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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탄생 250주년… 실학기행을 떠나다

풍월 사선암 2012. 6. 15. 23:14

부럽구나 저 기러기 흑산도·강진에서 끝내 재회 못한 형제

 

다산 탄생 250주년 실학기행을 떠나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의 동쪽 언덕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에서 바라본 강진만 풍경. 다산 정약용은 흑산도에 있는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서울에서 전라남도 강진까지. 잘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도 네 시간이 넘는 거리다. 1801(순조 1) 11,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과 그의 둘째 형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은 통곡하며 이 길을 지났다.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돼 셋째 정약종(1760~1801)은 처형을 당하고,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열흘 넘게 걸려 전남 나주에 도착한 형제는 밤남정이라는 주막집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다산은 시 밤남정 주막집의 이별에서 이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없어/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전남 강진과 흑산도는 실학자 정약용·약전 형제의 유배살이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땅이다. 지난 8~9, 다산연구소와 관훈클럽이 주최한 실학 기행을 따라 형제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올해는 특히 개혁사상가였던 다산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 강진과 흑산도에는 다산의 삶과 철학을 되새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건너고 싶어도 배와 노 없으니=먼저 손암의 유배지인 흑산도로 향했다. 목포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 당시로는 배로 보름이 걸려야 도착하는 오지였다. 동생과 헤어져 흑산도로 떠나온 손암은 15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다 죽음을 맞았다. 다산은 형이 그리울 때면 다산초당의 높은 언덕 위에 올라 부럽구나 저 물오리와 기러기/창파를 차고 잘도 나는구나’(‘가을날 약전 형님을 생각하며)라고 읊었다.

 

손암이 머문 곳은 흑산도의 외딴마을 사리(沙里)였다. 비록 귀양 온 몸이었지만, 손암은 이 섬을 사랑했다. 주변 어부들의 힘을 빌어 흑산도 연해 어류와 식물들의 이름을 정리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그가 섬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는 복성재 인근에는 현재 유배문화공원이 조성 중이다. 흑산도의 비바람 때문에 초가지붕이 자주 날아가, 서당의 지붕을 콘크리트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산 철학이 완성되다=형을 떠나 보낸 아우는 강진에 도착해 18년간의 귀양생활을 시작한다. 유배 초기, 대역죄인인 그를 도우려는 사람이 없어 동네 주막집 단칸방에서 4년여를 살았다. 머물던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중후하게라는 원칙을 정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은 이곳에서 서민들을 직접 만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실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805년 지은 송별이라는 시에서 다산은 우리나라 어찌하여 어진 사람 벼슬길 좁아/수많은 장부들 움츠러들어야 하나(중략)/평안도 함경도 사람들 늘 허리 머리 숙이고/서민들은 죄다 통곡을 하네라며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다. 2007년 강진군이 복원한 사의재에는 작은 주막이 영업 중이다.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잠시 숨을 돌리는 곳이다.

 

인근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다산이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난 1818년까지 10여 년을 생활한 곳이다. 그는 방 안에 책 1000여 권을 쌓아놓고 연구·저술 작업에 매진했다. 1818년 완성한 경세유표서문에서 다산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공무원들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는 목민심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흠흠신서를 완성했다. 산중에 유배된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명쾌한 대안은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큰 울림을 준다.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다산=9일 오후 늦게 찾은 다산초당에서 어린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산의 외동딸이 시집 간 윤씨 가문의 후손 윤동옥(55)씨가 초당의 구석방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다산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충실한 나날을 보냈지만,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만은 숨길 수 없었던 듯 하다.

 

귀양간 아버지 때문에 벼슬길에 나설 수 없는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라며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으라고 충고했다. 1812년 외동딸이 시집을 가자 부인 홍씨가 보낸 헌 치마를 찢어 그림을 그리고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라고 축복했다.

 

굴곡 많았던 삶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인생의 비극이었던 유배시절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했다. 실학연구소 박석무 소장은 다산은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성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벼슬길을 차단 당하고, 온갖 수모와 고난을 무릅쓰고, 오히려 이제 겨를을 얻었다고 즐거워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던 그의 치열한 삶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입력 2012.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