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문정희 삶과 문학론

풍월 사선암 2012. 9. 21. 18:24

문정희 삶과 문학론

 

문정희는 전남 보성에 태어나 비교적 토호(土豪)’였던 아버지의 교육열 덕에 시골 초등학교 분교 4학년생 때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시골뜨기 소녀였지만 글짓기 대회에서 주는 상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 곁을 떠난 탓에 외로움이 컸던 소녀. 그때마다 일기를 썼다. 전남여중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이때 오빠와 합류했다. 오빠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 그해 가을, 아버지의 부음을 접했다. 열네살 소녀는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아버지의 관이 묻히는 장면을 바라보며 삶의 허무를 접했다.

 

진명여고 1학년 가을, 숙제로 휘갈겨낸 <형광등>이라는 시 한편이 이화여대 주최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서 입상했다. 이후 시소설희곡 등 여러 문학 장르를 넘나들며 대학 백일장에서 장원을 휩쓸었다. 고교 3학년 때까지 무려 스무 개가 넘는 문학상을 차지했다. 이 무렵 서정주 시인의 서문과 함께 고교생 최초의 <꽃숨>이라는 시집을 냈다. ‘꽃숨이란 꽃 피기 바로 직전터질 듯한 몽우리를 말한다.

 

이렇게 미당과 기막힌 인연을 맺은 소녀 문정희는 전국 대학가에 유명세를 탔다. 미당이 교수로 있던 동국대 콩쿠르 장원으로 입상한 후 특례입학 요청을 받았고, 동국대에 들어갔다. 쾌활한 성격에 연애, 멋 부리기, 잘난 체하기 등 오만할 정도로 열정적 젊음을 발산했다. 여학생 대표도 맡았다. 대학 4학년 초여름에 창간된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 <하늘>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등단 후 여성지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신혼생활은 남편의 하숙집에서 시작했다. 미당이 주례를 섰다. 문단의 신데렐라문정희는 단숨에 벌거숭이가 된 아줌마로 돌변했다. 두 달쯤 명성여중 야간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때야말로 세상 속으로 환원한 셈.

 

소녀 시절의 문학적 재능과 오만한 처녀 시절을 기억하는 한 선배가 원고 청탁을 했을 때, 그 앞에 만삭의 여자가 되어 나타났어요. 그때 그의 눈가에 일어났던 경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단칸방에서도 글쓰기 작업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불을 켜면 다른 사람이 깰까봐 기역자 모양의 군용 플래시를 켜고 그 불빛 아래서 원고지 칸을 채워갔다. 73년 첫 시집 <문정희 시집>을 냈다. 시에 대한 열정만은 어느 남성들의 가슴보다 뜨거웠다. 야간학교 흐릿한 불빛 아래서 깨알 같은 글씨로 시 쓰기를 반복했다. ‘대닢사라는 제목으로 시시극집 <새떼>를 펴낸 게 그 무렵이다. 데뷔 7년째에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와 함께 시극을 문예지에 자주 발표했고 손수 쓴 작품이 지금은 사라진 명동 예술극장 무대에 올려지곤 했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국립극장 의뢰로 창극 <구운몽>을 썼을 정도로 이 방면에도 일가견이 있다.

 

팔방미인적인 그의 면모 밑에는 폭넓은 경험에서 기인한 넓은 시야가 있다. 그는 뉴욕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유럽 11개국을 도는 긴 장정에 나서기도 했다. 방송사와 잡지사의 청탁으로 스리랑카, 터키, 러시아, 카리브해 등 수많은 나라를 동행 취재했다. 이런 여행을 통해 변방문화와 세계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족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깊이 했다. 이후 그는 12년마다 과감히 한번씩 여행길에 올랐다.

 

삶에 있어 여행계획 짜는 게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제 성질에 딱 맞아요. 살다보면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잖아요. 그럴 때 잠시 모국어로부터 해방되어 제 자신을 들여다보고 갈고 닦는 거죠. 그러고 돌아와 보면 깊어지고 넓어지는 느낌을 받아요. 집시와 날라리가 아니면 당당하고 호쾌한 그 무엇으로 득음하고 싶은 거죠. 벼루가 늘 젖어 있는 사람만이 일필휘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찬란한 자유혼, 자신감, 생명, 무한한 자연과 유쾌하게 사랑하면서 원고지 위에서 해결하는 길밖에 없잖아요. 이것은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된 거예요.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의 니트, 검정색 머플러, 은장신구, 샤넬 향수 NO 19과 같은 그의 세련된 패션적 기호들은 이런 해외에서의 떠돎을 통해 몸에 익힌 것이다. 3백여 편이 넘는 영화와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감상했던 뉴욕에서의 나날. 세계적 앵커우먼 바버라 월터스가 찬바람 쌩쌩 부는 모스크바 광장에서 안개를 맞으며 전세계인들에게 브리핑하던 그 환상적인 모습에 반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접한 것도 이 시기. 남녀간의 값싼 사랑타령이 아닌 남성과 여성 간 성()의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해 들어간 것이다. 남녀의 평등한 공존과 화해야말로 그가 꿈꾸는 것. 요즈음에도 후배 시인들을 만나면 빼놓지 않고 평등이라는 주제로 갑론을박을 한다. 사회 속 통념, 형식이란 껍데기를 깨기 위한 그이의 고행(?)은 참으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문정희.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랑시’, ‘연애시의 대가다. 그는 무엇보다 쉽게 읽히는 시를 쓴다. 그이 역시 한때는 깊은 시, 독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시를 제조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그것을 문학성이 어쩌고저쩌고 평하지만, 그는 최근 시란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밤낮없이 써대는 그런 시가 아니다. 항상 20여 편의 시가 컴퓨터에 내장돼 있다. 여행과 떠돎을 통해 시가 적당히 익을 즈음에 한편씩 꺼내 시를 완성한다. 시가 쉽다고 시 속의 사랑마저 가벼울 수는 없는 일. 그는 요즈음 연애시에는 몸만 있고 가슴이 없다고 꼬집는다. 부모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문한다. 사회적이고 민족적으로 확산된 사랑도 그 속에 있다.

