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둘째 아들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띄우는 고백
“시대 앞서간 어머니와 상처 속에 살다 간 아버지… 이제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타고난 영민함과 단아한 외모.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뛰어난 문필가.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혜석은 단연 인기였다. 그러던 그는 이혼과 스캔들로 가족에게조차 외면받다가 쓸쓸히 객사했다. 뒤늦게 생모가 누군지 알고도 그 사실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둘째 아들 김진 교수가 말하는 ‘내 어머니 나혜석’.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유식계급여자, 즉 신여성도 불쌍하외다. 아직도 봉건시대 가족제도 밑에서 자라나고 시집가고 살림하는 그들의 내용의 복잡이란 말할 수 없이 난국이외다. 마음과 뜻은 하늘에 있고 몸과 일은 땅에 있는 것 아닌가.’ (삼천리 ‘이혼 고백서’, 1934년)
이 글의 지은이는 나혜석(1896~1946). 본인의 이혼 과정과 스캔들에 대한 고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정조를 고수하는 것보다 재혼할 때까지 중심을 잃지 말자’라며 성욕에 대한 가치관도 적었다. 남녀평등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1930년대. 사회의 반응은 비판 일색이었다. 그에게 세상이 돌을 던지는 와중, 이에 맞서지도 동조하지도 못한 채 숨 죽여 살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의 전남편 김우영과 자녀들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뒤 모든 흥미를 잃었습니다. 항상 풀이 죽어 있고 말투가 어눌했죠. 변호사 일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셨고요. 일본 유학시절 조선인으로 드물게 이름을 날리던 웅변가 양반이 그렇게 변한 거예요. 아마 ‘아내 간수도 못 하는 사람이 남을 어떻게 돕겠느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조롱에 상처가 크셨을 겁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사이에 3남1녀를 뒀다. 큰아들 선은 12세 때 병으로 사망했고, 세 아이는 이혼 후 남편 손에서 자랐다. 그의 둘째 아들 김진 전 서울대 법대 교수(83)가 최근 ‘그땐 그 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아버지의 생전 면모를 중심으로, 어머니에 대한 일화와 가족들의 상처를 엮어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간 나혜석의 아들임을 숨기고 살아온 김 교수는 책을 낸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나혜석과 3남1녀
“이제 죽을 때가 다 돼서 마음의 응어리를 다 쏟아낸 거죠(웃음). 저는 평생 생모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 헤어져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다가 어머니 때문에 불행해진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웠거든요. 한번은 이런 상처를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 실행에 옮긴 거죠. 책을 내고 나니 홀가분하고 차분한 기분입니다. 이제 드러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 더없이 기뻐요.”
책은 4년 전부터 조금씩 조심스럽게 쓰였다. 부모라도 한 인물의 독특한 성질과 괴로움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는 법. 그가 기억을 맞춰 써내려간 글을 오랜 지인인 기자 출신 공저자가 다듬으면서 신중하게 글의 얼개를 갖춰갔다. 호명도 ‘어머니, 아버지’ 대신 ‘나혜석, 김우영’으로 건조하게 붙였다. 행여 피에 대한 애정으로 객관성을 해칠까 걱정돼서다.
책을 낸 데는 다른 동기도 있다. 그간 나혜석에 대한 고찰과 연구는 활발했지만 남편 김우영에 대한 조명은 부족했다. 김 교수는 “어머니에게 입은 상처로 일생을 휘청거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묻혀 없어질 뻔한 이야기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이 아이 친엄마가 유명한 화가”
김 교수는 숙모를 포함해 세 사람의 새어머니 품을 거쳤다. 그가 생후 3개월일 때 부모는 해외여행을 떠났다. 넓은 세상을 보며 식견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서너 달 예정이던 여행은 그러나 유럽과 미국을 거치며 1년 9개월로 길어졌다. 돌아온 아들 내외에게 할머니는 “자식새끼들 팽개친 귀신들”이라며 눈물로 꾸짖었다.
그러나 생모 품에 안기는 것도 잠시, 부부는 곧 이혼을 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최린과 아내의 외도를 문제 삼아 김우영이 헤어지기를 요구한 것이다. 다른 형제는 할머니댁에, 그는 다시 숙부댁에 맡겨졌다.
