員發) 白晝夢과 같은 11分間休戰協定調印式은 모든 것이 象徵的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悲劇的이며 象徵的이었다. 學敎講堂보다도 넓은 調印式場割當韓國人 記者席은 둘뿐이었다. 유엔側 記者團만 하여도 約百名이 되고 參戰하지 않는 日本人 記者席十名을 넘는데 休戰會談韓國公的으로 代表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韓國運命은 또 한번 韓國人參與없이 決定되는 것이다.

 

二十七日 上午十時 正刻 東便入口로부터 유엔側 首席代表 해리슨將軍以下 代表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西便入口로부터 공산측 수석대표 南日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目禮도 없었다.기이한 전쟁終幕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한국의 용산 전쟁 기념관 정전 60주년 행사모습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배치된 두 개의 탁자 위에 놓여진 각 18통의 협정문서에 교전쌍방의 대표는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서명을 계속할 뿐이었다. 당구대 같이 퍼런 융에 덮인 두 개의 탁자 위에는 유엔기와 인공기가 둥그런 鍮器基盤(유기기반)에 꽂혀 있었다. 이 두 개의 너머로 휴전회담 대표는 2년 이상을 두고 총계 1000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의 세 가지 말로 된 협정문서 正本 9副本 9통에 각각 서명을 마치면 쌍방의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으로 준다. 그러면 상대편 대표가 서명한 밑에 이쪽 이름을 서명한다.

 

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의 東翼에는 참전 유엔13개국의 군사대표들이 정장으로 일렬로 착석하고 있으며 그 뒤에 참모장교와 기자들이 앉아 있다. 西翼에는 북쪽에 괴뢰군 장교들 남쪽에 제복에 몸을 싼 중공군 장교의 一團이 정연하게 착석하고 있다. 양편의 수석대표는 北面하여 조인하고 멀리 떨어져 좌우에 착석한 양측 장교단은 동서로 대면하고 조인하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유엔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陣地에 쏟고 있는 폭탄의 炸裂音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원수끼리의 증오에 찬 政略 결혼식은 서로 동석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하듯이, 또 빨리 이 억지로 강요된 의무를 긑마치고 싶다는 듯이 산문적으로 진행한다.

 

정전 6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북한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렸다. 한국전 참전 군인들이 기념행사를 위해 평양역에 도착하고 있는 모습. <AP>

 

해리슨장군과 南日은 쉴새없이을 움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劇的 요소도 없이 講和에서 豫期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停戰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각기 자기측 구미에 맞추어 가죽으로 裝幀하고 자로 표제를 박은 협정부도 각3권이 퍽 크게 보인다.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疆土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이렇게 의아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것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自答하였다. 1012분 정각 조인 작업은 필하였다. 해리슨장군과 南日은 최후의 서명을 마치자 마치 최후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는 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 버린다.

 

南日은 훈장을 가슴에 대여섯개 차고 있는데 반하여 해리슨 장군은 앞젖힌 여름 군복의 경쾌한 차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관례적인 합동기념 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

 

한국전 휴전협정

 

1953727일 미국과 북한, 중국 사이에 체결된 한국전 휴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19513월 북진을 계속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자 중공군은 이른바 4, 5월 춘계대공세(春季大攻勢)를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소련은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그 제의에 따라 휴전회담 개최를 요구하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은 현직 미국 대통령 중에선 처음으로 미국 알링턴 한국전 국립묘지 전쟁기념관을 찾아 한국전 정전 협정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행사의 의미를 참석한 참전군 그리고 한국측 관계자들과 함께 했다.

 

그뒤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에 대하여 휴전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북한측이 수락함으로써 78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군사분계선과 포로교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한 이 회담은 195178일 시작된 연락장교회의로부터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무려 25개월이 소요되었고, 159차례의 본회의와 500여회가 넘는 소위원회가 개최되는 등 지루하고도 힘든 과정이었다.

 

1953727일 오전 10시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중장과 북한과 중국측 대표 남일(南日)363항의 휴전조인문에 합의·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정전으로 끝맺게 되었다. 이로써 6·25전쟁은 정지되었으나, 국토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었다.

 

이 협정은 전문 536, 부록으로 되어 있으며, 영문 한글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과 4km 너비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으며(1~11),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가 구성되었다(1950).

