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선율,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 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인 거장 진창현 이야기 -
진창현(陳昌鉉:1929.10-2012.5)은 널따란 모래밭 길을 지나면 은어떼가 노니는 감천(甘川)이 흐르는 곳, 경상북도 김천의 이천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어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 14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사숙으로 바이올린 제작의 1인자가 되었다. 그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세계 최고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의 신비스런 제작기술에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47세 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총6개 부문 중 5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바이올린 ‘무감사(無監査)’ 제작자로 인정을 받아 세계 최고의 장인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한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는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조센징으로 살기를 고집하며, 오직 바이올린에만 일생을 걸었다.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집념과 욕망은 마침내 그를 ‘동양의 스트라디바리(Stradivari)’라는 세계적인 명장으로 만들어 내고 말았다
국제 콩쿠르 시상 식장에서 그는 졸고 있었다.
1976년 12월, 미국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는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가 열리고 있었다. 이 행사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 대한 세공과 음향의 두 부문으로 나뉘어 총 여섯 개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거장을 가리는 큰 대회였다.
행사장인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대학 강당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작자들이 모두 초청되었고, 거기에는 진창현도 초대되어 직접 만든 악기를 출품하고 있었다. 진창현은 시상식이 거행될 대회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한 부문에도 해당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진창현은 오랜 여행의 피로 때문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했다.
그가 잠에 빠져들어 꿈속을 한참 헤매고 있는 그 순간에 행사장의 무대에서는 콩쿠르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영예의 금상 수상자가 호명되고 있었다. 이때 진창현은 꿈속에서 일본의 도쿄(東京) 문화회관에서 개최는 바이올린 연주회의 콘서트마스터 자리에 앉아 연주회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 연주자의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자가 소개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지휘대를 바라보니 지휘자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비아바(Biava)씨였다. 그리고 진창현 자신은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일어나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닌데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참으로 난감한 처지였다.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어요!” 아무리 크게 소리를 쳐도 박수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나는, 나는 할 수 없어요.”
그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허우적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이게 또 어인 일인가. 대회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수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얼떨결에 그도 따라 같이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도 시상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는 이가 없었다. 행사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청중들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미스터 췡쒠 찐! 미스터 챙휸 찐!”
단상에서는 사회자가 몇 번이고 수상자 이름을 반복해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잘 알아듣기 힘든 중국인의 이름 같기도 하고, 한국식 이름인 것도 같았다. 그는 아마도 동양에서 참가한 어떤 기술자인가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자, 사회자는 당황하며 다음 수상자인 비올라 부문의 수상자 이름을 불렀다.
“The Winner is Mister 챙휸 찐!”
그런데 이번 수상자도 같은 이름인 것 같았다. 사회자가 또 계속 이름을 불러도 단상에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박수소리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사회자는 다음 첼로 부문 수상자의 이름을 불렀다. 계속해서 또 같은 이름이었다.
“The Winner is Mister 챙휸 찐! Where is 챙휸 찐!”
그때서야 그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챙휸 찐’은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부르는 미국식 발음이 아니던가. 사회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더욱 열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 속에 다리를 휘청거리며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간간히 들리던 박수소리는 뇌성과 소나기처럼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그의 앞에는 꿈같은 현실이 실재로 펼쳐지고 있었다. 첫 번째 수상을 하고 돌아서려는 그를 자꾸 붙들며 계속 상을 안겨주는 바람에 무슨 상을 어떻게 탔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창현은 이 콩쿠르에서 총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의 음향부문을 제외하고 무려 다섯 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자리로 돌아와 수상의 감격에 젖어 있으려니,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수도 없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던 시절과, 밤을 지새우며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만들던 시절들이 한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상의 기쁨을 전하고 사흘 후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행사가 끝난 다음날 그는 일본의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한국의 고향땅에 누어계신 어머니 묘소로 향했다. 어머니는 그가 이 수상을 하기 6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마중 나온 누이동생과 함께 묘소에 올라 나란히 어머니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가방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꺼내서 어머니의 묘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큰 상을 받아 왔어요. 기쁘시죠? 어머니!”
그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묘소를 눈물로 참배하고서 금메달 2개를 어머니 묘소 앞에 묻었다.
