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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서 정치인으로 외도, 내 생각이 짧았소 - 손세일

풍월 사선암 2012. 9. 20. 00:24

[이한우의 聽談(청담)] 언론인서 정치인으로 외도, 내 생각이 짧았소

 

책사로 정계 입문했다 다시 펜을 잡은 손세일

"언론에 10번 써도 안바뀌던 정책, 호통 한번에 바뀔땐 재밌었지"

 

역사의 관찰자에서 현실 정치인으로 그리고 다시 역사의 관찰자로 돌아온 사람. 손세일(孫世一·77)이다.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걸어온 길의 현대사적인 전형성(典型性)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비판 언론인과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었고, 김영삼·김대중을 각각 모셨으며 이승만과 김구’(1970), ‘인권과 민족주의’(1980), ‘김대중과 김영삼’(1985) 등 정치학자를 능가하는 선구적인저술작업으로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았다. 그 밖에도 한국논쟁사’(5·1976)를 엮어냈고 해리 트루먼의 회고록을 번역했다. 한국 정치에서는 흔치 않은 국제 감각과 지성을 갖춘 정치가였으나 그다지 성공적인 정치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시 2001년부터 10년 넘게 이승만과 김구의 원고를 매달 200장 가까이 월간조선에 기고해 오고 있다. 원고지로 2만장 분량이다. 스스로를 정치로 잠시 외도(外道)했던 영원한 언론인으로 기록해 달라는 그를 만나 평생 그가 싸우고 타협하고 만들고 기록해온 한국 현대정치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23일 그가 매일 9시면 출근해 오후 6시면 퇴근한다는 마포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그가 창간하거나 제작에 참여했던 잡지들을 앞에 두고서 손세일씨는 그때는 내가 문화권력인지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잡지를 만든다는 게 대단한 파워였다지금은 이런 잡지 문화들이 다 사라진 걸까?”라고 자문했다

 

장준하씨는 올 것이 왔다고 했지

 

1958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첫 직장이 장준하씨가 하던 잡지 사상계.

 

그때부터 5·16 직후까지 있었으니 4년 정도 근무했다.”

 

당시 사상계가 대단했다고 하던데.

 

자유당 말기 아닌가? ‘사상계안 끼고 다니면 의식 없는 대학생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안 읽어도 반드시 끼고 다녀야 하는 것처럼 됐을 정도였으니.”

 

4·19와 관련해 사상계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민주시민 교육을 해준 것이 바로 사상계. 백성의 민도를 높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끝내는 데 사상계가 한 역할은 참으로 크다. 그런데 이념적으로 분명 반공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4·19가 나던 해 2월호 사상계의 특집이 방황하는 현대사회주의였다. 이 점을 요즘 사람이 잘 모르고서 마치 장준하씨나 사상계가 진보 내지 좌파였던 양 떠들어대는데 큰 오해다.”

 

◀서울대 재학 시절 학예부장을 맡아 창간한 논문집 정치학보 창간호

 

이 점은 장준하의 건국 직후 이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496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장준하는 문교부장관 백낙준의 요청으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리고 6·25전쟁이 터지자 정부를 따라 부산에 내려가 1952년부터 思想(사상)’이라는 월간지를 펴낸다. 반공의식 고취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판매 부진으로 4호 만에 폐간되자 장준하는 연구원을 나와 ()’자를 추가해 思想界(사상계)’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처음에는 학생 계몽 잡지였으나 점점 성인 대상 고급 시사교양 잡지로 성격이 바뀌어 큰 인기를 끌면서 50년대 후반 판매 부수 3만 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 일간지가 7만 부 나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장준하를 박정희의 대척점에 세우지만 5·16이 일어났을 때는 지지한 것으로 안다. 그때 사상계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던데 당시 장준하씨는 올 것이 왔다고 했지. 아마 많은 뜻있는 식자들이 그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실제로 19616월호 권두언을 보니 장준하는 자유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은 혁명 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해누란의 위기에서 민주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5·16혁명이다.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 계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고 쓰고 있다.

 

압력을 받아서 쓴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압력도 없었거니와 정확히 본인의 생각을 권두언에 담은 것이다.”

 

요즘 장준하 논란이 뜨거운데.

 

실상과 다른 부분들이 많아 언급하고 싶지 않다. 특히 박정희와의 투쟁 부분은 내가 사상계를 떠난 이후의 일이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하나 해두고 싶다. 내가 편집 책임을 맡게 됐을 때 장준하씨가 세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 첫째, 친일 경력자의 글을 싣지 말라, 둘째,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의 글을 싣지 말라, 셋째, 정실에 의한 글 청탁을 받지 말라.”