 

출처 시사상식사전

 

 

참으로 비극적인 비극적 역사의 현재화 [2013.07.22 970]

 

[김연철의 협상의 추억] 유엔군 협정 서명까지 전투 계속 원칙고집이 낳은 소모적 사상자 아무도 패배하지 않으려 한 한국전쟁 휴전 협상, 오늘도 NLL 전쟁

 

한반도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휴전, 60년이 되었다. 전쟁은 오래된 상처로 남아 있다. 때로는 국 지전으로, 심리전으로, 혹은 이념 전쟁으로 살아난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시작된 날 을 기억할 뿐,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잘 모른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의 전선이 남쪽 끝까지 왔다가, 다시 북쪽 끝 까지 갔고, 결국 38선 근처의 제자리로 돌아 오는 데 걸린 시간은 9개월이다. 그리고 1951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은 2년이 나 계속됐다. 전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영화 <고지전>처럼, 많은 생명이 사라져갔 다. 비극이 중첩되고, 증오가 재생산되는 시 간이었다. 협상은 왜 그렇게 길어졌을까?

 

휴전 제안이 처음 나온 때는 195010월 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소련 쪽이 즉각 휴전과 외국군 철수 결의안을 유 엔 총회에 제출했다. 그러다 중공군 참전으 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국에서도 국무부를 중심으로 휴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인도 를 비롯한 중립국들도 전쟁 중단을 촉구하 고 휴전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북쪽 인민군 장춘산 대좌(오른쪽)와 유엔군 제임스 머리 대령이 정전협정 체결 협상 초기인 19511126일 판문점에서 남과 북을 가를 군사분계선을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제공

   

밖 전쟁터와 다름없던 협상 회의장

 

힘이 우세한 쪽은 휴전을 고려하지 않는 다. 교착이 장기화하면서 유엔군이나 공산 군 쪽 모두 일방적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했 을 때, 협상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51623일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사가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안했다. 미국도 그해 6 29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서 휴전 협상을 하라 는 훈령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에 게 내렸다. 다음날 리지웨이는 원산항에 정 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서 휴전을 위한 군사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뜸 들이던 소련·중국·북한은 서로 협의 해 71, 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변경하면 서 협상을 수락했다. 미 합동참모본부도 동 의했다. 협상 의지를 보이기 위해 공산군 쪽 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 였다. 개성은 전쟁 전 38선 이남 지역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산군 쪽이 통제하고 있었 다. 그해 10월 회담 장소가 판문점으로 변경 되고, 이후 판문점을 중심으로 분계선을 긋 는 과정에서 판문점 북쪽의 개성은 자연스 럽게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 ‘열린 성이라는 운명 같은 이름처럼, 먼 훗날이 되어서야 개 성은 공단의 형태로 남쪽에 개방됐다.

 

예비회담을 거쳐 710일 개성의 내봉장 에서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의제 를 정하는 데만 2주일이 걸렸다. 결정된 의 제는 의제 채택과 일정 군사분계선 설정 정전감시기구 전쟁포로 처리 외국군 철수와 평화적 해결 등 5개였다.

 

726일부터 두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 분위기는 살벌했다. 회담장 안은, 밖의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공 산군 쪽은 시선을 내리깔기 위해 유엔군 쪽 이 앉을 의자의 높이를 낮추기도 했다. 물론 유엔군 쪽의 항의로 시정됐다. 회의 도중에 욕설이 난무했고, 어떨 때는 2시간11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상대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키기도 했고, 반대 로 1시간 이상 쉬지 않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도 했다. 회담이 며칠씩 중단되는 경우도 적 지 않았다.

 

19511123일 양쪽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에 합의했다. 양쪽이 각각 2km씩 후퇴해 비무장지대를 만들고, 휴전 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적대 행위를 계속하 고,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경우 수정한다는 것이었다. ‘협정 서명 때까 지 전투 계속의 원칙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유엔군 쪽이 강조한 조항이다. 압도 적인 군사력으로 공산군을 압박하는 것이 협상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협상이 이뤄지는 동안 전투 중지에 합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모적인 고지전은 없었을 것이다. 사망자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군사분계선 협상이 이뤄진 19517월부터 11월까지 유엔군의 사상자 수는 6만 명에 달했고, 공산군 쪽 사상자 수도 23만 명이나 되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당선으로 변화 맞아

 

유엔군 쪽은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한 달 안에 다른 의제를 합의하면 휴전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전감시기구 논의 과정에서 양쪽의 입장 차이가 작지 않았다. 결정적 교착 요인은 바로 전쟁포로 처리 문제였다. 처음에 양쪽은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다. 1949년 체결된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이라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회원국 가입을 신청한 상태였고, 공산군 쪽도 제네바협정 준수를 강조했다.