여섯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만나다
진창현, 그는 1929년에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김천군 이천마을(일명 배시내/ 현재지명-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태촌3리)이라는 곳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조선인이 한참 핍박을 받고 있던 때, 시골에서 태어난 창현이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두꺼비기름을 팔러 마을을 찾아온 떠돌이 약장수에게서였다. 손님을 끌기 위해 약장수가 켜대는 바이올린 소리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하루 종일 약장수 뒤만 따라다녔다. 이때 창현은 6살박이 어린 소년이었다.
그 때 약장수는 향로장수라고도 불렀는데,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을 파는 사기꾼이라는 이유로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창현은 이런 약장수가 올 때만을 늘 기다렸다. 대체로 보통 사람들은 소리가 좋은가 보다 하고 그냥 지나치는데, 창현은 어린 나이에도 바이올린 소리에 매료된 것부터가 타고난 인연인 것 같았다. 훗날, 이것이 나와 바이올린의 첫사랑 같은 만남이었다고 진창현은 회고했다.
그 후 소학교 4학년 때, 창현의 집으로 하숙을 온 아이카와 기쿠에(相川喜久衛) 라는 일본인 선생님이 가져온 바이올린이 두 번째 인연이었다. 창현은 선생님 방에서 바이올린의 연주를 듣기도 하고 직접 만지기도 하였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학교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저녁을 먹은 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바이올린을 들고 마을 앞 감천(경북 김천시를 북동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 강가로 나가 바이올린을 켜곤 하였다.
선생님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창현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창현은 ‘사쿠라(벚꽃)’와 ‘고조노 츠키(황성의 달)’라는 곡도 이때 배웠다. 이렇게 아이카와 선생님과의 만남은 창현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바이올린 인생을 결정짓는 시작점이 된 것이었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초라한 농촌 마을에 찾아와 바이올린으로 어린 창현에게 한줄기 빛을 심어준 특별한 사람이었다.
14살에 현해탄을 건너다
창현이 김천중학교에 다닐 때에 창현의 아버지(진재기陳在基)는 폭음으로 간이 손상되어 빚더미만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창현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마침 일본에 살고 있는 이복형들로부터 일본의 야간 중학교는 학비가 공짜나 다름없이 매우 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꿈 많은 소년 창현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형들의 말을 믿고 야간 학교라도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1943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행을 결심하고 홀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 건너간 창현은 트럭 운전을 하는 큰형을 따라 조수역할을 하면서 후쿠오카(福岡)에서 야간 중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가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석탄 운반 작업을 하고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학교는 1주일에 세 번 정도 나갔다. 어떤 때는 분뇨 수레를 끌고, 파친코 가게에서 청소를 하고, 고철장수 등 힘겹고 고된 노동을 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1945년 창현이 16살일 때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창현은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고향에 가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창현은 힘들기는 해도 여기에는 미래로 가는 빠른 길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항구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나르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갔다.
미군 불도저를 따라다니다가 배운 영어 실력으로 미군을 상대로 린타쿠(인력거)를 끌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요코하마(橫浜)에 가서 그 일을 시작했다. 워낙 몸이 허약해서 오르막길에서는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려야 했다. 그래도 영어를 조금하는 바람에 미군들 사이에 인기가 좋아서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었다.
이렇게 몇 년간 인력거를 끌면서 돈이 모이자 창현은 교사가 될 결심을 하고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이때가 1951년 창현의 나이 22세가 되는 해였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창현은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 3학년 때에 교직과정을 이수해 교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교사 자격을 따자마자 담당 교수에게서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고 앞이 깜깜했다.
“자네는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땄다고 해도 채용이 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자격증은 쓸모가 없는 거야.”