 

장준하와의 인연은 그걸로 끝인가?

 

돌아가시고 나서 815일에 그의 독립운동 동지였던 김준엽(金俊燁·1920~2011) 전 고려대 총장과 몇년 동안 묘지를 찾아간 정도다.”

 

천관우, 한창기와 더불어 지식인 운동을 기획하다

 

61'사상계'를 나왔던데.

 

"내가 이 부장 선배야. 조선일보에 가서 2년 반 정도 일하면서 문화부와 기획부에서 일을 했거든.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선우휘씨와 조덕송씨와 함께 '횃불은 흐른다' 시리즈를 한 것이다."

 

-그리고 '신동아' 재창간에 뛰어들었다.

 

"돌아보면 제일 행복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내가 장인(동아일보 사장과 회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 고재욱<高在旭·1903 ~1976>이다)을 설득해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천관우(千寬宇·1925~1991) 선생을 모셔온 것이다. 그는 탁월한 국사학자이자 문장가였다. 마지막 선비이자 최초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인을 설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학자로서 천관우의 탁월함을 설명했다. 그런데 매사 조심하시는 성품의 장인은 '그 사람, 패거리를 몰고 이 신문사 저 신문사 옮겨다니는 사람 아닌가'라고 따져 물으셨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또 하나,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상백(李相佰·1904~1966)씨와의 관계를 물었다. 이상백씨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시절부터 여운형의 브레인트러스트(책사) 역할을 했다. 천관우씨는 실학에 관한 탁월한 논문으로 이병도로부터 '군계일학'이라는 평을 받고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병도학파(두계학파)에 들지 못하고 이상백에게서 역사 공부를 했다. 그러니 여운형에 맞섰던 송진우의 후배라는 자부심이 있던 장인으로서는 천관우 선생이 못마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장인은 그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해 천관우 선생은 편집국장이 될 수 있었다."

 

-뭐가 그리 행복했나.

 

"천관우 선생은 당시 편집국장 겸 신동아 주간이었다. 난 신동아에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당시 두 가지 면에서 의기투합했다. 기존의 비평과 계도 위주의 논설 잡지를 20세기 초 미국 자본주의의 부패를 정화하는 데 크게 공헌한 머크레이커 저널리즘(폭로저널리즘)으로 전환하자고 한 것이 한 가지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기사들을 대거 발굴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복간호(19649)에는 이웅희(李雄熙) 기자와 김진현(金鎭炫) 기자가 공동 집필한 '정치자금-한국 민주주의 비용'과 강인섭(姜仁燮) 기자의 '육사 8기생'이 나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신상초(申相楚·1922~1989)씨는 '일본군 탈출기'를 기고해 민족정신을 고양했다. 이같은 잡지의 편집 방향 변화는 당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세무조사 등 각종 압력에 시달리고 있던 '사상계'에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이후 '사상계'는 명성을 잃어가게 된다.

 

-한국 잡지계의 신화적 존재인 한창기씨와도 인연이 깊다.

 

"68년에 '신동아 사태'라는 게 있었다. 동아일보 김진배(金珍培) 기자와 박창래(朴昌來) 기자가 공동 집필한 250장 분량의 '차관(借款)'이라는 기사가 12월호에 실렸다. 이때는 이미 박정희 정권이 3선개헌을 준비하고 있었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사전 단계로 신동아를 공격한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구속됐다 나왔고 얼마 후 천관우 선생과 함께 해직됐다."

 

-1970년에 이미 '이승만과 김구'라는 책을 썼던데 그렇다면 해직 후 바로 집필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때 왜 갑자기 '이승만과 김구'인가.

 

"이듬해인 196931일은 3·1운동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천관우 선생이 아이디어를 내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이란 걸 내게 되었는데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나도 한 편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집권자에 따라 헌법이 위인설관식으로 만들어지는 전통의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쓴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 지도체계'였다. 그러면서 그 논문을 확대해 한국정치학에서 '전기정치학의 효시'(김학준 이사장)라는 평가를 받은 '이승만과 김구'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한창기와의 일화를 들려달라.

 

"해직되고서 한동안 일본 동경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게 됐는데 그때 내 머릿속에는 나 자신의 잡지를 창간하겠다는 꿍꿍이로 가득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제호까지 생각해놓고 있었다.

