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다산 정약용 애절양(哀絶陽) 한시 감상문

풍월 사선암 2012. 6. 12. 08:53

다산 정약용 애절양(哀絶陽) 한시 감상문

 

다산 정약용(丁若鏞)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은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띄어 인정을 받게 된다. 성균관 생활이 끝날 때까지도 여러 차례 시험을 통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28세 때는 문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이라는 본격적인 첫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기여하였고,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비참한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기도 하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줄 방법을 늘 고민했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큰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으로 발생한 신유사옥으로 천주교인으로 몰렸고, 황사영백서 사건 등으로 급기야는 전라도 강진 땅으로 몰려난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고통에 찬 나날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거둔 수확기였다. 유명한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져,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57세가 되던 1819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고,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시대의 모순과 질곡에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만인 183622275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

 

애절양(哀絶陽) 양경을 자른 것을 슬퍼하며

 

"이 시는 내가 계해년(1803)가을에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갈대밭 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에 편입되고 못 바친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니."

 

정약용(다산)이 전라도 강진 땅에서 유배를 하던 1803년의 일이다. 그는 어느 날 갈밭 마을에서 일어난 목불인견(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의 참상을 이렇게 전해 들었다. <갈밭 마을에 착실하게 일하여 소를 한 마리 마련하고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아갈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던 젊은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아에서 그 농부의 죽은 아버지와 갓난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놓고는 군포(軍布)를 내지 않는다고 소를 끌고 가버렸어요. 복창이 터질 노릇이었겠지요. 평생 애써도 내 소 한 마리 가져보기가 쉬운 일인가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하여 그 사람은 식칼로 자기 생식기를 잘라버렸고, 젊은 부인은 관청을 향해 울부짖다 쓰러졌지요.>

 

삼정 가운데 군정(軍政)의 문란인, 죽은 부모에게 군역을 물리던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어린 아이에게까지 물리던 황구첨정(黃口僉丁)의 폐단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주는 처절한 얘기이다. 원래 조선시대 법에는 16살부터 60살까지 평민 남자에게만 군역을 부과하여 병역을 담당하거나 군포를 내도록 하고, 한 집에 두 사람을 한꺼번에 군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경우는 죽은 아버지, 본인, 어린 자식에게까지 군포를 물도록 하였던 것이다. 정약용은 눈시울을 붉히며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로 그 정경을 표현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 / 애절양(哀絶陽)

 

蘆田少婦哭聲長 (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 (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 (부정불복상가유)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自古未聞男絶陽 (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 (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 (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 (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早 (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 (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 (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閩囝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騸馬豶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 (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 (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 (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

 

정약용의 애절양을 읽고,,, (정약용 애절양 감상문)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시였다. 남자의 양경을 잘라서 슬퍼한다는 제목이 요즘세태 언어로 표현 하자면 엽기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약용이 정치가로써 학자로써 당대 지식인으로써 백성의 슬픔을 시로 지어냈다. 이시는 계해년(1803)에 지은 것 이라 나와 있는데 그 당시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살고 있었다. 자신이 유배지에 있음으로 힘도 없고 권력도 없어 어찌할 수 없다는 쓰라린 심정이 엿보인다.

 

이런 참혹한 현실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 나라의 기강과 정책이 흐트러질 때로 흐트러져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세상이라 볼 수 있다. 남자가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자른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 는 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남근을 잘랐다는 것은 백성들이 미쳐버릴 정도로 당시의 탐관오리들의 폭거가 얼마나 잔혹했었는지 상상되어진다.

 

남편이 스스로 자른 남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는 얼마나 기막히고 슬퍼했을까? 그러나 그런 남편을 탓하지도 못하는 현실, 이제 그의 아내는 자신의 참담함에 악에 바쳐 피에 엉킨 남편의 남근을 손에 쥐고 군청으로 가서 군수에게 끌려간 소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군수를 만나기는커녕 군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포졸들에게 얻어맞고 한손에는 피범벅이 된 남편의 남근을 꼭 쥐며 쫒겨나는 모습이 상상되어진다.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대립, 백성과 관청의 갈등, 썩어가는 세상이 느껴진다. 예전에 내시(환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환관을 시키려고 남근을 잘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 또한, 인간으로써 하기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말이나 돼지의 생식기를 까서 성장을 촉진 시키는 것도 슬픈데 하물며 사람의 생식기를 자르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두가 똑같은 백성인데 부자들은 쌀 한 톨, 비단 한치 바치지 않고 풍악을 울리며 즐기고 못난 백성들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 현실에서 봐도 상당한 호소력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당시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억울함, 애환, 고난 등을 대변하는 여러 편의 시가 쓰여 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구는 그리 귀해서 편하게 살고 누구는 그리 하찮아서 그리 힘들게 사는가 하는 당시 억울한 모든 백성들의 함성을 대변했으리라. 당시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정조 때는 사람을 알아본 정조가 정약용을 크게 썼으나 정조가 죽고난후, 탄핵을 받아 귀양살이를 전전하여 자신이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귀양살이하기에도 힘든 형편에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 없는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읇노라' 라고 표현한 거 같다. 자신의 어쩔수 없음을 시구편을 통해 거듭거듭 읊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한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고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해서 내용을 봐도 이해하기가 힘들거라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그 어떤 시 보다도 이해가 빨리되고 연상되는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던 시였다.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그 어떤 구체적인 설명보다도 정약용의 애절양 한편의 시로 더 가깝게 알게 된 느낌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백성들의 현실, 지은이의 괴로움 심정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출처 : 사상가 도올 김용옥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