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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무슬림형제단과 군부

풍월 사선암 2012. 7. 27. 22:32

무슬림형제단 창립 94년 만에 집권 정체성 모호 화전 양면 전략

이집트 무슬림형제단과 군부

이종택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중동정치

 

◀오른손에 코란 경전을 든 이집트 남성이 지난 618일 카이로 중심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무슬림형제단 소속 무함마드 무르시의 대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1928년 이집트 초등학교 교사인 하산 알 반나(1906~1949)무슬림형제단(이하 형제단으로 칭함)’을 만들었다. 이후 알 반나가 이끄는 형제단의 이슬람 원리주의(이슬람주의) 사상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랍·이슬람권에서 이 지역 사회를 순수한 이슬람으로 회복시키려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운동이 되었다. 알 반나의 형제단 사상은 이집트·알제리·튀니지·요르단·수단·아프가니스탄·팔레스타인·쿠웨이트·바레인에서 정치세력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형제단은 유럽과 북미에서 수많은 무슬림 청년 조직을 건립, 확장하면서 서구사회에서 이슬람의 가치와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단은 전 세계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난이나 대위기를 맞으면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신자 동원을 통해 문화체계인 이슬람을 정치체계인 이슬람으로 변화시켜 왔다. 이렇게 정치화된 이슬람을 원리주의라 한다.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는 세계관, 운용방식, 행위자의 특징에 따라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첫째는 이슬람 정치운동 그룹이다. 이들은 정치권력 획득을 목표로 국민국가(nation state) 수용, 기존의 헌법적 틀 운영, 폭력혁명보다는 개혁 선호, 보편적 민주규범을 선호한다. 이들의 특징은 정치활동 투사형이다. 이집트 형제단이 만든 정당인 자유정의당, 터키의 집권 정의개발당, 튀니지의 집권당 나흐다당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이슬람 무장투쟁 그룹이다. 이들은 이슬람을 경시하는 불경한 국내 정권에 대해 투쟁하는 그룹(‘아랍의 봄이전의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 ‘자마아 이슬라미야)외세 점령하에서 자국의 영토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그룹(팔레스타인의 집권 정치 무장 세력 하마스’, 레바논의 시아파 정치 세력 헤즈볼라), 그리고 서구의 이슬람 지역 패권에 대항하는 글로벌 테러그룹(알 카에다) 등 세 개로 나뉘며 이들의 특징적 행위자는 전사(戰士)이다.

 

형제단의 배경

 

형제단은 당시 오스만제국 치하에 있던 아랍국가들에 대한 서구제국주의와 그 문화의 침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폐했던 당시 사회의 참상들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이슬람의 전체성에 근거한 정치,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알 반나는 이슬람은 포괄적이며 완전무결한 종교로서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슬람만이 해결책이다(Islam is the Solution).’ 이것이 형제단의 이데올로기이다.

 

형제단의 이집트 국내 지부는 19294, 1940500, 19492000개에 달했으며 활동 멤버는 50만명, 동조자 역시 50여만명에 달했다. 194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 시리아에도 형제단이 조직되었다. 형제단은 1947년 민병대 수가 75000명에 달했다. 형제단의 규모와 조직의 확대는 알 반나에게 점차 정치적 야망을 갖게 하였다.

 

1936년 이후 형제단의 민병대는 영국군을 이집트에서 철수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19481차 중동전에서는 형제단 민병대원 수백 명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다. 1948년 이집트의 파룩 왕정은 형제단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본부와 지부를 폐쇄하는 한편, 모든 출판물을 압수하고 재산을 압류했다. 알 반나의 화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형제단 간 사이는 악화되었다. 이 같은 대립은 194812월 이집트 총리를 형제단 요원이 암살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부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형제단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형제단원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 작전에 들어갔으며 19492월 정부는 알 반나를 암살했다.

 

1952년 낫세르(초대 대통령)가 이끈 군사혁명 주체인 자유장교단은 형제단과 거사를 도모했고 이때 양측 간 연락장교가 안와르 사다트(2대 대통령)였다. 혁명 성공 이후 낫세르는 세속 민족주의를 추구했고 형제단은 이슬람주의 정권을 추구함으로써 양측 간 갈등은 1954년 낫세르 암살 기도로 이어졌다. 낫세르는 형제단 조직을 와해시켰고 지도자들은 구속되어 혹독한 감옥 생활을 했다. 형제단 이론가인 사이드 쿠툽은 수감 생활 중에 개에 물리는 고문, 얼음물에 들어가는 고문 등을 당하면서 낫세르 체제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드러냈다. 쿠툽은 사형되기 직전에 발간된 저서 이정표를 통해서 인간이 정한 법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무지시대라 규정하고, 신의 율법에 따라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소수 정예 엘리트에 의한 폭력 혁명을 주창하였다. 쿠툽은 출감 후 낫세르 정권 전복을 도모하다가 1965년 발각되어 1966년 사형당했다. 지금도 쿠툽은 이슬람 폭력혁명을 주창하는 과격주의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1950년대 후반 형제단은 해외로 도피하여 조직을 재정비하였고 낫세르정권과 불화를 겪은 사우디는 형제단에 자금을 지원하여 국내 지하조직과 해외조직 건설을 도왔다.

