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소중한 사람 - 장영희 교수

풍월 사선암 2013. 7. 20. 00:36

[시인칼럼] 소중한 사람 - 장영희 교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내가 만난 사람들, 옷섶을 스치는 저 웃고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다. 아내와 딸은 더욱 소중하다. 그러나 진정 소중한 사람은 가족보다 더 멀리 있으면서도 내게 삶의 새로움을 일깨워주는 분들일 게다. 그 분들은 살아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일 수도 있다.

 

() 장영희(張英姬) 교수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을 사다리 같은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영문학자인 아버지 고 장왕록(張旺祿) 교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명민한 두뇌를 가졌지만 신체적 결함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이만큼 불편하고 힘겹게 살야야 했다. 중학교 진학 때는 신체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응시를 허락하는 학교가 없었다고 한다. 신체검사에서 떨어질텐데 굳이 시험을 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가 이 학교 저 학교를 찾아 다니며 제발 입학시험만이라도 치르게 해 달라고 애걸한 끝에 서울사대부중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이와같은 사정은 고등학교에 갈 때에도, 대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 지체부자유도 모자라 암 투병까지.... 유방암이 치료되는가 싶더니 척추와 간으로 전이되어 끝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장 교수는 일간지에 연재한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를 통해 위대한 문학 작품들과 독자가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독자들에게 다정하게 "우리 같이 놀래?"하고 손을 건네었다. 그녀는 또 "문학의 고전들이 소중한만큼 독자들에게도 그 소중함을 전하고 싶다"면서 "작품들이 내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내 삶이 어떻게 더 풍요로와졌는지 솔직하게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잇달아 연재한 '영미시 산책'을 나는 주의 깊게 읽었는데, 실은 내가 잘 모르는 시인들도 다수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그 글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 더 아쉬웠다. 그때 나는 신문기자로 일했지만 거대 뉴스들에 밀려, 특히 타신문의 문화면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 나도 시인이었던가? 나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단순한 생활인에 지나지 않았지 않나 싶다. 한편 생각나는 시가 있다.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 1830~1894)'무엇이 무거울까?'라는 작품이다.

 

무엇이 무거울까?

바다 모래와 슬픔이.

무엇이 짧을까?

오늘과 내일이.

무엇이 약할까?

봄꽃들과 청춘이.

무엇이 깊을까?

바다와 진리가.

 

영시(英詩)의 특징인 명료함이 잘 드러난 시이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다. 머릿속에서 가물거리는, 장 교수가 소개했던 시들이 나를 부르는 듯싶다.

 

그녀의 수필은 잔잔하다. 그것들은 폭포수처럼 화려하지 않고 바다처럼 웅장하지도 않다. 그러나 어느 한 줄도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글들이다. 마치 작은 조약돌도 잘 어루만지며 흐르는 냇물같은 글들이다. 나는 장 교수의 새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뿐만 아니라 '문학의 숲을 거닐다' 그리고 영시 번역서 '생일' '축복' 등을 읽고 또 읽었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올해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지난번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善終)했을 때도 많이 울었다. 아직 그 울음을 채 잊기도 전에 또 울고 말았다. 하늘은 왜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내치시는가.

 

장 교수의 수필 가운데 이런 글이 보인다.

 

"이제 곧 2, 1년간의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 보스턴에서의 1-.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라는 데서 세계 최고 석학들의 강의를 듣는 지적 귀족생활을 누렸고, 장애가 무슨 특권이나 되는 듯한 이곳에서 목발의 위력으로 참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교통체증없이 뻥 뚤린 길에서 시원스레 운전하며 아름다운 경치, 풍부한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그토록 고대하며 꿈꾸었던 이상적인 삶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누려도 왠지 붕뜬 느낌, 밥을 많이 먹어도 어쩐지 허전하고, 구두 위로 발등을 긁는 것처럼 무언가 부족한 느낌, 아니 좀더 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곳은 내 뼈를 묻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장영희, 내 뼈를 묻을 곳)

 

1년이면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그녀에겐 더 풍족한 시간이 주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리 웬수같아도 내 나라, 내 핏줄 그리고 내 뼈를 묻을 곳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무척 기쁘다고 썼다.

 

장 교수는 또 영국 시인 a. e. 하우스먼(alfred edward houseman, 1859~1936)이 시를 쓰는 작업을 상처받은 진주조개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분비 작용을 해서 진주를 만드는 일"에 비유한 것으로 적고 있다. 시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극심한 내적 고통을 겪고 난 후 영혼의 깊은 상처를 승화하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내놓게 되는 예가 많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녀가 발표한 수필들도 그와같은 고통의 결과물일 것이다.

