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사십대 - 고정희

풍월 사선암 2012. 10. 20. 09:33

 

사십대 -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유고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1992) 중에서

 

 

고정희 시인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 1975현대시학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창간 동인, 여성신문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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