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

풍월 사선암 2013. 7. 12. 18:17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 

 

소설가 박경리씨는 운명하기 몇 달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다음은 노년의 박완서씨가 썼던 글입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데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두 분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던 분들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요. 가장 아름다운 인생(上善)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이라는 뜻입니다.

 

물처럼 살다가 물처럼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처럼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듯싶습니다.

 

위의 두 분은 물처럼 살다 간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남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삶을 보여주었고,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을 남에게 과시하려 하거나 결코 다투려 하지 않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초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장강(長江)의 글을 쓰면서 그 글 속에서 인생과 사랑을 말했습니다. 말년의 두 분은 노년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나이 먹어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박경리씨는 원주의 산골에서 박완서씨는 구리의 어느 시골 동네에서 흙을 파고 나무를 가꾸면서 빛나는 노년의 침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노년의 행복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말했습니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달려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한 세상뿐입니다. 더러는 조금 짧게 살다가, 더러는 조금 길게 살다가 우리는 가야 할 곳으로 떠나갑니다.

 

두 분의 삶을 바라보면 이 소중한 시간을 이해하면서 살라고, 배려하면서 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둘도 없는 삶을 지난날을 돌이키며 후회하기 보다는 남은 날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희망과 행복을 찾아보자고 다독여 주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삶에서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에게조차 고마움을 느끼는 일상, 조그만 일에 끊임없이 감사함을 느끼는 노년, 그렇게 넉넉한 마음의 행복을 배우게 됩니다.

 

 

'토지' 작가 박경리 - 생애와 작품세계

 

'해방된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로 마침표를 찍은 소설. 1969년 시작해 정확히 1994815일 광복절에 완결한 소설. 대하소설 '토지'.

 

"토지를 끝낸 1994815. 그냥 멍청히 앉아 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2002년판 '토지' 서문

 

그는 19261028(음력) 초저녁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병인년 호랑이띠다. "초저녁은 호랑이가 한창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여서 기가 센 사주"라 스스로 말한 것처럼 소설보다 더 굴곡진 삶을 살았다.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한 아버지에게 학비 문제로 대들었다가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고 한다. 훗날 그는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1946년 김행도씨와 만나 가정을 꾸렸지만 6·25전쟁 난리통에 사별의 아픔을 겪는다. 전쟁 직후에는 아들마저 가슴에 묻어야 하는 슬픔도 겪었다. 그 뒤 외동딸을 혼자 키웠다.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역설적으로 그를 작품 세계로 내몰았다.

 

초기 작품에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이나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딸이 자주 등장했지만 이후 19604·19 경험 이후 개인의 고통을 넘어 민족과 인류의 보편성까지 주제를 뻗쳤다. 1960년대 초반 발표한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굵직한 장편들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이 무렵이다.

 

그를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전 5부로 완성된 '토지'. 구한말부터 해방까지 수난의 시대사를 원고지 31200여장에 촘촘히 써내려갔다. 1969년 현대문학에 처음 연재된 뒤 1972년 문학사상, 1977년 독서생활과 한국문학, 1983년 정경문화, 1987년 월간 경향, 1992년 문화일보로 지면을 옮겨가는 우여곡절 끝에 521권의 기념비적인 대작 '토지'가 완간됐다

 

토지를 집필하는 기간 동안에도 시련은 유령처럼 그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유방암을 선고받고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글을 써야 했다. 병마를 이겨낸 뒤에는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필화사건으로 투옥됐다. 김 시인은 유신체제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1980년 무렵 옥바라지를 위해 원주에 있던 외동딸 김영주를 따라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 자리에 정착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중에서).

그 시를 남기고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전쟁·여성 아픔 어루만진 '母性 작가'裸木으로 돌아가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필요한 사람이고 싶고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내 생애의 밑줄' 부분)

 

한국 문학의 어머니이자 큰 별인 소설가 박완서씨는 2011년 1월 22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80

 

고인은 1931년 개성의 외곽 지역인 개풍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그 해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퇴했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 오빠가 여덟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가족이 차례로 '빨갱이''반동'으로 몰리며 수난을 겪었던 전쟁의 상처는 그를 뒤늦게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동기가 됐다.

 

그는 생전에 "살아남기 위해 견딘 수모와 만행을 언젠가 증언하고 글로 남겨야겠다는 일념이 있었다"거나 "사람들은 또 전쟁 얘기를 우려먹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지만 아직도 그 기억은 생생하다"고 말했다.

 

불혹을 맞은 1970'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 당선으로 등단한 그의 작품 세계는 자신의 인생과 한국사의 변천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6 · 25전쟁과 분단 등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그는 개인과 사회,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등의 역작을 남겼다.

 

급격한 산업화 시기였던 1970~1980년대에는 중산층의 일그러진 도덕성과 위선을 파헤쳤으며 서 있는 여자등 여성 억압에 맞서는 작품으로 우리 사회를 되비췄다.

 

1988년 남편과 사별하고 같은 해 서울대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외아들(호원태)마저 교통사고로 잃은 뒤에는 가톨릭에 귀의해(세례명 정혜엘리사벳) 저문날의 삽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치유의 글쓰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