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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새 지도자 시진핑 인생 스토리

풍월 사선암 2012. 11. 20. 09:55

중국 새 지도자 시진핑 인생 스토리

미스터 클린형제들 재산이 최대 아킬레스건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문건에 따르면 시진핑은 부패와 관련 없고 중국의 벼락부자를 경멸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12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른바 G2라고 불리는 미국과 중국에서도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해다. 미국의 경우 얼마 전 치러진 선거를 통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임이 확정되면서 정권교체 없이 대선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투표에 의해 지도자가 선출되지 않는 일당체제인 중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일찌감치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내정되어 있었다. 5세대 지도부의 출범과 함께 13억 중국 인구의 10년을 책임질 시진핑 총서기(59)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14일 폐막된 제18차 전국대표대회를 기점으로 사실상 시진핑 시대를 개막한 중국은 이로써 향후 10년간 미국을 뛰어넘는 강대국이 될 것을 천명한 상태다. 외유내강의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중국의 새 지도자 시진핑의 면면을 살펴봤다.

 

산시성 푸핑현에서 출생한 시진핑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시중쉰은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지냈던 혁명 1세대로서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후에 부총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혁명에 휘말리면서 구속됐으며, 이로 인해 시진핑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자칫 소년교도소 신세를 질 뻔했다. 산시성 생산대에 자원입대하면서 가까스로 철창행을 모면했으며, 그 후 마오쩌둥에 의해 지식청년(즈칭)’으로 분류돼 시골 농촌으로 내려가 6여 년간 농촌생활을 체험했다.

 

당시의 시골 생활은 시진핑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스스로 내 인생에서 많은 이념들이 정립됐던 시기다. 시골에서의 경험은 오늘날까지, 그리고 매순간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훗날 시진핑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함께 생활했던 농민들은 시진핑이 낮에는 커다란 건초더미를 나르고, 밤에는 희미한 등잔 아래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이에 1975년 그가 농촌생활을 마치고 떠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수십 를 배웅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농촌을 떠나 학업에 매진했던 그는 1975년 중국 명문대이자 후진타오의 모교이기도 한 칭화대에서 화학공학 및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본격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것은 1985년 푸젠성 부서기로 선출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저장성 부서기 겸 정치국위원을 거쳐 2007년에는 상하이 당 서기직에 올랐다. 그의 정치인생은 그 후로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2007년에는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던 리커창을 제치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2008년에는 급기야 국가부주석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2010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차기 지도자로 낙점됐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귀족 계급으로 통하는 혁명 1세대 가문인 태자당출신이긴 하지만 이처럼 최하위 말단직부터 차근차근 공직을 밟아왔다는 점은 시진핑의 장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또한 후진타오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점도 현재로선 긍정적으로 비치고 있다. 일례로 후진타오는 내성적이고 극단적인 성격으로 외국 정상들과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애를 먹곤 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미국 관료들 사이에서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비록 공식석상에서는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면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의 아내인 펑리위안은 시진핑을 가리켜 근면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편, “남편은 집에서는 지도자처럼 굴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저 내 남편으로만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해 <워싱턴포스트>는 시진핑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가 실용적이고 진지하며, 신중하면서 세상물정에 밝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할리우드를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특히 그 가운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디파티드>를 좋아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시진핑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인즉슨 중국 공산당의 언론 통제 및 검열이 워낙 심한 까닭이다. 공직 경력 외에는 사실 이렇다 할 만한 신변이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가 정확히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이런 정보들이 행여 정적들에게 빌미가 되거나 그로 인해 그의 정치적 행보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인물인지는 지난 9월 초 갑자기 사라졌던 실종 사건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당시 2주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그는 마치 하늘로 증발하거나 땅으로 꺼진 듯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한 국가의 지도자급 인사가 이처럼 홀연히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믿기 어려운 일. 그것도 중국 정부 측이 나서서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않았던 까닭에 당시 괴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이 가운데는 그가 운동 중 부상을 입었거나 가족력인 중풍이 발생했다는 건강이상설부터 권력투쟁 끝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암살설, 과로로 쓰러져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과로설, 홍콩의 시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홍콩으로 비밀리에 출국했다는 홍콩행설 등 다양했다. 이렇게 온갖 추측과 설만 난무하길 2주 째. 시진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렇게 해서 그의 실종 스캔들은 일단락됐다.