 

산업화 붐을 타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으로 큰 히트를 치고 있던 한창기를 만난 것은 그때다. 그는 당시 '배움나무'라고 하는 손바닥만한 잡지를 내고 있었는데 이것을 확대해서 펴낸 것이 '뿌리깊은 나무'. 그는 원래는 '뿌리'라고 했는데 내가 아무래도 잡지를 내지는 못할 것 같아 나의 '뿌리깊은 나무'를 넘겨주었다. 그후 '뿌리'는 한창기 것이고 '깊은 나무'는 내 것이라고 농담하고 그랬다."

 

-기본적으로 잡지에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게. 내가 고등학교 때 교회 다니면서 '임마누엘'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또 문리대 때는 최초의 비()인문대 출신 학예부장이 되어 그전까지 문예지 성격이던 학보를 논문집으로 바꿔 '정치학보' '사회과학보' '자연과학보'로 펴냈다. 그리고 '정치학보' 창간호에는 필명으로 '민주주의'라는 시도 기고했다. 어릴 때부터 잡지쟁이 기질이 다분했던 거지."

 

-한창기와도 천관우 선생 때처럼 의기투합했나?

 

"잡지에 대한 열정은 공유했지만 우리 문화를 보는 견해에서 큰 차이가 났다. 그는 토박이 문화에 집착했다. 그러나 나는 고유의 문화와 보편적 문화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의 이런 견해 차이는 19763월 그의 창간사와 그 다음 달 나의 논설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그는 창간사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고 했지만 나는 '전통문화는 일찍이 우리 조상의 삶의 모습이었으며 따라서 그 속에는 기막힌 슬기가 깃들어 있는가 하면 하릴없는 어리석음이 배어 있기도 하다'고 맞받았다. 그러나 한창기라는 사람은 천재적인 언어 감각의 소유자다. 미국 유학도 하지 않은 그의 영어 실력은 정평이 있었으며 한글 문법에도 대단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은 1980년 내가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꾸자 교분을 끊어버렸다."

 

 ◀1999년 국회의장실에서 당시 국민회의 원내총무 손세일(왼쪽에서 두번째)씨가 박준규 국회의장(왼쪽에서 셋째)이 주선해 열린 3당 원내총무회담에 앞서 자민련 강창희(맨 왼쪽), 한나라당 이부영 원내총무(맨 오른쪽)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정치인으로의 변신, "내 생각이 짧았다"

 

비판적 지성의 무대 한복판을 누볐던 그에게도 현실 역사의 물결이 덮친다.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한 이후의 일이다.

 

-정치 쪽에 인연을 갖게 된 과정은 어떤가.

 

"김영삼 쪽에서 연락이 왔다. 특보를 맡아 지식인들을 모아달라는 것이었겠지. 브레인트러스트였다. 잠깐이지만 서울의 봄을 만끽하며 정치를 배우려던 참에 광주 민주화운동이 터지고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세상은 암흑천지가 됐다. 정치라고 제대로 맛도 못 본 거지."

 

-1980년 국가보위 입법회의에 참여했다.

 

"1970년 무렵 동경에 있을 때 가까웠던 당시의 실세 허문도(전 국토통일원장관)의 권유가 있었고 또 한쪽으로는 처가 쪽 사람 한 명이 데모를 하다가 곤경에 처해 있어 그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또 속으로는 이런 현실에서라도 야당 역할 해야 할 사람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자위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 생각이 짧았다."

 

-당시는 권력 쪽에서 여든 야든 마음대로 할 때인데.

 

"입법회의에는 참여했어도 내가 자기들하고는 안 맞는다고 여겼겠지. 그래서 민정당이 아닌 민한당으로 선거에 나갔는데 민한당에서는 몇 명 안 되는 금배지였다."

 

-금배지라니.

 

"당시에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았다. 그래서 1등은 금배지, 2등은 은배지라고 불렀다."

 

-막상 정치를 해보니 어땠나. 흔히 하는 말로 밖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바보가 되거나 썩거나 한다고 하지 않나.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언론에 있을 때 다섯 번, 열 번 써도 안 바뀌던 정책이 국회에서 호통 한 번이면 바뀌는 것을 보고서 ', 사람들이 이래서 죽기 살기로 정치를 하려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소위 '패거리' 정치가 극에 달했을 때다.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정치적 운명이 확확 갈렸다. 나도 결국 줄 잘못 서는 바람에 다음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돈 안 갖다 준다고 공천을 안 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졸지에 정치 낭인이 돼 12·13대를 보내고 14대에 민주당 공천으로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어떻게.

