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등산,여행

2011 안나푸르나 남벽원정대 생존자 이한구 대원 인터뷰 / 우리대장, 박영석

풍월 사선암 2012. 6. 16. 00:12

2011 안나푸르나 남벽원정대 생존자 이한구 대원 인터뷰

 

우리대장, 박영석

 

", 이렇게 힘든데 왜 가? 힘드니까, 힘드니까 가지"

 

박영석 대장은 하나의 고유명사다. 우리가 그를 알았을 때 그는 이미 대장이었다. 가장 높은 땅 에베레스트에 올랐고, 세상의 끝 남극과 북극을 앞장 서 다녀왔다. 히말라야 14개 봉우리와 3개의 극점, 7대륙 최고봉에 발자국을 남긴 단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산악 그랜드슬램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난 1018일 안나푸르나 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던 박영석 대장이 신동민 대원, 강기석 대원과 함께 실종됐다. 박영석 대장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8천 미터의 안나푸르나 영하 20도의 설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탐험이 직업인 사람이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함을 업으로 삼는 탐험가. 내딛는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가봐야 안다. 온몸으로 길을 내는 이들은 때로 죽음으로 그 위험을 알린다. 20111018, 탐험가 박영석(48)이 안나푸르나에서 사라졌다. 그는 남쪽 벽에 길을 내던 중이었다.

 

朴英碩(박영석)이라는 큰 봉우리

 

이한구 씨(42)는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팀의 대원이다. 사진가인 그는 팀 내에서 기록을 담당했다. 이번 등반에서 다섯 명의 대원 중 셋을 잃었다. 식자재를 담당했던 신동민(37), 통신장비를 담당했던 강기석(33) 그리고 대장 박영석. 그를 만나면 세 가지를 묻고 싶었다. 무엇이 산악인들로 하여금 생명을 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가, 세 사람의 생명을 잃은 지금 산이 밉지는 않은가, 마지막으로 박영석 대장은 어떤 사람이었나.

 

리더였죠. 대장이었고.”

 

그는 세 번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연은 없었다. 고산 원정을 다녀오고 나면 팀은 해체되거나 소원해지는 게 보통이다. 극한의 상황은 서로의 맨 얼굴을 보게 한다. 그러나 박영석이 대장으로 있는 팀은 달랐다. 산에서 내려와 있는 동안도 그들은 팀이었다. 산만큼이나 서로를 그리워했다. 다시 안나푸르나에 오를 때도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자.” 한마디였다. 그러면 각자 알아서 몸을 만들고 짐을 꾸렸다.

 

제가 지금 여기(서울)에 있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전화를 걸 데가 없어요. 술 마시자고 하고 싶은데, 부를 사람이 없어요.”

 

그들은 여기에 없다. 안나푸르나 남벽 6,300m 지점(하강 지점)5,200m(ABC-전진 베이스캠프) 사이, 어딘가에 있다. 안나푸르나는 네팔 히말라야 산맥의 중간부에 위치한 8,091m의 봉우리다. 원정대는 그중 험준한 남벽에 길을 내던 중이었다. 그날도 많은 이들이 안나푸르나를 찾았다. 네팔 공항에서부터 베이스캠프까지 세계 각국에서 온 원정팀으로 북적였다. 길은 베이스캠프에서 나뉘었다. 대부분은 노멀 루트(normal route, 이미 발견되어 등반용으로 닦인 길)로 간다. 박영석팀은 외따로이 다른 길을 갔다. ‘코리아 신()루트를 내기 위해서. 아직, 세상에 없는 길을 그것도 알파인스타일등반(포터, 셰를파, 산소, 고정캠프, 고정로프없이 6인이하의 대원으로 자력 정상등정)으로 말이다.

 

“(사고가 있던 날) 오전 3시에 (등반을) 떠났어요. 다섯 명이 같이 걸었어요. 저랑 영석이 형이 제일 뒤에 있었고요. 제가 물었어요. ‘, 이렇게 힘든데 왜 가?’ 형이 그랬어요. ‘힘드니까, 힘드니까 가지.’ 저는 지금도 그 말이 자꾸 생각이 나요.”