 

별을 따려고 사다리를 타고 하늘을 오르던 그녀는 마침내 진주가 되어 빛나고 있다. 그 진주의 이름은 장영희라는 별이다.

 

(시인칼럼=한택수 시인) 

 

 

장영희(張英姬) [1952.9.14~2009.5.9]

 

1952914일 서울에서 영문학자 장왕록(張旺祿)의 딸로 태어났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으나 역경을 딛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 동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듬해 미국으로 유학하여 1985년 뉴욕주립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5년부터 모교인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한국의 영문학자이자 수필가·번역가로서 소아마비 장애와 세 차례의 암투병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실천하였다.

 

성공은 희망이다 / 영문학 교수겸 수필가 장영희

 

장영희 영문학 교수의 이름 앞에는 번역가, 작가, 칼럼리스트 등과 같은 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1987 년 코리아타임즈의 영문 칼럼을 시작으로 여러 신문과 잡지를 통해 발표된 그녀의 글은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정감 있는 시선이 돋보인다는 평을 들어 왔습니다.

 

문장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은 듯 그녀의 글은 제 나름의 생명을 갖고 꿈틀대며 우리의 의식과 가슴 속을 파고듭니다. 장영희 교수는 언어의 연금술사입니다. 장영희 교수의 뛰어난 능력 뒤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한국 영문학계의 역사라 평가받는 장왕록 박사가 부친입니다.

 

장 박사의 셋째이며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삶 자체가 문학일 정도로 아버지에게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영문학은 숙명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첫 돌이 되기 전 발병한 소아마비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던 장영희 교수였지만 그녀의 몸을 지배하던 장애는 몸과 활동을 제한할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만큼은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장애를 통해 더욱더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그 누구보다 긍정적인 태도로 그리고 진지하게 삶을 살아낸 그녀는 문학보다 더 깊은 감동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978 년 장영희는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합니다. 유학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 여자로서 또 장애인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서강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지만 그 곳에는 박사과정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아 타 대학에 응시했지만 장애인이란 이유로 모조리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낙담한 채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들린 극장에서 우연히 <킹콩>이란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습니다. 이 사회에서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합니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 운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아무런 할 일이 없이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삶 그것은 사형 선고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 번> 중에서

 

장영희는 유학 생활 7 년을 마치고 서강대 영문과 출신 영문학박사 1호란 타이틀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교수로 임용되기까지는 10 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여자로서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그녀에 대한 사회의 검증은 그 누구보다 더 엄격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학생들에게 "내 힘들다"를 거꾸로 말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들 힘 내!"가 됩니다. 그게 바로 그녀였습니다. 늘 글을 통해 사람들을 응원해 온 사람,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 그가 바로 장영희 교수였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린 "다들 힘 내?" 라는 그녀의 희망 메시지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는지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도 우리를 향해 밝게 웃으며 오늘도 응원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립니다."

 

장영희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인생은 어차피 장애를 극복하는 것인데...

 

몇 년 전 없는 재주로 무리해서 수필집을 낸 적이 있다. 가끔 씩 방송이나 신문에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1급 장애 여교수의 승리, 그녀의 치열한 삶' 등등으로 요약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책을 소개하는 TV교양 프로그램에서 문인 220명에 의해 설날에 가족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으로 내 책이 뽑혔다고 했다. 시간에 맞춰 TV를 보니 마침 사회자가 내 책을 들고 소개 하고 있었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내 생에 단 한번>은 자서전적 에세이집입니다. 요새 암 투병 중이라 투병 중 느낀 바를 적은 책입니다." 옆에 있던 여자 사회자가 때 맞춰 "쯧쯧"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책은 이미 4년 전, 내가 암에 걸린 줄은 꿈에도 모르고 몰랐던 때에 쓴 책이다.

 

그러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코미디언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저자 장영희 씨는 1급 신체 장애인이라네요." 순간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숙이며 죽은 사람에게 묵념 하듯이 눈을 내리깔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책에 대한 소개는 그게 다였다.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경기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고, 장애물 하나를 뛰어 넘고 이젠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 장애가, 인간관계의 장애이든, 돈이 없는 장애이든, 돈이 너무 많은 장애이든 (정부 요직에 오르기 위해 많은 돈을 이리저리 감추거나 먹은 돈을 안 먹었다고 오리발 내밀어야 하는 것도 분명 장애라) 아무리 권력 있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왜 유독 신체장애에만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장영희 / 문학의 숲을 거닐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