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신동호가 만난사람]거리로 나간 뉴스 앵커 최일구 MBC 부국장

풍월 사선암 2012. 6. 21. 07:30

[신동호가 만난사람]거리로 나간 뉴스 앵커 최일구 MBC 부국장

2012 06/26주간경향 981

 

"회사 내부에선 풀 방법 없어 국회에서 해결해야

 

TV 화면에서 사라진 앵커가 길거리에서 발견됐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는 서울 광화문광장 입구에서 말이 아니라 몸으로 앵커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해고기자 살려내라!” 지난 64MBC기자회의 해고기자 복직을 요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에 첫 시위자로 나선 최일구 기자 이야기다.

 

이렇게 미안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하기는 처음이다. 지난 613일 오전 1145, 그는 서울 여의도 MBC 본사 로비에 있었다. 50여명이 앞에 피켓을 놓고 연좌한 대열의 중간에 앉아 있었다. ‘오라누이연합이라나.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20년차 이상 선배 그룹이다.

 

이날 현재 파업 136일째. 8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고 있다. 4명이 해고되고 40여명이 정직 이상의 중징계, 69명이 대기발령을 받았다. 일선 기자·PD·아나운서는 물론 보직 간부에서 정년퇴직을 앞둔 최고참 선배들까지 합류해 파업의 강도를 높이고, 회사는 대량 징계로 맞대응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최 기자도 연거푸 징계 폭탄을 맞았다. 지난 223일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 직을 내려놓고 파업에 참여한 그는 35일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회사는 이미 징계한 그를 지난 610일 다시 대기발령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MBC 앞마당 분수대 옆 벤치에 그와 마주앉았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심란할 텐데 괴롭혀서 미안혀.

하하하.(크게 웃음) 반은 고맙고 반은 거시기한 거지.”

그는 인터뷰에 응한 심정을 최일구답게이렇게 표현했다. 같은 시기에 함께 기자의 길로 들어선 그와 내가 TV 화면이나 지면이 아닌 맨얼굴로 다시 대면한 것은 26년 만이다. 하지만 수습시절 함께 연수받은 이후 처음 만난 감회에 느긋하게 젖어 있을 겨를이 없었다.

 

아까 로비에서 농성하는 모습을 보니 처연하더군요.

매일 11시에 모여요. 파업 50일쯤 됐을 때부터 20년차 이상이 하루 한 시간씩 그렇게 해요. 처음에 어버이연합을 빗대서 오라비연합인가? 그렇게 부르다가 여자도 있으니까 오라누이연합이라고.(웃음)”

 

50여명 되던데, 20년차 이상이 그렇게 많이 파업에 참여한 건가요.

많을 때는 100명도 돼요. 아까 내 옆에 앉아 있던 분들 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선배예요. 처음에는 공정방송하자는 걸로 (파업을) 시작했는데, 140일 가까이 되니까 공정 대 비공정의 싸움에 더해서 양심 대 비양심의 싸움이 되어간단 말이죠. 옛날 파업할 때는 부장 이상은 안 내려와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희한한 게 선배·간부까지 참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난다는 거예요. 지난주(65)에 국장급 15명이 또 내려왔잖아요.”

 

정직 징계 중인데 어떻게 해서 또 대기발령을 받았는지.

아이고 몰라요. 노조 특보 보니까 부당한 것이라고 해요. 이미 징계 먹은 사람한테 또 대기발령이라는 게. 대기발령이라는 건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일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래서 인사부 소속으로 만들어 놓는 것 아니에요? 근데 대기발령을 하면 오히려 월급을 줘야 된다나. 뭐가 뭔지 모르겠고, 또 워낙 남발하다 보니까 무덤덤하더라고. 이 나이에 큰 대()자 대기자(大記者)가 돼도 시원찮을 판에 대기하라는 대기자(待機者)가 돼버리니 참.”

 

언론사에서 부장·국장급과 보직간부의 파업 동참은 매우 이례적이다. 부장으로 승진하면 자동으로 노조에서 탈퇴 처리돼 조합원 자격도 상실한다. 비록 그렇더라도 재가입해서 조합원으로 복귀가 가능하다는 걸 이번 MBC 파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동안 언론사 파업이 많았지만 이렇게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건 처음이잖아요. 선배로서 참 갑갑하겠습니다.