 

박영석팀이 내려던 길은 90도가 넘는 경사가 있을 정도로 산세가 가팔랐다. 더구나 기상이 시시각각 변했다. 사고가 있던 날은 급작스레 안개가 몰려왔다. 안개가 위험한 건 낙석이든 산사태든 어디에서 무엇이 오는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안개가 꼈던 그날도 대원들이 있던 곳 좌, 우로 번갈아 산사태가 있었다.

 

출발할 때는 날씨가 좋았어요. 저는 ABC(전진 베이스캠프)에서 기상을 체크하고 운행팀에 알렸죠. 예보상으로는 좋다고 나왔어요. 영석이 형이 무전으로, ‘그럼 이건 뭔가했어요. 12시가 지나자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어요. 저는 내려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가 없었어요. 대장이 있으니까. 그런데 대장이 아주 현명하게 판단을 했어요. 철수하기로 한 거죠.”

 

박 대장은 노련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팀원들과 하강을 결정했다. 여러 번 산사태가 났다. 무전으로 내려오다 죽을 뻔했다고 했다. 위기를 넘기고 숨을 돌리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 득달같이 찾으러 갔다. 산세는 하루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산사태로 거칠어진 두 면 사이에 쌓인 눈이 평원을 이뤘다. 세 사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장갑 한 짝도, 아무 흔적도 없이.

 

무전이 끊기고, 여러 번 다시 무전을 보냈어요. 답이 없어서 밖으로 나갔어요. 오는 길을 계속 지켜봤어요. 계속 보다 보면 멀리서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드디어 왔구나.’ 하면 이내 사라졌어요. 멀리서 세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어요. 근데 아니었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안 돌아왔어요.”

 

이한구 대원과 김동영 대원이 사라진 대원들을 찾으러 갔다. 5,800m 지점에서 팀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로프가 발견됐다. 임시 텐트가 있던 지점은 5,670m. 불과 130m 거리였다. 예상대로였다. 그는 가슴을 쳤다. “대장은 현명하게 판단했고, 무사히 하강했다. 그런데 다 와서, 다 와서 이런 일을 당한 게 너무.” 억울했다. 남겨진 다른 한 명, 김동영 대원은 막내 강기석 대원과 친구다. 이번이 첫 등반이었다. 수색을 하던 김동영 대원 옆으로 또 한 번의 큰 눈사태가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대원을 더 잃어서는 안 됐다. 이한구 대원은 본국에 구조대를 요청했다.

 

◀ 안나푸르나 남벽원정대 생존자 이한구 대원,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산사내들의 우정 嶽友愛(악우애)

 

생생해요. 산에 오를 때 영석이 형이 손을 이렇게 흔들었어요. ()동민이가 앞장섰고, ()기석이가 따라갔어요. 기석이는 좀 힘들어 보였어요. 그래도 잘 따라붙었죠. 동민이는 체력이 좋은 친구예요. 키도 크고요. 7m 암벽도 거뜬히 올라가요. 기석이는 상대적으로 체력은 약하지만 기술이 좋아요. 100의 힘이 필요할 때도 몸을 잘 쓰기 때문에 70 정도로 해내요. 그리고 기석이는말을 참 예쁘게 하는 친구였어요.”

 

()사내들의 캠프생활을 잠시 훔쳐본 적이 있다. 113일 있었던 세 사람의 영결식장에서였다. ‘산악인의 장이 치러진 이날, 영상 속에는 눈부신 설원 위 활기차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있었다. 강기석 대원은 오랜만에 머리를 감아 상쾌한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싱긋 웃었다. 박영석 대장은 대원들에게 줄 달고나를 만드느라 버너 위에서 설탕을 녹이고 있었다. 제빵사 자격증이 있는 신동민 대원은 산 속에서 생일을 맞은 대장을 위해 직접 케이크를 만들었다. 불과, 며칠 전의 모습이다. 곳곳에서 오열이 터져나왔다.

 

형은 타고난 요리사예요. 형이 해주는 음식은 다 맛있어요. 등반 갈 때 짐을 싸면 무게를 줄이는 게 제일 중요해요. 지고 올라가야 하니까요. 사탕 세 알도 가져갈지 말지를 고민해요. 형은 그 산 속에서도 못하는 음식이 없어요. 어떻게든 재료를 준비해와요. 말린 해삼을 싸와서 짬뽕을 끓여줘요. 캠프에선 매콤하고 국물 있는 요리가 인기가 좋거든요. 형이 해주던 김치말이 국수는 아마 못 잊을 거예요.”