“숙부댁에는 7남매가 있었는데, 저는 친자식처럼 컸어요. 갓 태어난 숙부댁 아이가 죽었을 때 마침 제가 태어나 그 집으로 보내졌죠. 한데 여덟 살이던 어느 날 숙부께서 광주 큰아버지댁에 가자고 하시더군요. 갔더니 낯선 여인이 ‘네 어미란다’라며 손을 잡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친아버지와 새엄마가 사는 집이더군요. 그 집에 있던 아이들은 제 친누나, 친동생이었고요.”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 후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전처의 ‘이혼 고백서’와 최린에 대한 ‘정조유린죄 소송’ 등의 스캔들로 변변치 않던 수임마저 완전히 끊겨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관직으로 돌아간 그는 전라남도 이사관으로 재직하게 됐고, 그러던 중 둘째 아들을 불러들인 터였다. 점점 말수가 줄어든 김우영은 당시 아예 입을 다문 사람이 돼 있었다. 새어머니와 7년을 살다가 이혼한 그는 이후 기독교독립운동가 양한나와 다시 결혼한다.
숙부 숙모를 친부모로 알던 어린 시절, 그는 간간이 이상한 쑥덕임에 휩싸였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유명한 화가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느냐”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친어머니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여섯 살 위 누나는 생모에 대한 기억이 있는 눈치였지만, 얘기를 꺼내도 “넌 몰라도 된다”라며 눈만 흘겼다.
“당시 학교생활이 힘들거나 계모가 괴롭히는 등 역경이 있으면 생모에 대한 그리움에 허덕였을 거예요. 그런데 제 생활은 굉장히 단조로웠어요. 궁금증이 일다가도 학교생활에 치여 그냥 지나가곤 했죠. 새어머니가 ‘우리가 가난한 건 다 나혜석이 년 때문’이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마땅히 물어볼 곳도 없었고요.”
◀노년의 김우영
단 한 번의 만남, 꿈이었을까?
나혜석은 이혼 후 줄곧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집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했고 큰딸 나열을 만나러 개성까지 갔다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김 교수는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생모와 조우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이던 열네 살, 2교시를 마친 쉬는 시간, 학교 복도 끝에서였다.
“누군가 밖에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한 여인이 서 있었어요. 손짓을 해서 다가가니 ‘진이야, 내가 누군지 알겠니. 가까이 보니까 아버지를 빼닮았구나’ 그러세요. 누구냐고 물으니 ‘내가 네 어미다’라고 하시더군요. 울면서 계속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혼이 달아나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았어요. 수업종이 울려서 꿈꾼 듯 멍하게 교실로 돌아갔죠.”
창백한 안색, 흘러내린 머리, 남루한 옷차림. 그 후로 김 교수는 생모를 만나지 못했다. 뒤에 이를 안 아버지는 잔뜩 역정을 내며 “다음에 찾아오거든 만나지 말거라”며 신신당부했다. 어렴풋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 두 분이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화내는 아버지의 심중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중간에서 막아서인지 어머니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이후 다시는 생모를 보지 못했다.
보성전문(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한 김 교수는 6·25 전쟁으로 사법고시를 보지 못하고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다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58년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법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미국 유학시절, 그리고 서울대 교수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나혜석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비로소 어머니에 대한 기초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회고록에도 나혜석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곰곰이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그렇게 되고도 애착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끝까지 그 일에 대해 함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짐작했다.
“생모는 재능이 넘치는 분이셨지만 아들로서 조금만 절제를 해주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이혼 후 계속 파리에서의 스캔들을 거론하면서 아버지 이름이 수없이 거론됐어요.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심적 고통이 컸죠. 넘쳐나는 에너지의 절제를 비겁함과 동일시했던 것 같습니다.”
워낙 말수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아들과 법학을 이야기할 때는 활기를 띠었다. 생전 아버지는 자신의 길을 따라 걷는 둘째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그리도 보고 싶어 했건만, 귀국 1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니 아버지에 대한 교감이 커지더군요. 사랑하는 여성의 배신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회생활을 접게 돼 얼마나 아프셨을지. 좀 더 따뜻하게 모셨어야 하는데,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드려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김 교수는 67년 미국으로 건너가 40년 넘게 그곳에서 살고 있다. 일리노이주립대와 캘리포니아 웨스턴 법대 등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해 아무도 모르게 이번 책을 준비해왔다. 그는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머니’라는 말 대신 ‘생모’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썼지만 그게 아버지의 진심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한편에는 생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사에 대한 확신이 묻어 있었다. 모든 사람 간에는 이심전심이 통하는 법. 발톱만큼 작은 조각의 기억에 근거했더라도, 부모자식 사이의 직관이야 사실에 가깝지 않겠는가.
책의 제목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의 글귀에서 따왔다. 그는 “학문을 하다가 가끔 기발한 생각이 날 때는 어머니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만나고 싶어 몸부림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라며 가깝고도 먼 어머니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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