 

195112월 포로 송환 협상이 시작됐을 때, 휴전 협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6개월을 이 문제로 씨름할 것이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포로 명부를 교환하면서 실망과 불신이 커졌다. 유엔군 쪽은 132천 명의 명단을 제시했지만, 공산군 쪽이 제시한 수는 겨우 11500여 명에 불과했다. 유엔군 쪽은 제네바협정을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11 교환 원칙을 주장했다. 공산군 쪽으로부터 더 많은 포로를 받기 위해서는 납북한 민간인을 포함해야 한다는 계산도 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그래서 유엔군 쪽은 자원 송환 원칙을 제기했다. 포로의 다양성은 한국전쟁의 특성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남한 출신 북한군 포로는 북한의 남한 점령 기간에 징집됐으나, 유엔군 쪽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38선을 넘기도 전에 다시 유엔군 쪽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포로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자원 송환 원칙은 심리전의 요소도 있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가 있다는 것은 바로 상대방 체제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다.

 

남한 출신 반공포로를 제외하고도 송환 거부 포로가 적지 않았다. 유엔군 쪽이 제시한 송환 거부 포로는 북한군이 7900여 명, 중공군은 14704명이나 되었다. 중공군 송환 거부 포로 다수는 장제스의 국민당군 출신이었다. 강제 징집된 이들은 중국이 아니라 대만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당시 회담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은 송환포로 총수보다 중국군 포로의 송환 비율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중국은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19527월 유엔군 쪽이 83천 명의 송환포로 총수를 제시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협상은 타결되고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이후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청춘이 죽었는가?

 

1953년이 되면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미국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했다. 195211월 미국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최우선 과제로 한국전쟁을 종식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한국에 갈 것이다란 제목으로 알려진 당시 유세 연설은, 전쟁영웅이던 아이젠하워의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당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이젠하워의 등장으로 국내 정치적으로 너무 허약해서 휴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위험부담이 커서 확전도 못한 트루먼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북쪽에 붙잡힌 국군포로 송환을 가로막았다. 19527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한겨레 자료

 

42천 국군포로 귀환 가능성 사라져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195335일 사망했다.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이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북한은 휴전 협상 초기부터 휴전을 원했다. 유엔군 쪽의 폭격으로 피해가 심각했다. 1953년 초 매일 300~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또한 국내 사정으로 전쟁 중단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변수는 이승만 정부였다. 미국은 휴전 결정 과정에서 한국에 의사를 묻지 않았다. 회담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따돌렸다. 이승만 정부가 휴전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6월에 대부분의 쟁점이 합의되면서 휴전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관제시위를 벌였다. 유엔군 쪽 휴전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쪽의 작전지휘권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북진을 불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은 618일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친공포로들과의 충돌을 완화하기 위해 반공포로는 육지의 7개 수용소로 분산 수용됐다. 수용소의 경비를 한국이 맡았기 때문에 미군이 물리력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 포로 35천여 명 중 27천여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미국이 우려한 것은 사실 반공포로 석방이 아니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조차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본국에 건의하고 있었다. 한국의 작전지휘권 이탈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경우를 대비해 비상계획을 수립했다. 바로 에버레디 계획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축출할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은 휴전 반대 시위와 반공포로 석방을, 국내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지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협상 수단으로 활용했다.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이라는 채찍이 아니라,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를 서울에 보내 협상하는 당근을 선택했다. 먼 훗날이 된 지금 반공포로 석방을 대미 자주 외교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42천 국군포로가 귀환할 가능성도 사라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53727일 오전 10시 휴전 협정 서명 조인식이 이루어졌다. 휴전회담 수석대표들이 참여했다. 쌍방 군사지휘관들의 서명은 그 뒤에 하기로 했다. 조인식 뒤 12시간이 지나서 휴전이 발효됐다. 조인식이 열리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던 포성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멎었다. 휴전회담을 시작한 지 218일째 되는 날이었다.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가?

 

휴전 협상이 남긴 유산이 적지 않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북방한계선(NLL) 문제가 대표적이다. 당시 대부분의 해·공군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은 해상에서 군사분계선을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전쟁은 물리적 피해와 가슴속의 38선을 굵게 그은 채 끝났다.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가?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아무도 패배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휴전 협상이 시간을 보내며 제자리에서 돌고 돈 이유이기도 하다. 60년 전의 이념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재화가,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다.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