죽을힘을 다하여 배운 공부가 이렇게 허사가 되자 창현은 실의에 빠졌다. 결국 교사의 꿈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허탈감과 상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참으로 앞날이 암담했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다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아무런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현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 어느 강당 앞에서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회 간판을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글씨에 끌려 그 강연을 듣게 되는데, 그 강연회는 도쿄(東京)대학의 생산기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토가와 히데오(糸川英夫)’ 교수가 세계 최고의 명기로 불리는 바이올린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의 소리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신비이며,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인간이 로케트를 만들어 달로 쏘아 보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제작 기술은 20세기 최첨단으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300년 전과 같은 재질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제작 기술을 제자는 물론이고 자식에게 조차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대학 4학년인 창현은 그 ‘불가능’이라는 말에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도전해 보자.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대한 도전이라면 일본도 그 누구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일은 내 일생을 걸고 착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가야할 길은 오직 이 길뿐이라고 마음속에 굳은 결심을 하였다.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자, 그 길로 대학 앞의 시모쿠라(石橋) 악기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가 산 바이올린 스즈키 4호는 핸드메이드가 아니고 기계로 찍어낸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서서히 음감을 채득해 나갔다. 바이올린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창현의 말에 악기상은 이런 말을 해줬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모르지만, 그 걸로 밥 먹고 살기는 힘들 걸세. 바이올린 장인은 꽤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네. 나머지는 모두 생활하기도 어려운 형편일 걸세.”
창현의 의지가 굳은 것을 알고 그 악기상은 장인 명부를 보여 주었다. 그 악기점에는 바이올린 제작자 협회의 회원 명부가 있었는데, 엄청난 제작자들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
조선인이라는 벽은 너무도 높았다
그 다음부터 창현은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이타바시(板橋)의 오오야마(大山)에 사는 85세의 장인이었다. 시모쿠라 악기 상점에서 선생님께 찾아가 보라고 추천을 해줘서 왔다고 했다. 사실은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제자가 되어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겠다는 말에 그 나이 든 장인은 매우 반가워하였다.
“이제 나는 얼마 남지 않았어. 자네가 제자가 되어주면 도구들과 재료를 모두 자네에게 주지. 괜찮다면 내 제자가 되어 주게나, 그런데 자네 고향은 어디인가?”
창현은 너무나 기뻐서 솔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태어난 곳 말입니까? 태어난 곳은 조선의 김천이라는 곳입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미소가 가득 번져 있던 노인의 얼굴색이 갑자기 흐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구들을 다 주겠다고, 이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일을 배워도 좋다고 흔쾌히 말하던 노인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네, 미안하네.”
노인은 금세 말을 바꾸었다. 이후 이런 일은 다른 바이올린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그는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단지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거절당한 것이었다.
1955년 26살에 창현은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자리가 없어서 파친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가끔 요코하마(橫浜)로 찾아가 ‘하와이’라는 다방에서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창현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이 곡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아사히신문(朝日新聞) 3면의 기사를 보고 ‘바로 이거야!’ 하며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한 농부가 신슈(信州) 나가노현(長野縣) 나카노(中野)시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이 사람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 사람은 징병되어 하얼빈으로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소총을 메고 거리를 걷다가 아름다운 음색이 귓속을 파고들어 발길을 멈추었다. 소총을 맨 채로 소리 나는 집을 방문하자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유태계 러시아인은 무장한 병사가 방문하자 혹시나 체포당하는 것은 아닌지 깜짝 놀라면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가 떨면서 내민 바이올린은 세계적인 명기로 알려져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그 바이올린은 러시아 황제의 궁전에서 사용하였던 귀족의 바이올린이었다. 그 이후 그 병사는 그 집을 자주방문하면서 그 바이올린 형태를 종이에 복사했다. 전쟁이 끝나 자 그 복사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창현은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창현은 이런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나를 거절하지 않겠지 생각했다. 그날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배낭과 침낭을 짊어진 채 나가노로 향했다. 정말 그 사람은 농촌에서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창현은 다시 또 다른 바이올린 장인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마쓰모토(松本)지역의 아사히쵸(旭町)에 사는 ‘스즈키시로(鈴本四郞)’라는 장인을 찾아갔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은 어딜 가나 거절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그 장인은 지금까지의 사정을 듣고 안됐다고 생각했는지 창현에게 공작용 칼과 작은 대패를 한 개씩 내주었다. 그리고 그는 창현에게 기소 후쿠시마(木曾福島)에 있는 스즈키(鈴木) 바이올린 공장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고맙게도 그 장인은 소개장도 써 주었다.