 

그 후에도 중국 측이 대외에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럴 듯한 소문 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워싱턴포스트>의 막스 피셔 기자가 중국에서 오랜 생활을 해온 한 서방 사업가가 중국의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서 주장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9월 초 공산당 2세대들이 모인 비밀 연회에서 망치와 낫까지 동원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당시 이 싸움을 말리던 시진핑이 날아든 의자에 등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진위 여부가 확인된 바 없긴 마찬가지다.

 

시진핑과 펑리위안 부부의 다정한 모습.

 

시진핑이 당면한 국가 과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양보다는 질적인 성장을 이끌어 내는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지난 20년간 양적인 팽창을 이뤄냈다면 시진핑은 향후 10년간 질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금융위기 이후에도 10% 수준을 유지하던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최근 13년 만에 처음으로 7.6%로 떨어졌다는 점은 중국의 성장이 둔화됐다는 것을 나타낸다.

 

의식주 걱정 없는 민생안정 및 소득분배 개혁 역시 그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무엇보다도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최근 하얼빈에서 457명을 뽑는 청소미화원 모집에 대졸자 3000명이 몰렸다는 것은 중국의 일자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나타낸다.

 

이밖에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 역시 시진핑이 10년간 내세운 목표 가운데 하나다.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18000명의 부패한 관리들이 해외로 빼돌린 돈만 무려 12800억 달러(1388조 원)에 달한다는 추측도 있다.

 

사실 중국 관리들이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또한 관리들은 당에 수입과 재산을 신고할 의무가 있으며, 대신 신고 내역을 대외적으로 공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법은 법일 뿐이다. 대부분의 관리들은 호의호식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중국인들 역시 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공산당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91%는 중국의 부자들이 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 문제 때문에 시진핑 역시 난처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의 누나 두 명과 남동생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경제전문지인 <블룸버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시진핑의 누나인 치차오차오를 비롯해 그녀의 남편과 딸 명의로 된 재산은 총 43100만 달러(4670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기업 지분들과 함께 총 2400만 달러(260억 원)에 달하는 홍콩 부동산 여섯 채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시진핑 본인이나 아내 펑리위안의 명의로 된 것들은 없으며, 그가 친척들의 사업에 개입한 흔적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이와 달리 시진핑은 청렴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2009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시진핑은 돈에 연연하는 정치인은 아니며, 오히려 지나치게 상업화된 중국 사회에 대해 역겨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요신문 20121119김미영 해외정보작가>

 

퍼스트레이디 펑리위안 누구인가

미녀 국민가수조용한 내조전망

 

현재 중국에서 시진핑 못지않게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단연 그의 아내인 펑리위안(47)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시진핑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시진핑의 첫 번째 부인은 1980년대 초 화촉을 밝혔던 커링링이라는 여성이었다. 커링링의 부친은 영국 주재 중국 대사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둘은 3년 결혼생활 끝에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당시 이혼 사유에 대해서는 성격 차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 명확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그리고 1987년 시진핑은 유명 포크송 가수인 펑리위안을 만나 재혼에 성공했다. 첫눈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당시 아내에게 푹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시진핑보다는 펑리위안이 더 유명했다. 최근 그가 국가주석 후보 물망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를 가리켜 펑리위안의 남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빌 게이츠 전 회장과 금연 홍보대사로 활동한 모습.

 

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노래 실력을 겸비한 펑리위안은 18세 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소속 가무단 단원으로 데뷔했으며, 현재 인민해방군 예술학원 총장 겸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현역 소장인 동시에 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직도 겸하고 있다.

 

중국의 영부인들은 대외 및 공개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기 때문에 펑리위안 역시 도드라진 행보를 보이진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기존의 영부인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선사업이나 사회공익활동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이와 관련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얼마 전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과 함께 금연 홍보대사로 활동한 바 있으며, 세계보건기구의 에이즈 및 결핵 예방 친선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진핑과의 사이에는 딸 시밍쩌를 두고 있으며, 현재 시밍쩌는 하버드대학에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