 

그 역시 유신시대라는 엄혹(嚴酷)한 시기를 살았다. <새떼>에 수록된 3편의 시가 검열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살고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는 세상을 한탄했다. ‘그것은 무효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무효다.

이 침묵도 무효다.

 

강요당한 침묵의 밧줄.

, , 세상에

몸조차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없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다.

 

무효다.

이 봄은 무효다.

 

(<선언> 전문)

 

침묵하는 지식인을 나무라는 소리. 지성인으로서 이녁에 대한 자괴감, 비겁함에 대한 채찍.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이 터졌을 때 자궁파열로 죽은 유관순을 주제로 한 장편시집 <아우내의 새>를 출간하기도 할 만큼 사회의식이 두텁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80년대 먼 여행길에 올랐다. 외교관인 오빠의 도움과 [여성동아] 주최 불교국순례 동행 취재차 난생 처음 밟은 외국 땅. 여행을 통해 육체와 정신 속에 잠들어 있던 감성의 세포가 한꺼번에 눈뜨는 충격을 받았다.

 

한편으로 5월 광주를 떠나온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군인들이 학생들을 쏴 죽이는 나라에서 온 작가라는 주위의 시선, 그리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의 무게. 정신적 고통이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더 시퍼렇게 살아나는/이상한 무덤들 앞에서/흐르는 눈물조차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날>)라는 시인의 고백.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참으로 힘들었다. 너무 외로웠다. 이국의 황무지에서 익명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모습은 처절했다. 날마다 망연자실했다. 비로소 모국에 대한 진실로 깊은 의미와 사랑을 실감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진한사랑과 함께 강한 비판의 안목을 겸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맏며느리로서 1년에 일곱 차례의 제사를 감당해왔던 그이. 지금도 시어머니 병치레를 도맡고 있다. 억척스런 어머니상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보듬으면서 사랑시를 쓰는 그의 이면이야말로 진정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없다. 어쩌면 그건 정서적으로 그 시절/당산나무 건너 새로 지은 분교 (<책보와 가방>)의 시골뜨기 출신이기 때문일까. 작품 중에는 향토적 서정시들이 적잖다.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

바닷가 명교리에 가보리라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면

이 세상 끝을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

내 이름 끝에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

어린 시절 오줌을 싸서

소금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

내 수치와 슬픔 위에

은빛 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

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

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

차가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따라가서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파꽃길> 전문)

 

아름다운 명교리, 그것은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그리고 돌아가고픈 인간의 고향이리라. 떠날 적마다 데리고 떠나도/그대로 남은/죄같은 육자배기 보성 (<고향생각>)은 실컷 울어도좋을 원초적 고향이다. 그리움의 고향이다. 그래서 바람 속에 쑥부쟁이 냄새 나는/그리운 고향에 가서/오늘은 토란잎처럼 싱싱한 호미를 들고/진종일 흙을 파고 싶다/수줍음 타는 처녀가 되고 싶다. (<그리움 속으로>). '착하고 따스한 눈매를 가진’ ‘수줍음 타는 처녀겨드랑이에서 정직한 땀내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렇게 문시인은 사랑을 키워드로 시를 써왔다. 시인 이전에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일류대 졸업시키고 국제 변호사로 키웠다.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환갑을 향한 연륜의 그림자. 남부럽지 않은 자식농사에 이제는 더욱 홀가분한 집시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위대한 예술가는 언제나 열렬히 사랑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던가. 그의 20여권의 저작물 성과를 한마디로 갈무리하면 어느 유행가 제목처럼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지금도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단다.

 

한철 후면 어김없이/까맣게 시든 꽃 이련만 나도 이제 농담처럼/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고 노래한다.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며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칼이 아니라 불꽃 이니 희끗희끗 설핏설핏 살지 말고 이 한세상 한번쯤 가열차게 사랑해 보잔다. 이 한여름의 출렁이는 저 푸르디 푸른 젖가슴이 왈콱 터지도록 말이다.

 

[여성동아 연재-시인의 집필실을 찾아서(문정희 편) 박상건 시인]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 졸업. 1969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외 다수.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x-text/html; charset=euc-kr" hidden=true src="http://mediafile.paran.com/MEDIA_9498479/BLOG/200701/1169877279_팝송-탐존스 - 딜라일라.mp3" x-x-allowscriptaccess="sameDomain" allowNetworking="internal" sameDomain? invokeURLs="false" autostart="true" never? invokeURLS="false" volume="0" loop="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