 

1970년 낫세르 사망 후 사다트 대통령은 정적인 공산당 제거를 위해 공산당과 숙적관계에 있던 형제단 재건을 묵인했다. 그는 형제단 수감자들을 석방했으며 형제단은 비폭력을 약속하고 대학 등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형제단의 이탈 그룹들

 

사다트는 나세르 정권을 물질주의와 무신론 정권으로 규정하고 탈나세르화 및 탈공산화에 형제단을 이용했다. 그러나 형제단의 이슬람법 시행 요구 등 정부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정권 안보에 위기를 느낀 사다트는 형제단을 탄압하였다. 사다트 정권은 형제단 발행지 다아와(선교)’ 출간 금지, 4만 교회와 소속 종교지도자에 대한 정부관리, 금요설교 내용 사전검열 등을 통해 형제단을 압박하였다.

 

형제단의 비폭력 개량주의에 반대하여 이슬람 지하드자마아 이슬라미야같은 몇몇 이탈 그룹이 생겨났고 이들은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이 그룹 중 일부는 후일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가담하였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간 평화조약을 체결한 사다트는 아랍 무슬림들의 배신자로 간주됐다. 그는 1981년 이슬람 지하드 조직원들에 의해 카이로 한복판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사열하다가 저격 살해되었고 이어 공군 사령관 출신의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었다. 무바라크는 30여년간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서 비상조치법을 선포하고 보안 사범들을 군사법정에 세움으로써 인권을 유린해왔다.

 

19481차 중동전을 시작으로 3차례 중동전을 치르면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이집트 군부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 후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했다. 새로 집권한 무바라크는 정권 안보를 다지기 위해서 군부에 군수산업, 관광회사, 교통회사, 크라이슬러 및 대우자동차 조립공장, 호텔, 화장품 회사 등 수많은 기업의 설립·운영을 허가했다. 군 수뇌부가 운영하는 이 기업들은 국가의 어떤 간섭이나 통제도 받지 않고 성역으로 간주되면서 30년 동안 운영되고 있으며 그 규모는 국내총생산(GDP)10~4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 이집트 군부가 법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부분이 바로 이 기업들에 대한 의회의 간섭 없는 영구적 기득권 유지다.

 

1981년 사다트 암살 이후 무바라크 정권하에서 형제단은 불법단체가 되었으나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는 허용되었다. 이때 형제단은 교수,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자체 건립한 병원, 학교, 사교클럽, 여러 회사 운영을 통해 많은 자선활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지진과 같은 재난 발생 시에 국가 구호기관보다 먼저 현장에 달려가는 단체가 형제단이다. 이를 통해 형제단은 지지기반을 강화했다. 2005년 비교적 자유가 허용된 선거운동을 통해 형제단은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20%를 차지하였다. 총선 결과에 놀란 무바라크 정권은 2006년부터 수백 명의 형제단원을 구속하고 이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한편 형제단의 금융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탄압을 시작했다.

 

2010년 총선에서 형제단은 전체 의석 508석 중 145명의 후보를 냈으나 선관위의 자격 시비로 문제가 되자 104명의 무소속 후보를 등록했다. 선거운동 중에 무바라크 정권은 형제단원 수백 명을 구속하고 자산을 압류했으며 산하 기업들을 폐쇄했다. 이로 인해 1차 투표에서 27명의 후보만이 2차 투표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투표에서 집권 국민당이 95%를 얻자 형제단은 선거 보이콧을 선언했다.

 

20111월 아랍의 봄 시민혁명에서 무바라크가 퇴진했고 그해 4월 형제단은 자유정의당을 창당하였다. 이때 형제단 지도부는 정치참여파와 선교, 자선파로 나눠졌다. 20121월 총선에서 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이 총 의석의 47%를 차지하여 외형적으로는 집권당이 되었고 6월 대선에서 형제단 출신 무르시가 승리하였다.

