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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은 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나

풍월 사선암 2013. 7. 8. 23:37

남재준은 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나

 

지난 31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 후보자.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파문의 한복판에는 남재준(69) 국가정보원장이 서 있다. 남 원장은 지난 624일 회의록 전문 공개를 강행함으로써 지난해 1219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 보수·진보 진영 간 치열한 쟁점이 돼 왔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공방의 본질을 바꿔놓았다. 야당 일각에서 이번에 공개된 회의록 전문이 대통령기록관에 보관 중인 원본과 다르다는 지적이 일고 있지만, 이제 사안의 핵심은 회의록에 담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볼 것이냐로 좁혀져 버렸다. NLL 관련 발언과 녹취록의 유무를 둘러싼 공방은 전문의 베일이 벗겨짐으로써 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NLL을 부정한 사실상의 포기 발언’ ‘서해평화협력지대 등 평화구상에 인식을 같이한 것이라는 해석상의 공방만 남게 됐다. 또다시 여야, 보수·진보 간 뜨거운 대치 국면을 몰고온 이 싸움의 결론은 이제 국민 판단의 몫으로 남았다.

 

남재준 원장은 지난 620일 새누리당 소속인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과 정보위원들에게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 열람을 허용한 데 따른 정치적 파문이 이는 와중에 전문을 공개하는 강수(强手)를 뒀다. 남 원장은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던 정상회담 회의록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 대통령 기록물이 아니라 비밀로 분류돼 있던 일반 공공 기록물이라는 독자적 판단하에 비밀 해제 절차를 거쳐 공개를 강행했다.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던 이 회의록은 200931급 비밀에서 2급 비밀로 바뀌었다. 마치 군사작전을 하듯 전격적으로 이뤄진 회의록 공개 결정이 몰고온 정치적 부담은 상당하다. 남 원장은 서상기 위원장에게 발췌본 열람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민주당에 의해 고발당한 상태이며, 회의록 전문 공개 결정에 대해 야당으로부터 국익을 팔아먹은 쿠데타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급기야 민주당은 626이 같은 위험한 인물을 국정원장에 임명한 박근혜 대통령은 인사권자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남 원장의 해임과 사과를 요구했다. 국정원장이 정쟁의 한복판에 서 버린 것이다. 국가 기밀을 지켜야 할 최고의 정보기관장이 왜 이런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걸까.

 

서울 출생으로 배재고를 졸업한 남재준 원장은 20054월 육군참모총장직을 물러나며 계룡대 대강당에서 가진 전역 고별 강연에서 전사조직의 명예를 강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후배들에게 여러분은 전사(戰士). 본인의 가치관과 소속 조직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군인은 죽어야 할 때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내 조국, 내가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라고 말했다. 남 원장은 지난 625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다시 이 조직의 명예를 들고나왔다. 남 원장은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결정한 배경과 관련해 야당이 자꾸 공격하고 왜곡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그랬다는 말을 했다. 남 원장은 국정원의 명예가 국가 이익이나 기밀보다 중요한가라고 묻는 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 원장이 이같은 발언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 617일 민주당 소속인 박영선 국회법제사법위원장의 폭로였다는 것이 국정원 관계자들의 말이다. 박영선 위원장은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의 이른바 댓글 선거 개입 사건을 둘러싼 여야 공방이 치열한 와중에 국정원 내부 고발자로부터 들었다“NLL 포기 논란은 국가정보원과 새누리당이 짠 시나리오라며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댓글 개입 말고도 국가정보원이 더 조직적으로 지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 제기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정원 관계자는 남 원장이 당시 박 의원의 폭로에 대해 상당히 착잡해 했다국정원이 더 이상 정치 공방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그때 굳힌 것 같고 이게 결국 회의록 전문 공개까지 이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민은 실체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NLL 포기 발언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하는 정쟁에 국정원이 휘말려서는 본연의 임무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남 원장은 625일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에 출석, “회의록을 언제 처음 읽었느냐는 질문에 “6202~3시간 동안 검토했고 두 번 정도 본 것 같다고 답했다. 서상기 위원장에게 열람을 허용한 같은 날, 자신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봤고 이후 국민에게 공개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국정원 입장에서는 엄청난 정치적 사안이 돼 버린 NLL 포기 발언 공방에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끌려들어간 측면이 있다. 당초 이번 사태의 시발점이 됐던 건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열람한 정상회담 발췌본이었다. 이 발췌본은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9년 임태희 비서실장이 싱가포르에서 남북 비밀접촉을 하면서 국정원에 요구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남북 비밀접촉을 하면서 지난 정상회담 때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알기 위해 청와대가 국정원에 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를 요구했고 이렇게 작성된 문건을 임태희 실장과 천영우 외교안보 수석 등 몇 사람이 봤다고 말했다.

