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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쇠퇴기 칼날은 지근거리에 있다

풍월 사선암 2012. 9. 30. 19:14

권력 쇠퇴기 칼날은 지근거리에 있다

 

최고 권력자의 형님과 아우로 살아가기존재 자체가 부담이었던 삶

 

정치권력의 말기에는 각종 비리사건이 봇물처럼 터진다. 그중에는 형제나 자식 등 가족의 일도 빠지지 않는다. 권력의 가족일수록 행동거지에 더욱 조심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왕위계승 서열이 앞설수록 대군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의 행동에서 배우는 처세술.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본격화하면서 올해 들어 권력 가까이에서 비리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나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한나라당 의원의 구속은 온 국민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국민은 더 이상 그 몰락의 과정이 낯설지 않다. 5공 때의 전기환 씨나 참여정부 때의 노건평 씨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한국현대사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형님들이 구설에 오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의 혈연 중에서도 형제들의 삶은 자고이래로 세인의 관심이었다. 권력의 지근거리에 있을수록 그들은 늘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거나 왕자의 난 같은 변칙적인 정치상황 속에서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 상황을 어쩔 수없이 지켜봐야 했던 대군들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

 

세종의 둘째형님, 효령대군(孝寧大君)

 

효령대군(1396~1486)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알 뿐 대부분은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형님이자 태종의 둘째아들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이름은 보(), 초명은 호()였으며. 자는 선숙(善叔)이고 호는 연강(蓮江)이다. 1396년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출생했다. 1407(태종 7)효령군(孝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효령대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좌찬성 정역(鄭易)의 딸과 사이에 61,측실에서 11녀를 두었다.

 

1418년 태종은 엄청난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14년간 세자 자리에 있었던 맏아들 양녕대군을 왕세자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장자상속의 원칙 대신 택현(擇賢)’의 논리를 선택한 것이다.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부터 부친인 태종에게 많은 불신을 안겨주었기에 그렇다 치고 충녕대군과 함께 태종의 사랑을 받았던 효령대군 역시 세종보다 형님이라는 이점에도 결국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후계자 재목감으로 확신하는 과정에서 양녕대군에 이어 효령대군 역시 후계자 계승에서 멀어졌고, 효령대군도 스스로 왕위에 대한 미련을 일찍 접었다. 그리고 평생 불교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탄압받던 시절 효령대군만큼 불교의 중흥과 불사 창건에 힘을 기울인 왕자도 없었다. 권력에의 미련을 훌훌 털고 불교라는 대안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효령대군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왕위를 물려준 이후 상왕이 된 태종은 중국 사신의 접견 같은 중요한 국가행사에 꼭 효령대군을 배석시켰다. 왕인 세종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인 형의 행동을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효령대군이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기 때문일 것이다.

 

효령대군은 세종 사후에도 장수하면서 국가 원로로서 역할했다.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연고존친(年高尊親)으로 존경받으며 왕실의 주요 행사나 외국 사신 접견 등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성종이 즉위하여서는 이보(李補)가 나이 많고 종실의 웃어른이라 하여 예우함이 더욱 융숭하였으며, 여러 번 그 집에 거둥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를 영화롭게 하였다는 기록은 그에 대한 국가적 예우가 컸음을 보여준다.

 

효령대군은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禪家)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이 많았지만, 불교 보호와 진흥에 공헌한 바 크다. 특히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세조는 원각사 창건 사업을 맡기는 등 효령대군을 크게 배려했다. “이보가 부처를 좋아하여 중들을 많이 모아 불경을 강하였는데, 세조의 돌봐줌이 지극히 융숭해 상을 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기록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효령대군의 불교에 대한 애착은 형인 양녕대군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효령대군이 사찰에 예불하러 나아갔는데, 양녕대군이 개를 끌고 팔에는 매를 받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 절 뜰에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효령대군이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형님은 지옥(地獄)이 두렵지도 않습니까하자 양녕대군은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효령이 얼마나 불교에 집착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효령대군의 일대기는 <성종실록>의 졸기에 가장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태종이 일찍이 편치 않으므로 이보가 몸소 탕약(湯藥)을 써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태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비를 내려주었다거나 세종께서 우애가 지극히 도타워 늘 그 집에 거둥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고는 했다는 기록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의 우애를 지닌 무난한 인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효령대군의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91세라는 이례적 장수다. 조선 역대 왕의 평균수명이 48세인 점을 고려하면 효령의 삶은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 최장수 기록으로도 볼 수 있다. 왕 중에서는 영조가 83세라는 장수를 누렸는데, 영조보다도 장수한 셈이다. 효령의 이례적 장수는 권력에의 미련을 버리고 불교에 심취해 전국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닌 것에서도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국정의 스트레스로 삶이 단축된 왕의 길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불교 관련 일을 하면서 평안한 여생을 누린 효령대군의 길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삶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종의 형님, 월산대군(月山大君)

 

14691128일 예종이 경복궁 자미당(紫薇堂)에서 승하했다. 예종에게는 맏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네살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일단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났다. 왕위 계승권은 대비인 정희왕후에게 넘어갔다. 정희왕후는 이제 원자(元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잘산군(者乙山君)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했고, 대신들은 이에 적극 찬성했다.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는 그의 장인인 한명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잘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월산대군은 생존한 상태에서 왕의 형님이 되는 불운(?)을 맞았다. 월산대군(1454~98)은 성종(1457~94)보다 세 살 연상이며 이름은 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라고 했다. 일찍이 아버지(의경세자)를 잃은 그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에서 자랐다. 1460(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6년 병조참판 박중선(朴中善)의 딸과 혼인했다.

