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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갈등 치유하자] 서효인 시인·전원책 변호사

풍월 사선암 2013. 1. 8. 18:26

 

서효인 시인 "용산서 칼국수 팔던 아저씨가 몇 달 만에 돌연 테러범 되더니 화염 속에서 시커멓게 타 죽었는데" 전원책 "우리 세대는 언제나 숨 가빴다네 아픈 청춘이라고 말조차 못 했지"

 

서효인 시인·2011'김수영문학상' 수상 / 전원책 변호사·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5] 서효인 시인·전원책 변호사

 

쌍용차, 용산, 최고은 사건.

 

구체적 사회 현안을 바라보는 20305060세대의 시선에도 격차가 있다. 세대뿐만 아니라 이념적 격차까지 겹쳐 있는 사안이다. 섣부른 위로나 힐링으로 봉합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은 우리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치유를 위해 머리를 맞대보는 것이 필요할 때인지 모른다. 당장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격차가 줄면 여러 가지 가능한 일들과 결단이 생길 테니까.

 

2011년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서효인(32)씨와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인 전원책(58) 변호사가 상대 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싣는다. /편집자

 

◀시인 서효인은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2011년 제30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새 대통령을 포함한 5060 선배 모두가 2030세대와 같은 시선으로 사회의 구석구석을 함께 봐주기를 소망한다.

 

[20305060에게 보내는 편지] 서효인 시인

 

용산·쌍용자동차 사태, 생계형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그리고 수수방관하는 사회

엄마 친구 아들은 대기업 갔다는데 왜 내 친구 중엔 그런 녀석 없을까요

선배님, 우리와 같은 곳 바라보며 '기운 내라' 보듬어 주실순 없나요

 

저희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선배 세대의 희생에 의해서 세상은 이토록 풍요로운데, 그것을 고마워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는 세상 이곳저곳 잘못된 곳을 지적합니다. 잘나서 떵떵거리는 사람도 많건만, 그 와중에 폭력에 노출된 사람을 찾아내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합니다. 기어코 대학이라는 취업 학원에 진학해서 등록금이 비싸다고 징징대고, 대학을 졸업해서는 눈만 높아져서는 취업이 안 된다고 또 입을 삐죽거립니다. 취업은 늦어지고, 그것도 대개는 비정규직으로 첫 직장을 시작합니다. 엄마 친구 아들은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제 친구 중에는 그런 녀석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돈을 모으기 쉽지 않습니다. ·월세는 하늘로 치솟고, 아이를 낳아 키울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툭하면 촛불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섭니다. 이상하지요. 선배들은 전쟁과 배고픔, 가난과 독재마저 이겨내고 이 모든 것을 해내었는데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누구의 잘못일까요.

 

저희는 이런 곳을 보았습니다.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앞 송전탑. 그곳에는 세 명의 노동자가 극한의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시위 중입니다. 쌍용자동차와 관련되어 우리 곁을 떠난 삶이 스물세 분입니다. 단순히 회사에서 잘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목숨을 내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토끼몰이'로 불렸던 진압 과정의 폭력성, 합의와 약속을 손바닥보다 쉽게 뒤집는 회사의 뻔뻔함,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정부와 정치권에 그들은 절망한 것입니다. 저희는 그 절망의 극히 일부분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꼈던 것입니다.

 

◀지난 2009120일 새벽 경찰의 강제진압에 맞서 화염병을 들고 저항하는 용산 철거민 시위대. 아래쪽의 골프공은 대형 새총에 재서 발사하는 데 썼다.

 

저희는 또 이런 곳도 보았습니다. 2009년 겨울 용산. 망루에 올라 용역업체와 대치하던 시민들이 있었고, 119일 대테러작전을 수행하는 경찰특공대가 남일당 옥상으로 침투합니다. 시민 다섯 명이 세상을 떠났고, 경찰 한 명이 순직했습니다. 몇 개월 전까지 백반이나 칼국수, 짜장면 따위를 팔며 단란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테러범이 되었습니다. 화염 속에서 시커멓게 타 죽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더해, 남은 가족이 떠난 가족의 죽음을 책임지러 감옥에 갔습니다. 아직까지도 형무소에 있습니다. 그해 2월에는 한 연쇄살인범의 끔찍한 범죄를 활용해서 용산 참사에 향하는 여론을 무마하라는 경찰의 홍보지침까지 있었습니다. 용산에서 죽은 시민은 과연 누굽니까. 죽어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습니까? 망루가 불탈 때, 그들이 외쳤던 말은 "여기 사람이 있다"였습니다. 저희는 그 비명의 끄트머리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 끝에, 무언가 잘못되었다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곳도 보았습니다. 고 최고은 작가가 살았던 1평짜리 고시원.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였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제작사에 매인 몸입니다. 저작권에 대한 정해진 가치도 없습니다. 많으면 1000만원, 적으면 400만원을 받고 1년을 일합니다. 그녀도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단편영화를 만들고, 그것으로 상까지 받았던 유망한 작가에게 사회가 처음으로 알려준 것은 비정함이었습니다. 세상은 젊은이에게 꿈을 찾으라고 해놓고, 꿈을 찾기 위해 먼저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꿈은 저 멀리 도망가 있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어느 곳보다 더 싸늘했을 그 방에서, 저희는 낭떠러지 같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확신했습니다.