 

◀ 박영석 대장의 부인 홍경희씨와 아들 박성우군.

 

온종일 장비를 메고 산에 오르느라 지쳤을 대원들에게 따뜻한 저녁을 해 먹이는 건 박영석 대장의 기쁨이었다. 어릴 적 꿈이 주방장이었을 정도로 요리에 재능이 있기도 했지만 오늘 먹는 이 한 끼의 식사는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잘 먹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이 한 걸음 차이임을 아는 산악인들의 하루하루는 진했다. 엄숙하기보다 즐거웠다. 지금 살아 움직이는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 한 순간인지 산은 그리고 산에서 잃은 숱한 동지들은 알려주었다.

 

전쟁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전우라고 하잖아요. 목숨을 걸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전우애라는 게 생기는 거고요. 산악인들도 비슷해요. 악우(嶽友)들에게는 그런 우정이 있어요. 산을 오르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어요. 위험에 빠진 나를 구하기 위해 몇백 미터의 절벽을 로프 하나에 의지해서 와요. 광화문을 걷다가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는 글을 봤을 때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잖아요. 악우들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예요.”

 

그는 지금 그런 존재들을 잃고 왔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가 사랑하는 산이 됐다. 산은 여전히 거기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제 없다. 인터뷰는 종종 중단됐다. 측량하기 힘든 안나푸르나의 깊이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감히 짐작 되지 않았다. 이한구 씨의 작업공간이 있는 사진 갤러리 류가헌은 도심 속 고요한 한옥이었다. 메밀차는 식어 있었고, 그가 태운 담배가 수북이 쌓여갔다. 아스팔트 위에서도 등산화를 신고 있는 그의 컴퓨터 화면에는 박영석 대장의 사진이, 파일 안에는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등반기록이 있었다.

 

다시 가야죠. 찾으러 가야죠. 저희보다 유족들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어림잡아도 벽에 붙어 있는 대원들이 개미만 한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산을 묵묵히 오르는 그들의 마음을, 그리고 그들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생업을 멈추고 날아와 빙하 틈을 뚫고 내려가는 악우들의 우정을, 그럼에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라는 유족들의 진심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물원에서 자란 호랑이는 야생의 호랑이가 달렸을 초원을 가늠할 수 없듯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K2’‘North face’는 의류 브랜드라고만 알고 있는 우리들이 그 산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험한 길을 가보지 않은 우리가 그곳에 산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들의 탐험과 목숨에 빚진 결과라는 것이다.

 

안락한 노후, 안정된 생활, 보장된 미래가 미덕인 시대에 목숨을 걸고 새 길을 찾아낸 탐험가가 있었다. 자기 할 일만 하는 게 현명한 거라고 외치는 요즘 세상에 가진 걸 모두 대원들에게 퍼주기를 기뻐한 한 리더가 있었다. 1963~2011, 대한민국에는 박영석이라는 대장이 있었다.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탐험하지 않는 탐험가는 탐험가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는 산악인은 산악인이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신대륙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게 탐험이고 도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 같은 탐험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영석 대장

   

신동민 대원

원정 중 제일 힘든 순간엔 항상 집사람 생각이 납니다. 비록 저는 이 팀의 대원 중 한 사람이지만 이 원정을 통해 낸 길을 집사람한테 주고 싶습니다.” -안나푸르나에서, 신동민

1974 | 513일 제주도에서 출생.

1994 | 대구대학교 산악부 활동 시작.

1995 | 알프스 3대 북벽 드류 등정.

2000 | 에베레스트 8,848m 북릉, 북동릉 등반.

2001 | 푸모리 7,014m 동벽 등반.

2007 | 히말라야 로체샤르 8,400m 남벽 등반.

2008 | 오희준, 이현조 대원을 기리는 희조피크 6,004m 등정.

2008 |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2009 |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코리아 신루트등정.

2010 | 안나푸르나 8,091m 남벽 등반.

2011 |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 대원.

▲ 박영석 대장과 함께 산이 된 사나이들

 

강기석 대원

저는 클래식을 좋아합니다. 산에 오를 때 가져오고 싶은 단 하나의 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단 하나의 음악은 바흐입니다.” -안나푸르나에서, 강기석

1978 |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

1997 | 안동대학교 산악부 활동 시작.

