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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풍월 사선암 2013. 7. 27. 09:06

[停戰 60] "開戰 나흘만에 파병확실히 옳은 결정이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6·25 참전국인 뉴질랜드 존 키 총리 인터뷰

 

"60년간 한국의 발전 감동적"6000명 파병, 45명 전사

참전용사 30여명 함께 訪韓 "공헌에 합당한 예우 위한 것"

 

"현재의 한국을 봤을 때, 뉴질랜드가 6·25전쟁 발발 직후 한국을 돕기 위해 파병했던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 키(Key·52·사진) 뉴질랜드 총리는 26"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의 발전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면서 말했다. 그는 "현재 한반도의 절반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나머지 절반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자유 민주주의와 올바른 정책이 성공한 국가를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27일 열릴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25~294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키 총리는 이날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뉴질랜드대사관저에서 본지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과 뉴질랜드는 1962년 수교했다. 1950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한국은 너무나도 낯선 나라였다. 하지만 유엔안보리가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자, 뉴질랜드 정부는 개전 나흘 만인 1950629일 북섬의 오클랜드(Auckland)항에서 파병 장병을 태운 소형 구축함 2대를 출발시켰다.

 

"어떻게 그렇게 즉각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키 총리는 "뉴질랜드는 오랜 유엔 회원국으로, 항상 자유와 같이 우리 국민이 믿는 가치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써왔다""당시 뉴질랜드 국민은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에 직면한 한국인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는 한국에 총 6000명을 파병했고 그중 45명이 사망했다.

 

195125일 한반도 서부 지역에서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자매의 모습(왼쪽 큰 사진). 사진기자 버트 애시워스는 사진 뒷면에작은 나그네들은 피란처를 찾아 이 땅을 헤매는 수많은 사람 중 일부일 뿐이었다고 썼다. 경기도 수원 화성에 걸린 유엔군 환영 현수막(오른쪽 위 사진)19536월 어느 피란민 움막촌의 모습(가운데 아래 사진),‘ 전쟁포로명찰을 목에 걸고 있는 젊은이(오른쪽 아래 작은 사진). 유엔군 종군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사진들이다.

 

이날 아침 일찍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국립서울현충원에 분향한 키 총리는 "이번 방한 기간 동안 비무장지대(DMZ)와 부산 유엔군 묘지도 찾을 예정"이라며 "여기서 싸웠던 분들, 특히 사망자 45명의 희생을 기리고 싶다"고 했다.

 

"한국 보훈처는 이번 기념식에 뉴질랜드 참전용사 4명만 초청했는데 뉴질랜드 정부 부담으로 참전용사 30명을 더 모시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키 총리는 "60년 전 한국에 왔던 용감한 분들의 공헌에 합당한 예우를 하기 위해"라고 말했다.

 

키 총리는 "박 대통령이 대북 원칙을 잘 세웠다""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처럼 노력하면 언젠가 북핵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한국이 통일된다면 뉴질랜드도 북한 재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과 뉴질랜드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면서 "뉴질랜드의 농업은 강하지만 쌀처럼 한국에 핵심적인 농산물은 생산하지 않고 있다. 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停戰 60] 세계 6·25 참전영웅 후손들 모여 '코리아 네트워크' 만든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미국·태국·에티오피아 등 41'참전용사 청년봉사단' 발족

 

"할아버지, ·다리 잃었지만 소중한 가치 지켜냈기에 참전 후회 안한다고 하셨죠

참전용사들 희생 기리고 6·25전쟁의 의미 알릴 것

SNS 통해 참전·지원국 21개국 모임으로 확대"

 

"할아버지나 부모님, 오빠처럼 군인으로서 한국에 봉사하지는 못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6·25전쟁의 의미를 되살리고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널리 알려 한국과 국제사회를 이을 방법을 찾게 돼 매우 기쁩니다."

 

올해 미국 명문 여대 웰슬리대에 입학하는 재클린 맥그레이스(20)"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 한편에는 항상 '코리아'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해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앨빈 볼더스(83) 전 연방 하원의원(민주·위스콘신)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한미군 2사단에 근무하면서 만나 한국에서 결혼했고, 그의 오빠도 현재 주한미군으로 근무 중이다.

 

◀미국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25(현지 시각) 열린‘6·25 참전 용사 청년 봉사단(KWV Youth Corps)’발족식에 참가한 참전 용사 후손들이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한종우 6·25 참전 용사 디지털기념관재단 이사장, 사무엘 물루이, 데인 웨버, 재클린 맥그레이스, 아티야 아라야퐁, 사만다 프레이저. 이날 발족식에는 참전 용사 3세 후손 26명과 2세 후손 15명 등 41명이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다.

 

맥그레이스는 "할아버지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억 때문에 먼저 나서서 과거를 언급하려 하지 않으셨다. 6·25전쟁의 기록을 보존하고 후대에 알리는 것은 우리 세대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6·25 정전 60년을 이틀 앞둔 25(현지 시각) 미 워싱턴 DC에선 맥그레이스와 같은 참전용사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6·25전쟁 참전용사 청년봉사단'(KWV Youth Corps)을 발족했다. 6·25전쟁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 재단(이사장 한종우) 후원으로 결성된 청년봉사단에는 참전용사 3세 후손 26명과 2세 후손 15명 등 41명이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매년 연례회의를 열어 6·25전쟁의 의미와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한국 알리기 등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를 통해 후손 조직을 21개 참전국(전투병력 파견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6·25 참전용사 윌리엄 웨버(왼쪽 하늘색 상의를 입은 이)가 지난 56(현지 시각)박근혜 대통령의 워싱턴 DC 6·25전쟁 참전기념비 헌화 일정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 웨버는 위 사진 속 데인 웨버의 할아버지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윌리엄 웨버(87) 예비역 대령의 손녀 데인 웨버(23)도 봉사단에 합류했다. 윌리엄 웨버는 워싱턴 6·25전쟁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로,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만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데인 웨버는 "할아버지가 그날 만남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했다. 웨버는 5세 때인 1995년 할아버지를 따라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고, 호주에서 열린 6·25 행사에도 간 경험이 있다. 그는 "할아버지는 팔·다리를 잃었지만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싸웠고, 또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했다. 현재 내셔널지오그래픽지 리서처로 활동하고 있는 웨버는 "당장 6·25전쟁 자료를 발굴하고 후손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미국뿐 아니라 에티오피아·태국 참전용사 후손들도 동참했다. 에티오피아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무엘 물루이(29)의 할아버지는 왕실경호단 소속으로 6·25에 참전했다. 물루이는 "5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한국인들은 에티오피아가 참전했던 사실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이 여전히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는 걸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태국 참전용사 첨니안 사아드이암 중령의 손녀 아티야 아라야퐁(21)"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6·25전쟁을 그냥 역사책에 한 줄 나와 있는 사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아라야퐁은 하지만 2011년 방콕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할머니와 함께 초청받아 참석해 다른 참전용사들과 한국인들을 만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을 했는지를 알게 됐고, 할아버지뿐 아니라 태국 참전용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은 생각에 봉사단에 자원하게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