 

젊은 세대가 보았던 세상이 모두 거짓일까요? 저희는 저희가 본 것에 공감했습니다. 때로는 슬퍼하고 더러 분노했습니다. 최근 5년 동안 더욱 거세진 감정의 파도를 보고 선배 세대는, 아직 어려서 세상을 잘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대통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요, 또 이상하지요. 통합하고, 힘을 합쳐야 할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여기를 보지 않고 자꾸만 다른 곳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아직도 저희가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일까요.

 

새 대통령을 포함한 5060 선배 모두가 저희가 본 이러저러한 구석들을 같은 시선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다그치지 말고, 낙인찍지 말고, 보듬고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4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왜 그러한지, 어디를 고쳐야 할는지 모여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장소를 같은 높이에서 함께 보는 것에서부터, 세대 갈등은 조금씩 치유될 것이라 믿습니다.

 

 

전원책 변호사는 1977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한 시인이다. 청년들의 소수자나 소외자에 대한 동정심은 옳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믿는다. /이태경 기자

 

[50602030에게 보내는 편지] 전원책 변호사

 

가진 것은 적고 머릿수는 많고 치열한 경쟁에 늘 시험의 연속

소 팔아 대학 가고 밤새워 일했지

쌍용차·용산나도 가슴이 먹먹 그러나 法治 허물면 피해자는 우리

청년아, 다시 용기 내 일어나게우리가 그대 아픔 귀 기울일 테니

 

저는 인생을 두루마리 화장지에 비유하곤 합니다. 20대엔 아무리 풀어 써도 줄지 않던 뭉치가 50대엔 조금만 써도 푹푹 줄어듭니다. 60대가 되면 한 달이 하루처럼 간다고들 하지요. 그래서 장년이 되면 누구나 초조해집니다. 남은 시간은 얼마 없는데 할 일은 많이 남았습니다. 그런 초조감에다 다 큰 자식들은 여전히 어린앱니다. 노후 걱정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더 어려웠지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당신들은 굶으면서 교육에 매달렸습니다. 그 덕분으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고비를 넘어왔습니다. 숨 가빴지요. 문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우리 세대 그리고 선배들은 참 바쁘게 살았습니다. 머릿수는 많고 자리는 적었습니다. 언제나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험의 연속이었지요. 물자는 적고 먹을 것은 없었습니다. 읽을 책도 부족했습니다. 입주과외를 하면서 우골탑(牛骨塔)이라 불리던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는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도 친구들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숙비를 조금 넘는 봉급을 주는 중소기업에서 밤새워 일했습니다. 그 무렵 은행은 최고의 직장이었지요. 초임지는 대부분 지방 근무였지만 은행원이라는 자부심으로 폼을 잡았더랬습니다. 세칭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중견 건설회사에 입사한 친구 둘은 취직 턱을 내기 바쁘게 열사(熱砂)의 나라 사우디로 갔습니다. 다들 힘들 때였습니다. 그래도 아프다고 징징대지는 않았지요. 4만원이 채 안 되는 봉급으로 20년 적금을 들면 작은 집을 장만할 수 있다며 종로에서 충정로 단칸방까지 걸어다니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그 친구는 지금 어엿한 기업체 사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아프다고 합니다. 한데, 어느 시대건 어디 아프지 않은 청춘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지금, 아프다고 외칠 여지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들어줄 사람이라도 있으니 고맙지 않습니까? 견딜 수 있는 슬픔이 슬픔이 아니듯, 참을 수 있는 아픔이 아픔이 아닌 것을 지금 청년들이 알기나 하는 걸까요? 혹 그런 아픔이 과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탓은 아닙니까? 이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헛된 자만심에 빠진 것은 아닌지요. 인력난을 하소연하는 중소기업체 사장을 만날 때마다 저는 화가 납니다. '스펙'은 가득한데 업무 능력은 '제로'라는 기업체 임원들의 말을 들으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그런 청년일수록 낮은 봉급만 탓하며 칼퇴근을 한다더군요.

 

흔히 청년들은 휴머니스트가 됩니다. 자연히 정치 경제 전반에 관해 소위 기득권층을 공격하게 됩니다. 소수자 소외자 빈자(貧者)에 대한 동정심은 장려할 일이지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회의 틀을 유지하는 것은 자유와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입니다. 무조건적인 동정심으로 인해 그 틀을 훼손하는 순간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는 무너집니다.

 

가끔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송전탑 농성과 2009년 용산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습니다.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합니다. 건국 이래 최대 정리해고 사태를 누군들 쉽게 넘기겠습니까? 쌍용차 노동자가 이 엄동설한에 송전탑에 올라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꼭 그런 극단적인 투쟁 방법만이 남아 있었던 걸까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법치(法治)를 허물면 그 피해는 우리 모두가 입습니다. 철탑에 매달린 그분들의 뜻이 '적법(適法)' 밖의 문제라면 그건 의사당 안에서 정치의 틀로 논의해야 할 일입니다. 용산 사건은 저는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사건은 좌우 진영에 따라 너무나 시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을 주도한 이 중엔 세입자가 아닌 분들이 상당수였고, 그들은 쇠구슬과 화염병으로 시민이 다니는 거리를 위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닌 좌우 진영의 갈등입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청년 세대를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에도 세대 간 간극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갈등이 유난해 보이는 것은 우리 세대가 청년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너무 무기력한 때문 아닌가요? 저는 감히 말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린다면 고지(高地)가 보일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 때보다 대가는 확실히 보장되는 시대인 것은 확실합니다. 스스로를 돕는 자에게 사회는 배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첫째 미덕입니다.

 

조선일보 : 2013.01.08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