창현은 기소의 스즈키 공장으로 가기 전에 신슈 근처를 유랑하다가 마지막으로 공장 몇 군데를 더 찾아가 봤다. 역시나 모두 허사였다.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정말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담장 너머로 훔쳐보며 기술을 배우다
1957년 8월 여름 창현은 하는 수 없이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소 후쿠시마로 향했다. 이때 창현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런데 기소 후쿠시마에 도착하고 나서도 공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느낌 때문에 이번에도 거절을 당한다면 더 이상 두드려 볼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바이올린의 꿈을 완전히 접는 것을 의미했다.
사흘이나 기차역에서 잠을 자고 방황하며 망설이다가 마침내 공장을 찾아갔다. 시모죠 보우노스케(下條 房之助)라고 하는 사장에게 스즈키 시로 선생의 소개장과 명함을 내밀었다. 채용 여부는 공장의 간부회의에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틀 후에 다시 찾아가니 공원들마저도 조선인을 싫어한다고 했다. 이 공장에서도 그는 결국 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어서 기차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잠을 자며 노숙자 생활을 했다. 다행히 고마운 경찰의 도움으로 공장 근처에 있는 미다께(三岳)의 임도(林道)공사 현장에 일자리를 구하고 바이올린 공장 바로 옆에 처소를 마련하였다.
겨울이 되어 공사장이 쉬는 동안에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으로 가서 창가에 붙어 서서 공장 안을 들여다보며 바이올린 제작과정을 눈여겨보았다. 이렇게 눈으로 훔쳐보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공장에서 누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잘 봐 두었다가 퇴근할 때 선물을 주며 말을 걸고서 친분을 쌓은 뒤에 그 사람의 집을 방문하여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기술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와 도구도 하나씩 마련해 나갔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봄이 되자 공사장 근처 산속에 나무기둥을 세워 오두막집을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는 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겨울철에만 바이올린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렇게 만들고 부수기를 수십 번, 각고의 노력 끝에 1958년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첫 번째 바이올린을 탄생시켰다.
댐에서 물을 방류할 때 쏟아지는 자갈을 채취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에 무려 20입방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퍼내기도 했다. 체구가 크지도 않은 그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래서 한때 그에게는 ‘100마력’ 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11살 연하의 아내를 맞이하다
창현은 어떻게든 많은 양의 바이올린을 만들려고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했다. 어떤 때는 이삼 일을 잠을 안 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늘 고민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세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하고 바이올린 진열장 앞에 주저앉아 수없이 고민했다. 이렇게 훌륭한 바이올린 제작을 꿈꾸던 청년 창현은 좋은 도구를 사기 위해 기소 후쿠시마 이웃에 있는 아게마쓰마치(上松町) 마을의 골동품 상점에 가게 되었다. 처음엔 쓸 만한 도구를 찾지 못해서 그냥 돌아왔다. 작업을 하다가 대패가 필요해진 창현은 오랜만에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날은 상점에 들어가 말을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인가 주인을 부르자 한참 후에 뒷문 쪽에서 20세 정도의 아리따운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 골동품 가게 주인(제일교포)의 딸이었다. 이때 그 처녀는 손으로 기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운 옷을 입은 처녀의 모습이 창현의 마음에 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수줍어하는 그녀가 정말 귀여워 보였다. 창현은 그때가 그녀를 여성으로 의식하게 된 첫 순간이었고,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 가슴이 설레었었다.
창현은 그날 그녀의 아버지가 외출중이라서 덕분에 그녀를 만났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후 창현은 자주 그 집에 드나들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어느 날은 그녀가 창현의 오두막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후로 무려 32차례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렇게 오두막을 오가며 정이 쌓이자 창현은 마음씨 고운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바이올린에 미친 정신병자로 통하고 있던 창현과의 결혼은 아버지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창현은 32살의 나이에 11살이나 아래인 옥녀(이남이)와 1961년 3월 3일 기소 후쿠시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오두막으로 시집 온 그의 아내는 ‘미친놈한테 시집온 이상한 여자’라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생활이 나아질 것은 없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수문이 열리면 부부가 함께 댐에 가서 자갈을 퍼 올려야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작품 하나에 3,000엔씩을 받다
결혼 후 거의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창현은 그때까지 40개 정도의 바이올린을 완성하였다. 초기의 작품이라 완성도가 떨어져 부셔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그의 아내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부수지 말아요. 괜찮은 것만 골라서 도쿄에 가서 팔아 보는 게 어떻겠어요?”