 

남재준 원장은 지난 322일 국정원장에 취임하면서 역대 원장 중 가장 짧은 취임사를 해 주목을 받았다. 남 원장은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 여러분도 전사로서의 각오를 다져달라. 여러분의 사기와 복리 증진을 위해 후방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짤막한 말로 취임사를 마쳤다. 역대 원장들처럼 강당에 모아놓고 하는 훈시도 없었고 취임사 원고만 내부에 돌았다. 국정원 직원들은 당시 남 원장이 군인 시절부터 강조해온 전사를 다시 들고나온 데서 국정원을 본연의 기능으로 돌려놓고 싶어하는 남 원장의 개혁 의지를 읽었다고 말한다. 이런 남 원장으로서는 국정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를 빨리 털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변에서는 지난 5월 서울중앙지검이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 압수 수색을 요청했을 때 이를 담담히 받아들인 것도 같은 맥락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한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당시 압수수색 후 간부회의에서 남 원장이 전투에서 지고 있으면 국민에게 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거짓말로 이기고 있다고 하면 그 순간은 모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고 했다이런 발언도 지난 정부 때의 문제를 투명하게 다 털고 국정원을 일신하겠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했다.

물론 야당과 진보 진영에서는 이번 회의록 전문 공개 결정을 이런 순수한 차원으로만 보지 않는다. 남 원장이 이른바 총대를 멘 배경에 대해 야당과 진보 진영에서 나오는 해석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국정원 조직 보호를 위한 물타기. 댓글 대선 개입이 검찰 수사를 부르고 여야 국정조사까지 논의될 만큼 사안이 커지자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라는 맞불을 놓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청와대 배후설이다. 남 원장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역시 정략적 차원에서 회의록 공개를 강행했다는 의혹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청와대 측은 우리와 무관하다며 확실한 선긋기를 하고 있고, 국정원 측에서도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관계자는 남 원장이 공개 결정을 한 후 청와대 측에 보고는 할 수 있겠지만 청와대의 지휘를 받아 공개했다는 의혹은 남 원장의 성격상 맞지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해석은 보수의 전사라는 명예욕 때문에 남 원장이 오버를 했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부터 박근혜 캠프에서 일해왔고, 국정원장 취임 후 보수언론으로부터 2의 메이어 다간(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야성을 되살린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주목을 받은 그가 과욕을 부린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이런 가시 박힌 해석의 어느 측면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남 원장 주변에서는 이번 회의록 공개 결정을 개인적인 고뇌에 찬 결정으로 봐달라는 주문이 많다. 평생 강직한 군인의 길을 걸어온 그가 적어도 회의록에 담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본 순간, 이를 가슴에 묻어두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실 남 원장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초창기인 20034월 군인으로서 마지막 보직인 육군 참모총장에 올라 2년 임기를 채웠지만 노무현 대통령과는 악연이었다. 철학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쳐진 갈등이 적지 않았다. 특히 노 대통령 주변에 포진해 있던 청와대 386들과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왼쪽)를 비롯한 국회의원 및 전국지역위원장들이 지난 623일 서울 영등포당사에서 국정원 국기문란 국정조사 촉구 긴급 연석회의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재준 참모총장의 사표(전역 지원서 제출) 사태까지 빚은 군 진급 심사 비리 사건이다. 20041124일 국방부 앞에 그해 10월 있었던 대령·준장 진급 심사를 비난하는 괴문서가 뿌려지면서 불거진 진급 심사 비리 사건은, 남재준 총장이 자기 인맥 위주로 진급을 시켰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었다. 당시 군 검찰이 육본 인사참모부를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가 본격화되자 남 총장은 전역 지원서를 내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군 검찰은 남 총장과 윤일영 육본 인사참모부장 등 핵심 인사들의 혐의를 밝혀내지 못해 기소조차 하지 못했고, 청와대는 수사에서 남 총장과 관련된 비리가 나오지 않자 전역서를 반려했다.