총파업에 들어간 첫 주말에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면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지는 거예요. 30분짜리 뉴스가 7분으로 줄어들고 그것도 혼자 앉아서 하니까. 점심 먹으러 갈 때 로비에 후배들 눈이 반짝반짝하면서 나를 쳐다보고. 그래서 안 되겠다, 나도 동참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러고 나서 한 달인가 더 있다가 내려오긴 했는데 그 사이에 2주나 뉴스 진행을 못 했어요. 첫 주는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눈가를 가리키며) 여기 찢어져서 꿰매느라고, 두 번째 주는 화주를 먹고 목이 데어서.(웃음) 그랬더니 너, 일부러 방송 안 하려고 자해하러 다니는 것 아니냐고.(웃음)”

 

그래도 앵커 자리를 내려놓고 파업 참여를 결단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앵커라는 걸 또 1년 반 정도 했는데, 주말 뉴스 연성화 지적을 많이 하잖아요. 나 스스로도 그걸 알아요. 중요한 현안이 있어서 정리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은 아이템도 안 다뤄요. 편집회의 때 짧게라도 리포트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면 말만 하다가 끝나는 거예요. 결국 그런 아이템이 딴 데는 나가고 우리만 안 나가는.”

 

원칙적으로 앵커는 (뉴스 선택이나 구성의) 권한이 없는 건가요.

교과서에서 배우는 미국식 앵커라고 하면 다 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경우는 잘 없어요. 편집이나 아이템 부분은 국장하고 담당 데스크들이 모여서 하는 거니까 나는 의견 정도로 말하는 거죠. 내가 거기서 악악대면 서로 얼굴 붉히게 되잖아요. 일주일에 이틀 하는데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뭐 그러면서 살아왔던 거죠. 그런 게 내가 파업에 참여한 이유였어요. 선배로서, 부국장으로서, 주말 앵커로서 조금 더 논의과정에 치열하게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 그런 우리 보도국 집행부를 보는 후배들의 차가운 인식, 그리고 선배가 (MBC) 지켜달라고 바라보는 듯한 그들의 눈, 이런 걸 외면할 수 없었던 거죠.”

 

지난 64일 광화문 1인시위를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기자라는 게 맨 남 억울한 것, 안 좋은 것, 이런 거 취재하러 다녔지 스스로 취재원이 돼본다는 생각을 안 하잖아요. 거기 서니까 야, 세상에는 말도 못하고 자기 속내도 못 털어놓고 억울하게 사는 사람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 MBC 기자만이 아니라 시민단체에서 나온 사람과 산재 피해자도 피케팅을 하고 있었어요. 심정이 착잡하더라고요.”

 

그는 그 자리에 세 번 섰다고 한다. 19805서울의 봄에 경희대에서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에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19876월항쟁 때는 중부경찰서 출입기자로서 마스크를 쓰고 광화문 시위현장을 취재했다.

 

“50이 넘어서 또 이 자리에 와서 시위를 하면서 이 나라, 참 한심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고. 1980년 대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는 거야. 절차적 민주주의 발전만 있었지 실질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요. 지랄탄만 안 쏠 뿐이지 1987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참 기구하다. 19876월항쟁 당시 최 기자가 탄 MBC 취재차량이 시위대에게 공격당한 적 있다. 이날 그는 평온해진 명동이라는 기사를 리포트하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현장기자 몇 명이 모여 성명서를 내고 제작거부에 들어간 것이 6·29선언 후 MBC 보도국에 방송민주화추진협의회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됐다. 지금의 MBC 노동조합은 이것이 모태가 돼서 그해 11월에 결성됐다.

 

그렇게 해서 노조가 만들어지고 나중에 노조 부위원장도 하고 지금 부국장이 돼서도 파업을 하고 있으니.(웃음) 굴곡 많았던 MBC 역사에서 이번 파업사태가 특별히 다른 점은 어떤 걸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의 대오가 단단해지고 있다는 거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처음에는 공정 대 비공정으로 출발을 한 것이고 그 기조는 지금도 유지가 되고 있지만, 때만 되면 회사 쪽에서 기름을 부어주기 때문이에요. 느슨해질 때면 정직 때려주지, 누구 해고시켜주지, 대기발령 내지. 양심과 비양심이라는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든 거예요. 이 파업이 언젠가 끝나겠지만 끝나고 나서도 조직이 어떻게 잘 갈지. 과거에는 파업을 끝내고 동참하지 않은 사람과 벽을 만들지 말자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이번 경우는 후배들한테 그런 얘기조차도 못 하거든요. 시용 기자와 계약직 기자, 이 사람들 처리는 또 어떻게 할 거냐고요. 큰일입니다. 파업이 끝나야 고민할 문제지만 그런 뒤처리 부분도 다른 때 파업하고 다른 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회사와 노조가 치킨게임을 벌이는 형국입니다.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MBC라는 회사는 국가 자산을 쓰는 공중파 방송이기 때문에 공영방송이고 국민이 주인입니다. 현재로서는 내부에서 풀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주인인 국민이 풀어줄 수밖에 없다고 저는 봅니다. 다시 말하면 국민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권에서 풀어줘야 한다는 거죠. 정치권에 기대는 것 자체가 정치파업이라는 걸 말해준다고 얘기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국민의 자산을 팽개쳐놓고 있을 거냐고요. 정치파업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하루 빨리 국회를 열어서 정치권이 해결해줬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시청자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싶습니까.