아내의 말에 공감한 그는 괜찮아 보이는 10개 정도를 골라 골판지 상자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도쿄 아사쿠사(淺草)와 간다(神田) 등의 악기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악기점은 모두가 냉정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단 한 개만이라도 팔고 오기를 기다리는 아내 생각에 많은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악기 브로커인 다카기(高木) 씨를 만나 당시 일본 바이올린계의 거장인 도호가쿠인(桐朋學園) 대학의 ‘시노자키 히로쓰구(篠崎弘嗣)’ 선생을 소개받게 되었다.
시노자키 선생을 만난 것은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안고 찾아간 시노자키 선생은 그의 바이올린을 들고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바이올린 열점을 세심하게 살펴본 시노자키 선생의 평가는 간단했다.
“소리가 꽤 좋군! 한 대에 3,000엔씩 좋다면 전부 사겠네.”
“이것은 성인용으로는 다소 부족하니 어린이용으로 만들어 가져오면 모두 다 구입해 주겠네.”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바이올린이 상품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점이 너무 기뻤다.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이제는 바이올린에만 매달려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바이올린 장인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도쿄에서 기소까지는 8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너무나 기뻐서 어떻게 집에 오는 줄도 몰랐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껑충껑충 뛰며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서로 얼싸안고 방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시노자키 선생은 당시에 일본 바이올린계의 3대 거장 중의 한 분이었다. 시노자키 선생은 우리나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선생과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洪蘭坡) 선생과도 도쿄음악대학 동기생이었다. 특히 홍난파 선생과는 함께 하숙을 하고 아사쿠사(淺草)에서 바이올린 연주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시노자키 선생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고, 그리고 만드는 대로 모두 다 구입해 주었다. 창현은 1961년 10월 시노자키 선생의 권유로 도쿄에서 가까운 마치다(町田)시 가나모리(金森)로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도 밤늦게까지 죽어라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대부분 장인들이 1주일에 한 대 정도 만들었으나 창현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1주일에 여섯 대까지도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바이올린을 만든 적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없었다. 생활비를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수의 바이올린을 만들어 낸 것이었지만, 이 일이 결과적으로 바이올린 제작 실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무수히 들었던 말이 있었다.
“어쨌든 많은 숫자를 소화해라. 그러면 자연히 보이게 된다.”
3천 엔짜리로 동경예대에 합격하다
1965년 3월 어느 날 예상 밖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그가 제작한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東京藝大)에 합격한 학생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동경예대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명문 예술대학으로, 거기에 시험을 치르려는 학생들은 대개 유명 메이커의 고가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진창현의 바이올린으로 시험을 친 학생이 합격했다는 것은, 그의 바이올린의 음질이 유명 메이커 바이올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 셈이었다.
좋은 바이올린을 만드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이요 수많은 난관을 부딪쳐 이겨 내야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이런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역시 바이올린 제작은 어려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
그러나 창현은 끈기 있게 이 일에만 매달렸다. 매일매일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다. 많이 만들다보니 실력이 날로 향상되어 시노자키 선생도 믿기지 않는 듯 이렇게 물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야.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작하는 것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토카와 교수가 말한 ‘잃어버린 기술(Lost Art)’은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듯 독자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창현은 어떻게든 한 발짝씩 다가가기 위해서 끝임 없이 기술을 찾아 나섰다.
바이올린의 니스로 이용되는 색소 중에서도 황색과 적색은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네팔, 베네수엘라, 르완다, 콩고, 에티오피아, 멕시코나 페루의 인디오 마을과 아마존의 정글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색소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오징어 먹물, 어린아이의 변, 지렁이 까지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좋은 바이올린은 콘서트홀의 맨 뒷줄까지도 소리가 분명하게 전달된다. 어떻게 하면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을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밤을 새웠다. 지금도 베일 속에 감추어진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제작의 비결은 찾을 수가 없다. 그 명기는 스트라디바리가 제자에게도, 친자식에게도 제작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최고를 자랑하며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 되고 난 후 1968년 10월에 진창현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25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열네 살 때 어머니의 품을 떠나 25년 만에 39살의 나이로 어머니 품에 돌아와 안기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한국 땅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지난 세월 창현의 가슴에 사무쳤던 그리움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일본에 살면서 그는 늘 고향의 어머니(천대선千大善) 생각에 밤마다 울었다. 창현이 고향집을 떠나올 때 먼발치까지 따라오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며 이별을 슬퍼하시던 어머님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지냈다. 창현에게 어머니는 아주 특별한 분이셨다.
