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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 앞둔 CJ 이재현 회장의 明과 暗

풍월 사선암 2013. 6. 30. 16:16

소환 앞둔 CJ 이재현 회장의

 

지난 63일 임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비자금 수사 관련 입장을 밝힌 이재현 CJ 회장.

 

CJ 이재현 회장에 대한 검찰의 소환 조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 회장은 비자금 조성에 따른 배임 혐의를 받고 있다. CJ 비자금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연일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이재현(53) 회장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CJ는 올해 삼성그룹에서 독립한 지 20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가지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크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은 20년 전인 19937월 독립경영 선언을 하면서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 회장은 경영 수완이 뛰어나다. 실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삼성그룹의 한 계열사에 불과했던 제일제당을 재계 14위의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CJ그룹 출범 초기인 199517000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지난해 268000억원을 기록하며 17년 만에 15배 넘게 성장했다. 종업원 수는 6800명에서 국내외 4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중소기업도 아니고 매출 1조원이 넘는 대기업이 17년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 예는 드물다. 때문에 그는 얼핏 삼성가 3세로 보이지만 사실은 CJ그룹의 창업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식품회사로 시작한 CJ그룹의 변신은 놀랍다. 식품·식품서비스 하나밖에 없던 사업부문에 바이오·생명공학 엔터테인먼트·미디어 물류·신유통 등을 추가, 4대 사업군 체제를 완성하며 글로벌 문화창조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4대 사업 포트폴리오 구성은 기존 대기업의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이 아닌 창조적 사업 다각화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문화와 콘텐츠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시너지를 창출한다.

 

이 회장은 가부장적 카리스마로 삼성그룹을 이끌었던 할아버지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는 달리, 합리주의로 CJ를 이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 회장은 내 역할은 뛰어난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거라고 본다.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 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픈 마인드도 되고 창의와 도전정신도 살아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다. 이 회장의 스타일은 그룹 CEO(최고경영자) 회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회의에서 이 회장은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도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듣고 질문하고 토론한다.

 

이재현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는 뚝심이라고 얘기된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옳다고 여기는 사업을 밀고 나가는 뚝심과 추진력이 상당하다. 대표적인 것이 그룹의 E&M(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사업이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사업이고 오랫동안 적자가 나던 사업을 20년 가까이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인은 많지 않다. CJ그룹은 영화사업인 CJ CGV, 케이블 채널인 CJ헬로비전, 콘텐츠 기업인 CJ E&M을 갖고 있다.

 

◇이재현 회장의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

 

이 회장 삶의 궤적을 보면 암()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은 1960년 서울 장충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모친은 손영기 전 경기도 지사의 딸인 손복남 CJ 고문이다. 이재현 회장의 형제로는 누나인 이미경(55) CJ 부회장과 동생인 이재환(51) 재산커뮤니케이션 대표가 있다. 이 회장은 재벌가에서는 흔치 않게 누나·동생과 사이가 돈독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재현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의 장손이지만 마냥 행복하진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막내 동생인 이건희 삼성 회장과 소원해졌고, 사실상 가족과 별거하며 별도의 삶을 살았다. 삼성 비서실에서는 아버지를 둘러싼 소문을 할아버지에게 전해왔다.

 

이재현 회장은 장충동 할아버지 집에서, 남편과 사실상 떨어져 살게 된 어머니 손복남씨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여느 집과 같이 손자를 끔찍이 아껴줬다. 할아버지는 비록 아들과는 소원했으나 장손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키웠다. 장손인 이재현은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숨질 때는 물론이고, 할머니 박두을 여사가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장충동 본가에서 같이 살았다.

 

이재현 회장은 부친에 대한 마음 씀씀이 또한 각별하다고 얘기된다. 부친 이맹희씨가 쓴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도 내가 외국에 갔다 오거나, 혹은 대구에 있다가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아들 내외를 만날 때도 맏아들 내외는 그 장소가 어디든 큰절로 나를 맞는다.” 요즘 세상에 큰절로 부모를 맞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할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이재현 회장은 열세 살 때부터 부친과 같이 살지 못했다. 아버지 이맹희씨는 가슴이 에인 듯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일이 바쁠 때는 일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내가 여기저기 떠돌 때는 또 그대로 내 삶에 정신이 없어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애비였다.”

 

어릴 적 마음의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이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2005년에 세운 ‘CJ나눔재단은 전국의 3600개 공부방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이 회장이 많은 사회공헌활동 중 유독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사업을 하는 이유를 이 회장의 유년시절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회장은 개인 차원의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연탄 배달부터 노인 무료 급식소에서 김장하기, 장애인 집 도배해주기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혼자 또는 가족과 꾸준히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그런 활동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CJ가 그룹 규모에 비해 훨씬 사람을 많이 채용하고 비정규직을 우대하는 것도 불우했던 이 회장의 어린 시절과 연관이 있다. 그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만큼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한다. 그는 평소 기업은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꿈지기가 돼야 한다. 특히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기업이 외면해선 안 된다며 일자리 창출 및 고용의 질 개선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우리 사회에 경제민주화동반성장이 화제가 되기 이전인 2011년 말에 이미 이재현 회장은 “CJ가 기업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별도의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CJ그룹은 대기업 최초로 600여 계약직의 전원 정규직 전환을 선언했다. 이후 신세계, 한화, SK, 두산 등 대기업들이 잇달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계획을 발표하는 변화가 일기도 했다. 또한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인 택배기사들의 자녀 장학금 지급, CJ 사업장의 아르바이트생들을 위한 장학금 혜택 등 CJ 주변의 어려움을 돌보는 많은 방안이 발표됐다.