 

"그때 김대중이 사람을 모을 때다. 그쪽에는 사람이 없었거든. 그러니 나처럼 입법의원에 YS 특보를 한 사람에게까지 손을 내민 거지. 3당 합당 때 YS 따라가지 않은 것도 감안됐을 테고. 권노갑씨가 찾아왔다.

 

-뒤에 원내총무까지 했으면 DJ의 총애도 받은 셈인데.

 

"난 측근이 아니었다. 정치에서 측근 아니면 아무 소용 없다. 원내총무도 원래는 DJ가 문화부장관 약속했다가 여성인 신낙균 의원한테 주면서 미안하니까 나를 시킨 거다. 난 또 원내총무 되자마자 옷로비사건이 터져 고생만 했지. 그때 내가 '정치는 역지사지해야 한다'며 양보를 주장했다가 DJ 측근들한테 혼났다. 정치는 기 싸움인데 무슨 역지사지를 한다는 거냐며. 그럼 점에서는 우리 정치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승만과 김구, 1970년에는 부끄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위대한 거인들이다."

 

'먹물' 출신 국회의원 세 차례를 끝으로 손세일은 20년 정치 외도를 마감하고 다시 펜을 쥔다. 의원 시절 손꼽히던 장서가였던 그는 5000여 권의 각종 도서를 국회도서관에 기증하고 여의도를 벗어났다. 지금 그곳에는 '손세일 문고'가 있다.

 

-서운했겠다.

 

"정치는 해보니까 세 싸움이더라. 세 차례 국회의원 하면서 날 따르는 사람이라고 딱 한 명 있었다. 서청원 전 의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정치를 해봤자 뭐 하겠나?"

 

-2001년부터 월간조선에 다시 '이승만과 김구'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 결심은 훨씬 전에 했나 보다.

 

"이미 국회의원 하고 있을 때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가까이 정치에 들어와 몸소 겪어보니 '그분들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위대한 거인들이었구나'라는 각성을 하게 됐다. 그래서 30년 만에 다시 두 분을 조명하려고 결심한 거지."

 

-30년의 시간 거리를 두고 보는 두 사람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바뀌었나. 먼저 김구에 대한 생각 변화가 궁금하다.

 

"예전에는 현실에서 패배한 독립운동가로만 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우리에게 끼친 긍정적 에너지는 참으로 크고 깊다. 백범이 일본 순사에게 고초를 겪고서 적어 놓은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저 사람은 우리나라를 빼앗으려고 저토록 애를 쓰는데 과연 나는 나라를 지키려고 얼마큼 애쓰고 있는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백범은 그런 사람이었다. 새삼 큰 감동을 받았다."

 

-이승만에 대한 생각 변화는?

 

"백범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조선적인 데서 찾았다면 우남은 세계 속에서 찾았다. 두 사람의 성패도 아마 거기서 갈렸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농림부장관을 지낸 임문환(任文桓·1907~1993)이란 사람의 회고록을 보다가 인상 깊은 구절을 만났다. 전쟁 중에 임문환이 장관으로 지명되자 국회에서는 그의 국회 방문을 거부했다. 총독부 관리로서 일한 적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때 이승만이 임문환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어차피 아라사(러시아)는 공산주의를 택했으니 망할 것이네. 문제는 일본이야. 일본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이른 시일 안에 다시 일어날 텐데 그때 일본과 맞서려면 당신처럼 일본을 잘 아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해. 국회에서 그럴수록 더 겸손하게 자세를 낮춰 열심히 일에만 집중하게.' 소련의 멸망을 이때부터 확신하고 있었던 거지. 일본의 재건 문제도 정확하게 짚어냈고. 이처럼 세계의 흐름을 보는 이승만의 안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이번에 새로 쓰는 '이승만과 김구'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20129월로 '이승만과 김구'101회를 맞았다. 그의 예정대로라면 1949년 백범이 암살될 때까지 아홉 번 정도만 쓰면 원고지 2만 장의 대장정은 일단 끝을 맺는다. 그는 매일 아침 '이 연재를 끝날 때까지만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연구실로 나온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선생님, 그런데 1949년부터 1965년까지 이승만의 생애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어허, 이 사람이"라며 기자의 등을 떠밀었다.

 

입력 : 2012.08.25 03:04 | 수정 : 2012.08.29 09:57 

 

알려왔습니다.

25~26일자 B2면 손세일씨 대답 중 "원래는 DJ가 문화부장관 약속했다가" 부분에 대해 손세일씨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전했을 뿐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확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