 

1469년 동생이 왕위에 오르자 1471(성종 2) 월산대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3월 성종은 구성군(龜城君) ()을 제거한 후 왕을 잘 보필했다는 명목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73명을 봉하였는데, 월산대군을 2등에 봉해전지(田地노비·구사(丘史) 등을 하사했다. 성종이 형을 좌리공신에 봉한 것은 왕위 계승의 상실을 어느 정도 보상하기 위한 조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월산대군은 좌리공신이 되는 대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차단당했고, 성종을 둘러싼 훈구파 대신들도 왕의 형님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다.

 

결국 월산대군은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길을 선택했다. 월산대군은 한강변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하고 이곳에서 풍류적 삶을 즐기기도 했다. 희우정은 원래 효령대군의 별서(別墅)로 조성된 곳이었으니 왕의 형님들과 특히 인연이 깊은 곳이다. <성종실록>의 그의 졸기에도 어려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깨끗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색(聲色)과 매사냥은 더욱 좋아하지 아니하고 오직 시주(詩酒)만 좋아했다. 일찍이 작은 정자를 정원 안에 짓고 편액(扁額)을 풍월정(風月亭)이라 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아 놓고 날마다 그 사이에 있으면서 거의 섭렵했다. () 비록 문사(文士)를 좋아했으나 함부로 사귀고 접하지 아니하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하고 거마(車馬)가 들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권세가들과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시문을 즐겼음이 나타난다. 성종 역시 사고를 치지 않은 형님에 대해 돈독한 우애를 보이면서 융숭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그러나 월산대군은 어머니 인수대비를 간병하는 과정에서 건강이 약해지고 왕의 형님이라는 스트레스도 결코 적지 않았던지 35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월산대군의 불운은 사후에 그의 처 박씨가 조카인 연산군에게 겁탈당해 자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산군일기>에는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1506년 박원종은 누이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더해 1506년 연산군을 축출하는 중종반정의 주역이 되었다.

 

광해군의 형님, 임해군(臨海君)

 

양녕대군·효령대군·월산대군이 비교적 평안하게 여생을 마친 것과 달리 역모사건에 연루돼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왕의 형님도 있다. 임해군(1574~1609)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임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 출생한 선조의 서장자(庶長子)1585년 허명(許銘)의 딸과 혼인했다. 선조에게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후계자 계승 1순위의 위치에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후계자인 세자 책봉을 서둘렀는데, 그 대상은 임해군이 아니라 광해군이었다. 임해군은 성질이 사납고 난폭하여 왕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부왕의 신뢰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회령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어 선조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였다. 여러 번의 협상 끝에 임해군은 풀려났지만 왜적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한 자의 석방을 청탁하는 등 그에 대한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난폭한 품성과 포로가 되었다는 열등감 등이 겹치면서 임해군은 선조나 광해군과 거리도 멀어졌다. 15971월 선조는 임해군은 위인이 어려서부터 불의를 많이 행하여 왔는데 () 모두 내가 아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죄다.아울러 추고하여 죄를 정하라고까지 하였다. 선조 말년 임해군이 백성을 구타하고 노비와 가축을 빼앗는 비리가 끊이지 않으면서 임해군은 왕실의 최고 문제인물로 떠올랐다.

 

1608년 선조 사후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 광해군 즉위직후 임해군의 역모 움직임에 대한 고변이 잇달아 올라왔다. 비밀리에 무기를 모으고 역당(逆黨)을 규합하니 절도(絶島)로 유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조의 상중에도 불량배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등 최고 지도층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자질을 임해군은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의 형이 그럴 리 있겠는가라던 광해군도 거듭되는 신하들의 요청에 마침내 16082월형을 교동도(喬洞島)로 유배했다.

 

살아있는 왕의 형님이라는 존재는 명나라와 외교관계에서도 커다란 난제로 다가왔다. 당시 명나라는 형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 승인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광해군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청하기 위해 이호민 등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명나라측에서 장자가 아닌 차자를 왕으로 세운 이유를 묻자 이호민은 임해군이 스스로 왕위를 사양했다고 대답했다.

 

명나라에서는 임해군 면담을 통한 실지조사를 위해 사신을 파견했고, 광해군과 조선 조정에서는 은과 인삼을 뇌물로 주면서 명나라의 의심을 피해갔다. 임해군은 능력이나 품성 면에서 도저히 왕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지만 왕의 형님이라는 이유로 광해군의 정통성에 최대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결국 정치적 라이벌인 형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1609429<광해군일기>의 기록에는 임해군을 위소(圍所)에서 죽였다. 임해군이 위장(圍墻) 안에 있을 때 다만 관비(官婢) 한 사람만이 그 곁에 있으면서 구멍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는데, 이때 이르러 수장(守將)이정표가 핍박해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드디어 목 졸라 죽였다. () 부인 허씨가 관을 열고 보니 피부가 살아 있을 때와 같았는데, 그 목에 아직 새끼줄을 감았던 붉은 흔적이 있었다고 하여 임해군의 최후가 매우 비참했음을 증언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서인 정권은 임해군을신원했다. 광해군에 의한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점을 강조해 광해군 정권의 패륜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목숨을 단축한 것은 도덕적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한 데다 왕의 형으로서 부적절하게 처신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살아있는 왕의 형님이라는 존재는 왕에게 큰 부담이었다. 세종이나 성종처럼 형님을 가능한 한 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광해군처럼 형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왕의 형님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권력과 특권에 대한 본인의 의지와 처세였다.

 

<월간중앙 201209월호 신병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