너무 죄송한 거죠. 하루 한 시라도 빨리 정상화돼서 진짜로 제대로 된 뉴스데스크를 만들어 보여드리고 싶은 게 저희 보도국 기자들의 생각이죠. PD들은 더 분발해서 예능이나 교양 부분에서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려고 할 것이고요. 시청자분들께서 기왕 이렇게 된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정상화되는 대로 복귀를 해서 제대로 된 방송 콘텐츠를 만들어서 송출하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독특한 뉴스 진행으로 최일구 방식’ ‘최일구 효과’ ‘최일구 어록과 같은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는데, 그런 방식과 어록이 어디서 나왔나요.

앵커 멘트를 쓰면서 세 가지 정도의 콘셉트를 나름대로 정했어요. 신문은 문어체고 방송은 구어체라고 하지만 정작 뉴스 진행자가 시청자와 말하듯이 하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전부 ‘~했습니다라고 군대식으로 딱딱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우리가 친구건 아버지건 제자건 말할 때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자도 넣어보고 대화하듯이, 시청자가 카메라 뒤에 바로 앉아 있다는 그런 개념이죠.”

 

두 번째는 뉴스가 팩트를 전하는 것이지만 수용자 입장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이를테면 정치적 색깔이나 지역적 정서에 따라 같은 뉴스라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뉴스만 있는 게 아니다. 미담 기사, 선행 기사, 재미있는 뉴스, 황당한 뉴스도 있다. 첨예한 정치적 이슈 말고 마지막 부분의 이런 한두 개 뉴스는 시청자와 공감할 수 있는 멘트를 해보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세 번째는 유머를 써보자는 것이죠. 대한민국 헌법에 뉴스 진행자는 유머나 개그를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잖아요. 요즘 인터넷 시대에 방송 뉴스는 사실 다 아는 거잖아요. 인터넷에 더 먼저 나니까. 재미있게 해도 전혀 지장이 없는, 한두 개 정도는 유머를 써보자, 이런 거죠.”

 

그런 최일구식 유머의 출처가 어딥니까.

편의점 같은 데 가면 5000원짜리 유머 내비게이션, 이런 거 팔아요. 그런 거 평소에 보고 기억을 해놓는 거요. 작년에 가수 가 군대를 간다는 거야. 유머 책에서 읽은 게 기억이 났어요. ‘비가 LA에 공연하러 간다를 네 글자로 줄이면 LA갈비래.(웃음) 비의 매니저 이름을 네 글자로 줄이면 비만관리. 뭐 이런 게 있었어요. ? 비가 군대 가? LA갈비가 아니고 군대갈비네? 이런 멘트를 생각해내서 했었죠. 그런 거야 부드럽게 또는 재미있게 한다고 해서 여·야가 엇갈리는 사안도 아닌 거잖아요. 어떤 정치적 현안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그랬다가는 큰일나는 거죠,”

 

최 기자는 중학교 시절부터 소망했던 기자의 꿈을 MBC에 입사하면서 이뤘다. 방송기자로서 당연히 꿈꾸는 앵커의 꿈도 이뤘다. 이루어진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그는 지금 어떤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했다.

 

기자와 앵커를 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유명인이 됐는데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 같습니까.

, 꿈 얘기군요. 나보고 정치할 생각 없냐고 많이 얘기하는데 그건 정말 생각 없어요. ‘로케트를 녹여라는 내 자작곡이 있어요. 은퇴 후에 가수가 돼서 싱글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고 싶어요. 못 쓰는 글이지만 열심히 책도 읽고 해서 백발이 됐을 때 신인 작가로 살고 싶고요. 그게 내 새로운 꿈이죠.”

 

<·신동호 선임기자 사진·김석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