 

형제단은 정치운동으로 인해 80여년 이상 정부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이 죽고 수만 명이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러한 투쟁사를 통해 형제단은 나세르 대통령 때를 제외하고, 창건자 알 반나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생존과 목표달성을 위한 철저한 실용주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시민혁명과 형제단

 

형제단은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국민 저항을 표방했지만 2011125분노의 날조직에 가담하지 않고 일단 사태를 관망했으며 4.6청년단 등이 시민혁명을 주동했다. 사태가 주최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128일 금요일(이슬람의 공휴일) 형제단은 반정부 저항에 적극 가담하였다. 형제단은 훈련된 조직을 동원하여 병참 지원, 조직 동원, 참여를 맡았다. 형제단은 국내 어느 정치 단체보다도 조직동원과 자원봉사 능력이 탁월하다. 형제단은 빈자 구호, 사회봉사, 투명한 운영을 통해 서민들과 일부 지식층의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이 창당한 이집트 자유정의당 소속 여성 의원들이 지난 1월 무바라크 축출 이후 첫 개원한 하원 회의장에 앉아 있다.

 

그러나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 후 곧 형제단과 4.6청년단 간 갈등이 일어났다. 정권 획득의 기회를 잡은 형제단은 군부 주도의 개헌 국민투표에 동의했고 자유주의 4.6청년단 세력은 투표 참여를 거부했으나 77%의 투표 참여로 319일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혁명 이후 형제단은 4.6청년단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소장파와 반대파 간 의견 충돌이 나서 아불 파투흐 등 지도급 인사들이 형제단을 탈퇴했다.

 

형제단은 2007년 처음 공표한 정강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규정하는 완전한 방법론으로서 이슬람을 만방에 전파하고 심화시키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이슬람 방법론은 제한된 능력을 가진 국가를 개혁하여 강력한 이슬람국가로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정강은 입법과 행정기관에 대해 자문을 하는 울라마(종교학자)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규정했다. 정강은 이어 여성과 콥트 기독교도를 대통령직과 같은 국가의 주요 직책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여성 권리와 소수종파에 대한 차별을 드러냈다. 그러나 2011년 형제단은 자유정의당 창당 이후 이러한 정강을 수정하고 콥트 기독교 학자를 정당의 부대표로 임명하기도 했다. 또한 형제단이 만든 자유정의당 소속 무르시 신임 이집트 대통령은 대선 출마 중에 당의 정강과는 달리 모든 시민의 평등권을 부르짖으며 지지를 호소했다.

 

형제단은 세 가지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우선, 형제단은 대담한 권력 추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혁명 후 형제단은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1만 후보로 내세우겠다고 발표했으나 약속을 어기고 2012년 총선에서 결국 47%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또한 형제단은 혁명 초부터 대선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수차례 공언했으나 이번 6월 대선에서 무르시를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켰다. 둘째, 어느 정치세력이 형제단의 동맹세력이고 적대세력인가? 형제단은 한때는 군부에 협력하고 한때는 군부 퇴진을 주장하는 4.6청년단에 협력하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합종연횡하고 있다. 결국 두 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유리한 쪽을 택한다. 이것이 형제단의 생존전략인 실용주의다. 셋째, 형제단은 온건주의 세력인가 아니면 과격주의 세력인가? 형제단은 서방세계에 대해 온건주의 세력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서방 정부, 학자, 연구기관, 언론인 모두 형제단의 폭력 거부, 선거 참여 등의 예를 들면서 형제단을 온건주의 세력이라고 말한다. 형제단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부정, 이슬람법(샤리아) 적용 강화 등을 주장하기도 하고 대선에서 평화조약 준수, 소수종파 차별금지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유대계 학자들은 형제단이 정권 획득을 위해 과격주의자의 발톱을 꼭꼭 숨기고 있다고 말한다.

 

군부대 무바라크 추동자들의 전략은

 

이집트 시민혁명은 군 출신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군경, 행정부관료 등 정부기관의 무바라크 추종자들을 숙청하지 못했다. 이것은 군최고회의(SCAF·이하 군부라 칭함)가 무바라크를 퇴진시킨 후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숙청을 두려워하는 국가기관의 구시대 인사들을 남겨둔 때문이다. 경제계 역시 수십 년간 군부와 유착관계에 있었기에 이러한 기득권을 이슬람 정권에 포기하기를 거부한다.

 

군부의 권력유지 전략은 형제단과 유사하다. 시민혁명 당시 군은 국민 희생을 줄인다며 시위대 편에 섰다. 무바라크를 퇴진시킨 군은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의회를 구성하여 20126월 말 이전에 권력을 완전 이양하겠다고 수차례 약속했다. 문민정부 탄생을 위해 형제단은 군부와 협력했고 4.6청년단은 음모론을 주장하면서 군부 퇴진을 요구해 왔다.