창현의 어머니는 조금 늦은 나이에 창현을 가졌다. 아이를 너무 늦게 가진 까닭에 어머니의 젖이 부족하여 아들을 살리려고 이웃 동네까지 젖동냥을 다녀야했다. 아들이 죽는다면 멸시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아이를 살려야 했다. 이렇게 창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전부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창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분이었다. 창현이 다시 일본에 돌아와서 일에만 매달려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이상하게 가슴이 무거워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다가와서 말했다.
“여보, 마음 단단히 하고 들으세요.”
“아가씨한테서 지금 연락이 왔는데, 어머님이 조금 전에 운명하셨대요.”
창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서 부산으로 갔다. 어머니는 전에 창현이 사드린 수의를 입고 주무시는 듯이 누워 계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창현은 어릴 때처럼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릴 적에 맡았던 어머니의 향기가 났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논둑길을 달려 소달구지를 쫓아오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뒤로하고 떠나온 그 길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1976년, 향년 77세에 그렇게 돌아가셨다. 이때 창현의 나이 47세였다. 아들을 떠나보내 놓고 평생을 가슴 태우며 고생한 어머니는 정작 아들이 무엇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하신 채 눈을 감으신 것이다. 그래서 창현은 그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3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가지고 어머니 묘를 찾을 수 있었다. 누이동생과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참석한 그 자리에서 창현은 아들과 함께 바이올린으로 ‘봉선화’를 어머니에게 연주해 드렸다.
“어머니, 들리세요? 어머니께서 늘 좋아하시던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노래예요. 여기 어머니의 아들과 손자가 연주하고 있어요.”
제작자 콩쿠르에서 5관왕에 오르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그의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가 점차 올라가고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1974년에는 미국에서 발행된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제목으로 그의 바이올린 제작 활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일본판과 한국판으로도 번역되어 나왔다. 이를 계기로 그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바이올린의 가격도 점점 올라가 한 대에 50만 엔이라는 가격이 붙게 되었다.
마침내 진창현의 명성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1976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최고 행사인 ‘제2회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 대회에까지 초대되었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제작자와 최고의 장인들이 초대되는데, 이 세계 최고의 콩구르 행사에서 그는 6개 부문 중 무려 5개 부분을 석권하여 금메달 5개를 목에 걸었다.
그를 이렇게 세계적인 장인으로 이끌었던 것은 우연히 강연회에서 듣게 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그의 도전정신을 일깨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한 길이 그로서는 가능한 길이 되었던 셈이다.
마침내는 그에게 냉소적이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왔지만, 그 통로에 들어선다고 해서 누구나 끝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인생이 일종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만 너무 집착하면, 앞길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손을 못 댄 채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기술자의 길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완성됩니다. 장인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가장 큰 관건은 끝까지 해보겠다는 집념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집념이 없이는 고비를 넘길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장인이 되지 못하고 손재주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념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타고난 직관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아이디어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성공을 향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제가 고생하여 창출한 기술로 많은 연주자들에게 혜택을 줌으로써 감사와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이후 진창현의 수천만 원짜리 바이올린은 5년 치의 예약분이 밀려 있을 정도로 세계 유명 연주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명장인 ‘마스터 메이커’가 되다.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無監査)제작자”(더 이상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하는 최고의 제작자에게 주는 명예)라는 특별인정을 받음으로서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제작자 콩쿠르에서 금메달 3개 이상을 수상한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칭호)라는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전 세계에 5명밖에 안 되는,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후 1998년에는 「일본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예술문화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12월에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진창현의 일대기가 연재되면서 일본 사회의 화재인물로 등장하였다. 2003년 4월에는 “천상의 현”이란 제목의 만화로 연재되었으며, 2004년 11월에는 진창현의 일대기를 다룬 한 단편 드라마가 후지TV 개국 45주년을 기념해 제작되기도 했다. 3시간짜리 특집극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峽を渡るバイオリン)”으로 방영되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의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 3관왕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8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일본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인 ‘COSMOS 영어2’(三友社)에 진창현 이야기가 한 챕터(Chapter)에 걸쳐 “The Mystery of Violin"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2002년 KBS 1TV 한민족 리포트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야-바이올린 장인 동경 진창현”으로 방영이 되었고, 2005년 SBS TV에서 광복 60년 특집 다큐드라마에서 “천상의 바이올린”으로 소개되었다. 2007년 4월 1일 SBS TV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에서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로 방영되었고, 4월 9일에는 생방송 화재의 인물 : Zoom -人 ‘김미화의 U’에서 “천상의 선율 바이올린 명인 진창현”에 출연하였다.