 

CJ그룹은 지난 수년 사이 대졸공채 규모도 파격적으로 늘렸다. 2010600명이던 대졸공채 규모는 20111200, 20121500명으로 늘어났다. 고졸, 경력직까지 포함할 경우 CJ가 연간 채용하는 인원은 6000~7000명 사이로, 이는 재계 5~6위 정도의 고용 규모다.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의 신규 채용 계획을 세워놓고 상반기 대졸공채 500명을 뽑았다.

 

올 들어서는 특히 여성 고용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2012년 현재 우리나라 여성고용률은 48.4%. 200147.7%였던 점을 감안하면 십수년째 제자리다. 이 같은 정체의 가장 큰 원인은 출산 및 육아에 의한 경력단절 이후 재취업이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 CJ그룹은 이에 착안해 경력이 2년 이상 끊긴 여성 인력을 대상으로 리턴십(직장복귀) 프로그램을 도입, 시간제(4시간)나 전일제(8시간)로 근무할 1기 인턴 150명을 모집 중이다. CJ그룹은 리턴십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일(직장)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다양한 여성형 직무 개발 및 창·취업 컨설팅 개방에 나서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경력단절 여성들이 다시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입장이다.

 

CJ그룹의 고용창출 능력은 30대 기업 가운데 가장 높은 고용계수로도 입증된 바 있다. 매출액 10억원 증가 대비 일자리 증가 수를 나타내는 고용계수(2002~2011년 기준)에서 CJ그룹은 3.6으로 30대 그룹 중 가장 높았다. 2위인 신세계는 2.9, 3위인 LG1.6으로 1위와 큰 차이를 보였다. 같은 조사에서 삼성 1.0, 두산 0.7, SK 0.4로 나타났다.

 

이재현 회장이 사재를 출연한 CJ나눔재단 출범식.

 

◇부인은 대학 시절 미팅으로 만난 평범한 집안 출신

 

이재현 회장은 재벌가 장손답지 않게 성격이 소탈하고 겸손하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경복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주변 친구들조차 그가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가 신분을 일절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3년 삼성이 아닌 씨티은행 입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할아버지가 삼성 회장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재벌가 장손답지 않게 삼성의 품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도했으나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따라 19859월 다시 당시 제일제당의 평사원으로 입사했고, 이후 7년 넘게 제일제당에서 근무하게 된다. 삼성에 입사해 신입사원 교육을 같이 받았던 모 인사는 당시 교육을 받으면서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 우리와 같이 교육받는다는 것을 누구도 몰랐다. 마지막 날 비로소 소개를 해줘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결혼 방식도 재벌가의 관행과는 거리가 멀다. 이 회장은 대학 시절 미팅을 통해 부산의 평범한 집안 출신인 김희재(53)씨와 만나 결혼, 슬하에 딸 경후(28)양과 아들 선호(23)군을 뒀다. 경후양은 지난 2008년 외국계 은행원과 회사 연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다.

 

CJ의 기업문화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삼성과 달리 젊고 실용적으로 바뀐 것은 이재현 회장의 영향이 크다. CJ는 그룹 출범 6~7년 무렵부터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1999년에는 복장자율화를, 2000년에는 호칭제를 시행했다. 두 가지 모두 국내 대기업으로는 최초의 시도였고 이후 다른 기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호칭제는 사내에서 부장, 과장, 대리 등의 직급 호칭을 버리고 이름에 자를 붙여 부르는 것이다. 그룹 회장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06년 이미경 CJ E&M 부회장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친동생 이재현 회장을 이재현님이라고 호칭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영수 CJ제일제당 인사팀 상무는 타 기업 관계자들은 상·하급자가 서로 으로 부르면 어떻게 조직 관리가 되겠느냐파격적이긴 하지만 오래 못 갈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호칭 제도가 지속되면서 조직이 발랄해지고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강해져 업무 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보이자 의심의 눈길은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CJ그룹의 변신과 성장의 중심에는 물론 이 회장이 있다. 그러나 이 회장에게 화려한 성공과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업적으로도 4대 포트폴리오 완성에 앞서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한때 초고속통신망사업, 증권산업에도 뛰어들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철수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현재 이 회장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강도 높은 검찰 조사로 각종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CJ그룹을 숨가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칼날이 이재현 회장을 직접 겨누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 회장은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을 헤쳐왔다. 20년 전엔 삼성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벌였고, 지난해에는 부친이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과 유산 소송을 벌이면서 CJ는 다시 삼성과 갈등을 겪었다. 이재현 회장은 다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앞에 서 있다.

 

그의 명운(命運)과는 별개로, CJ가 힘겹게 쌓아올린 글로벌 경영의 공든 탑이 이번 사태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점으로 지적된다. 21세기는 글로벌과 문화가 파워인 시대인데 현 단계에서는 CJ가 가장 근접한 국내 대기업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검찰 소환 조사를 앞둔 시점인 지난 616일 중국인 VIP와 비공개 회동을 갖고 한·중 미디어·영상문화사업 분야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등 기업가 정신을 불태우고 있다. 딜로이트컨설팅 김경준 대표이사는 이재현 회장의 가장 큰 업적은 국민에게 식품회사로만 인식되던 제일제당(CJ)을 단기간에 종합생활문화기업으로 변신시킨 것과, 내수산업인 식품산업 그 자체를 글로벌 산업으로 키운 것이라며 “CJ가 앞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문화창조 기업으로 성장하기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