 

이 사건의 배경과 관련해서는 이미 전부터 불거진 남 총장과 청와대 간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군 사법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그중 하나다. 당시 노무현 청와대는 군사법원 판결 대상자에게 감형을 허용하는 지휘관의 관할권을 없애고 군 검찰을 국방부 직속기관으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한 군 사법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남 총장은 이에 대해 군 내부 여론과 마찬가지로 반대했었다. 당시 군인들은 관할권을 없애고 군에 별도의 검찰청을 둘 경우 상명하복이 무너지고 유사시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때 남 총장은 군 사법개혁안을 설명하러 계룡대를 찾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들을 상대로 조목조목 반대 논리를 피력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이른바 정중부의 난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493일자 내일신문에 난 기사가 발단이었다. 당시 기사는 남 총장이 육본 간부회의에서 나는 어차피 문제가 되면 사표 쓰고 아무 때나 나갈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무슨 문민화냐. 옛날 정중부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느냐며 청와대의 군 사법개혁에 불만을 토로했다고 썼다. 이에 대해 윤일영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장은 20076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 보도 이후 국군기무사령부가 당시 회의 참석자들의 메모 등을 조사했지만 어디에도 정중부 운운발언은 없었다고 밝혔다. 누군가 남 총장을 음해했다는 것이다.

 

진급 심사 비리 사건도 속을 알고 보면 청와대 측의 인사청탁을 남 총장이 거절한 데서 불거졌다는 것이 윤일영 전 참모부장의 증언이다. 당시 청와대는 육군과 기무사가 추천한 진급자 세 명을 하자지역 안배등을 이유로 전부 바꾸라는 주문을 했지만 남 총장은 이에 반대했다고 한다.

 

남 총장은 총장 재직 시 계룡대 대통령 별장을 군 예산으로 짓는 데 대해서도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당시 군은 육군총장 공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 1987년 계룡대가 들어설 때 당초 대통령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었다는 이유로 막사 건립 군 예산을 전용해 20051월부터 6월까지 계룡대에 대통령 별장을 지어줬다.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국민에게 돌려준 후 계룡대 골프장을 즐겨 찾던 노무현 대통령이 따로 묵을 곳이 없어 불편해하자 내려진 조치였다. 당시 남 총장은 별장 신축 결정 전에 총장 공관을 다시 대통령 별장으로 내달라는 청와대 측의 요청도 거절했다.

 

남재준 원장은 전역 후 노무현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맞서기도 했다. 2006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지 말라고 발언하자 원로 군 장성들과 함께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격렬한 어조와 제스처를 쓰며 전시작전권 환수 등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다가 그 같은 발언을 했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군인 시절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통했다. 아무도 없는 밤에도 직각 보행을 했고 부하들과 회식하면 마무리로 애국가를 부른 일화는 유명하다. 임지마다 이순신 장군 영정을 걸어뒀고 지금도 국정원장 관저에 이순신 장군 영정이 걸려 있다. ()하나회 출신으로 하나회 출신 동기(육사 25)들에 밀려 진급이 늦었던 그는 군인 시절 전방에서 근무하며 휴전선 일대를 안 가본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여느 장군들과 달리 골프도 안 치는 그는 20041월 육군대학을 방문해 대대장반 초급장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취미가 없는 것이 내 취미라고 말하기도 했다. “음악, 미술, 체육은 잘하는 편이 못 되고 운동이라고는 지금까지 병사들과 행군하고 밤낮으로 순찰한 것이 전부이며, 남는 시간에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가 당시 장교들에게 가장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권한 것도 최세인 전 1군사령관이 쓴 지휘통솔이라는 군사 책자였다. 그는 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30여년 동안 틈틈이 읽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사단 참모장 시절, 돌아가신 부친의 장지를 잡아달라는 사단장의 부탁을 받고 기관총 진지 선정지침을 고려해 명당을 구해줬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군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군밖에 모르는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자신에게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통상 융통성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정의하는 융통성은 방책 선정의 다양성, 폭인데 지금 우리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융통성은 처세 요령을 의미하고 있다. 군인들에게 그런 융통성은 필요 없다.”

 

그의 이 꽉 막힌 성격은 국정원장에 취임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주변의 말이다. 요즘도 골프를 치지 않고, 근무시간이 끝나면 서울 내곡동 관저에서 산책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가끔 북한 전문가들과 공부 모임을 갖는 모범적 일상을 보내고 있다. 국정원장 취임 직후 관저에서 가진 회식에 한 간부가 양주를 갖고 갔다가 다시 들고나온 일도 있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개인적으로 받는 건 곤란하다는 게 남 원장의 방침이었다고 한다.

 

역대 국정원장은 거의 예외없이 재직 중 일로 불행을 겪었다. ‘정치에 거리를 두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정치는 숙명처럼 국정원장을 덮쳤다. 남 원장은 정치와 거리를 두기 위해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서는 결정을 내렸다. 과연 그가 앞으로 진행될 국정조사 등의 관문을 뚫고 국정원을 자신의 뜻대로 제 위치에 돌려놓을지 주목된다.

정장열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