2003 | 히말라야 로체 8,516m 서벽 등정.

2004 | 알래스카 맥킨리 6,194m 등정.

2004 | 중국 사천성 자진자보 등반.

2006 | 히말라야 로체 8,516m 남벽 등반.

2008|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2009 |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코리아 신루트등정.

2010 |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2011 | 히말라야 가셔브룸 2봉 단독 등정.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 대원.

   

산악 그랜드 슬램, 대장 박영석의 발자취

 

1963

서울에서 출생

위로 네 명의 누나를 두고 막내아들로 태어남. 군납업에 종사한 아버지 밑에서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냄. 훗날 네 명의 누나와 어머니는 박영석이 등반을 떠날 때마다 달려와 절대 못 간다. 가려면 나를 밟고 가라며 말림. 박영석은 이 순간을 등반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의 하나로 기억함.

 

1983

동국대학교 체육교육과 입학, 산악부 생활 시작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운동을 했고 재능을 보였으나, 꿈이 없던 소년 박영석은 어느 날 시청 앞에서 동국대학교 산악부가 고산 등반 후 카퍼레이드를 하는 걸 보고 산악인의 꿈을 품게 됨. 재수 끝에 오직 산악부에 들어가기 위해 동국대학교에 입학. 박영석은 그전까지 공부를 해본 일이 없던 나는 그랜드 슬램보다 동국대에 들어가기가 더 어려웠다고 말하기도 함.

 

1993

아시아 최초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

1993~2001 세계 최단 기간 히말라야 8,000m 14개 봉 등정.

1993~2002 7대륙 최고봉 등정.

1993~2005 3극점(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도달.

 

2005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기네스 북 등재

북극 등정에 성공하고 가장 좋았던 건 다시는 북극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지구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건 아마 북극일 것이다.” 박영석의 말이다. 산악인들 사이에서 전설 같은 존재인 라인홀트 매스너마저 세 번이나 도전했지만 실패했던 북극이다. 박영석은 인류 최초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매스너가 실패한 걸 넘어서고 싶다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2006

세계 최초 단일팀 에베레스트 횡단 성공

그는 평소 나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를 달리 해석하면 “100% 실패하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100% 실패하지 않으면 그 실패는 내 것이 되지 않는다. 60~70% 실패했을 때 포기하면 남은 30~40%에 뭐가 남아 있는지 영영 모른다. 완전히 실패해야 다시 준비할 수 있다.”

 

2009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코리아 신루트 (Park’s Korean Route)’ 등정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한국의 길이 생겼다. 박영석 원정대가 이룬 쾌거였다. 2007년 이 남서벽에서 10여 년간 탐험에 동행했던 대원 오희준과 이현조를 잃었다. 밤사이 눈사태가 일어나 이들의 캠프를 덮쳤던 것. 이후 박 대장의 방황은 길었다. 중국 쓰촨성에 올라 이들의 이름을 딴 희조피크를 등정했다. 그러던 중 만난 신동민과 강기석은 산이 보내준 박영석의 팀원이었다. 이 세 사람이 2009코리아 신루트를 개척했다. 그리고 2년 뒤 세 사람은 안나푸르나에서 함께 실종됐다.

 

2010

박영석탐험문화재단 발족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이제부터라도 뒤를 돌아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재단을 만들게 됐다.” 박영석탐험문화재단은 청소년들에게 산을 알려주고, 소외 계층과 등반의 성과를 나누는 사업을 펼쳤다. , 가을에 등반을 하고 여름에는 청소년, 대학생들과 국토순례를 떠났다. 남극을 탐험할 때는 15만 원씩 적립해 모은 성금으로 장애인을 도왔다. 또 네팔에 학교를 세우고 셰르파(등반을 돕는 네팔 현지인으로 짐을 들어주거나 길을 안내한다)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도 함께 추진했다.

 

2011

919일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

1018일 박영석 대장, 신동민 대원, 강기석 대원 안나푸르나에서 실종.

113일 세 사람의 영결식, 산악인의 장으로 엄수.

 

취재 유슬기 기자 사진 강민우, 이준경, 박영석탐험문화재단, 조선일보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