 

군부는 지난 614일 헌법재판소를 이용해 2012년 총선에서 구성된 의회에 대해 해산 판결을 내렸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를 무효화한 것이다. 한편 군부는 독단적으로 수정헌법선언을 통해 대통령의 군 통수권 행사를 제한하여 대통령의 전쟁선포권이 군부의 승인을 얻도록 했다. 또한 불과 얼마 전 폐지한 악법인 비상조치법의 일부를 부활함으로써 군부가 체포영장 없이 정적을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넘길 수 있도록 하였으나 대선 결과 발표 직후 법원은 이를 무효 판결했다. 문서쿠데타로 명명되는 군부의 조치들은 무르시 신임 대통령의 권한을 제약, 군부의 기득권이 위협받을 수 있는 여지를 줄이겠다는 계산에서 나왔다.

 

최근 사법부와 군부에 의해 취해진 일련의 조치를 통해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정치적 역할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군부는 입법 역할을 되찾았다. 또한 군부는 시민 감시나 의회의 국정감사로부터 자유로운 군 자치권을 선언한 셈이다. 군부는 이미 합의에 의해 구성된 100인 제헌위원회를 해산함으로써 의회를 배제하고 새로운 헌법초안 작성을 주도하려 하고 있다. 군부는 전쟁선포 거부권 행사와 국방 위원회같은 신설 국가 안보기구를 제도화하여 군 지위를 강화하였다.

 

형제단·군부 타협으로 가나

 

형제단은 헌법재판소의 의회해산명령과 군부의 수정헌법선언에 대한 무효화 투쟁을 위해 국민에게 100만 금요집회를 호소하면서 군부를 압박하고 있으나 4.6청년단 세력 등 재야세력과의 회동에서 군부와 대립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4.6청년단 등 재야세력은 카리스마를 가진 투사형 지도자를 갖지 못하고 있고 조직 및 동원능력도 약하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고 있다.

 

형제단은 군부와의 협상에서 의회해산과 수정헌법선언을 수용하는 대신 무르시를 대통령으로 공표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형제단의 협상 태도는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십 년간의 탄압 속에서 성장한 형제단은 이집트 군부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잡으려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예전에 대다수의 대선 예비 후보자들 역시 민주주의의 점진적 발전을 위해 군부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다. 그만큼 군부의 지위는 요지부동한 것이다.

 

형제단과 군부 역시 폭력적인 대립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립은 자칫 양측의 이익을 크게 해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제단은 과거처럼 사법부가 형제단을 불법정치 단체로 판결하여 활동을 금지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 과거 수많은 아픈 기억들 때문일 것이다. 군부의 초법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형제단은 군부와의 타협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집트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헌법상의 애매함으로 해석에 따라 정치세력 간 긴장이 재발할 수 있다. 헌법상의 대통령 역할 논쟁, 군부의 헌법기초위 구성과 해체, 입법권 문제 등 법률 논쟁이다. 둘째, 집권 형제단 이슬람주의정권 내부의 패권 경쟁이 예상된다. 형제단 내부의 보수파와 소장파, 그리고 형제단과 이탈파 간 패권경쟁이 예상된다. 셋째, 사회혼란이 가중되면 치안유지와 경제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 가능성도 존재한다. 넷째, 군부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시민혁명지원, 공명선거, 권력이양 등에 협력했다. 군부의 기득권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시 국가의 정치안정, 치안유지, 경제 활성화 등 당면과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대립보다 실용주의 노선 추구

 

대통령 무르시의 당면과제는 치안유지, 해외투자 유치와 관광산업 활성화를 통한 경제 살리기이다. 이를 위해서 군부의 협력과, 소통과 포용을 통한 국민통합이 필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지원이 절실하다. 국내 정치·경제 안정이 최우선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문제와 대서방 정책은 과거 형제단의 반이스라엘, 반미 주장과는 정반대로 이들의 협력이 절실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주의 정권은 대내외 정책에서 대립이 아닌 협상을 통한 정치적 실용주의 노선을 적극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무르시는 국민의 평등권, 기회균등, 군부와 사법부 및 행정부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국민 대화합을 통해, 그리고 서방과의 협력증진을 통해서 국가 안정을 앞당길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군부와의 계속되는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이집트 역시 터키식 민주화 모델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터키 군부는 거의 90여년간 서구세속주의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이슬람주의를 세속화하는 데 성공했다. 터키 민주주의의 발전은 군부의 성숙함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집트가 터키식 민주주의 모델을 향해 한발 다가가기 위해서는 군부와의 상생이 필요하고 형제단은 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