2008년 10월, 마침내 그의 공로를 인정한 우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도 가지 않는 불가능한 길에 도전하여 큰 업적을 이룬 진창현, 그는 2012년 5월 13일 일본 도쿄 조후(調布)시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천상의 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가 떠난 2개월 후에는 그가 처음 바이올린을 만들었던 고장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의 신스이 공원에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념비가 세워졌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진창현은 병상에서도 항상 태극기를 옆에 두는 등 최후의 순간까지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 3월에 출간한 ‘천상의 바이올린’이란 자서전 말미에 후대 젊은이들에게 그는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아무리 결과가 보이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정열을 가지고 진지하게 도전하여 끈기 있게 지속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길이 열린다.”
그는 늘 그렇게 끈기와 열정으로 바이올린만을 쫒아 다녔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 천상의 그 소리, 100% 그 신비의 소리에 거의 가깝게 도달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생애의 끝까지 성공을 쫒아가는 즐거움으로 그는 살았다고 한다. 그의 그칠 줄을 모르는 불굴의 집념은 불 같은 욕망을 낳았고, 그 불타던 욕망은 마침내 화려한 성공을 낳은 것이다.
누가 명장을 꿈꾸는가? 진씨와 같은 집념과 끈기, 꿈과 욕망을 가지고 끝까지 도전하는 자만이 영광의 월계관을 쓸 수 있다는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미래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어 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글을 시작하고 이제 마치고자 한다. 이글을 마치면서 한가지 바램은 그가 태어난 고향마을에 그의 자랑스런 생애를 추념하는 작은 기념비 하나라도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 진창현(陳昌鉉:1929.10-2012.5) 1929년 10월 25일(음력 9월 23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출생 1943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다 195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졸업 1957년 일본 기소 후쿠시마(木曾 福島)에서 바이올린 독습 시작. 1965년 3월 진창현의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 합격생 출현 1971년 제1회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개인전(동경 시부야澁谷 우메하라梅原 화랑) 1973년 제2회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개인전(동경 시부야澁谷 우메하라梅原 화랑) 1974년 미국 ‘다이제스트’지에 “동양의 스트라디 발리”란 제목으로 진창현의 바이올린 제작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종목 중 5개 종목에서 금메달 수상.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無監査)제작자” 특별 인정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칭호를 받음 1998년 일본 문화진흥회로부터“국제예술문화상” 수상 2000년 12월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 “진창현 일대기” 연재 2001년 일본 방송협회 종합 TV의 “작은 여행”에 출연 11월 쵸후(調布)시 “시민문화상” 수상 2002년 1월 한국 KBS 1TV - 한민족 리포트 “울밑에 선 봉선화야” “바이올린 장인 동경 진창현” 방영 2004년 11월 일본 후지TV 개국 45주년 기념 3시간 특집극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방영 2005년 8월 15일 한국 SBS TV - 광복 60년 특집 다큐드라마 “천상의 바이올린” 방영 2008년 3월 일본 고교 2학년 영어교과서 코스모스 2호에 “더 미스테리 오브 바이올린 The Mysteries of Violin” 으로 게재 200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 무궁화장”을 수상. 2012년 5월 도쿄 조후(調布)시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향년 83세로 사망 2012년 7월 일본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의 신스이 공원에 “기념비” 제막
'행복의 정원 > 생활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보 , 사랑해 (0) | 2013.07.26 |
---|---|
축의금 만삼천원 (0) | 2013.07.22 |
소중한 사람 - 장영희 교수 (0) | 2013.07.20 |
하필이면 - 장영희 (0) | 2013.07.19 |
시어머니의 증발 (0) | 2013.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