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정치 모델, 英 대처수상 리더십
[집중탐구] '난세' 속으로 뛰어든 여걸…정치신념 남자보다 '꿋꿋'
영국 대처 수상 리더십 집중탐구
우리는 흔히 여성들의 리더십 표본으로 영국의 대처를 꼽곤 한다. 이는 대선을 앞두고 있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통령 예비후보가 자주 언급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박 후보는 지난 3월 개최됐던 대처리더십 토론회를 통해서도 ‘한국의 대처’를 자처한 바 있다. “대처가 영국을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원칙에 있었다. 시대에 맞는 원칙을 정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흔들리지 않고 그 원칙을 지켜낸 것이 영국을 살린 것”이라며 “대처의 원칙은 작은 정부와 감세, 법치와 엄정한 공권력의 확립이었고, 국민을 하나로 모은 통합의 리더십이 대처리즘의 핵심”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침몰하던 영국경제 ‘리더십’으로 살려…박근혜 ‘한국판 대처’ 될까?
◀강력한 리더십으로 꺼져가는 '영국호'를 구해낸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한국의 대처를 부르짖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통령 예비후보를 두고 일각에서는 대처의 리더십을 배우고 시장과 기업 중심의 성장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주장은 바람직하지만, 구조조정의 실패와 일관되지 못한 방향성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대처리즘이 올바른 해법인지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혹자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박근혜라면 대처가 되겠다는 말보다는 박정희의 성장신화를 계승하겠다는 주장이 더 낫다고 말한다. 우리의 성공모델이 엄연히 있고, 거기에서 배우고 계승하여 시대에 맞는 좋은 정책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얼마 전 번역판으로 발간된 <대처 리더십>이란 책은 절묘하게도 대선 국면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박근혜 후보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도록 만든다. 정책 선거보다는 이미지 선거로 귀결되는 한국 사회의 선거풍토에서 박 후보 측에서는 긍정적으로 봐줄 만 한 일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런던 특파원 등을 지냈던 구로이와 도루가 집필했으며, 한나라당 정인봉 전 의원이 번역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용이든 아니든 ‘대처 리더십’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책 속의 내용 중 전쟁 후 난세 속에서 신념의 정치가다운 대처 수상의 모습이 담긴 일화를 소개한다.
난세에 맞섰던 ‘돌격대장’
난세는 영웅을 좋아한다.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에게 ‘난세’였고 바로 그곳에서 대처라는 영웅이 탄생했다. 전후의 경제도 역시 영국에게 ‘난세’였다.
포클랜드 전쟁 후 이 난세가 영국을 계속해서 습격했다. 영국 국민은 이미 일곱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의 패기를 잃었다고는 해도, 패전국 독일이나 일본의 경제적 약진을 눈앞에 보고 수수방관하는 데 지쳐 있었다. 경제 전쟁에서 언제까지나 패자의 지위에 안주할 수 없다는 초조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처는 이 경제 ‘난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포클랜드 전쟁과 마찬가지로 경제 전쟁에서도 구국의 영웅이 되기로 한 것이다. 영국 국민은 그녀의 의도와 의욕을 받아들여 ‘go’라는 사인을 보냈다. 국민들은 대처가 경제 전쟁에서도 승리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다고 예감했으며 그 예감은 상당 부분 들어맞았다.
시장·기업 중심 성장정책 추진…산업의 심장부 차지한 영국병 추방
대처 정권의 집권 제2기, 제3기도 지향하는 방향은 제1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처는 제1기 중 “경제 부흥 정책을 실현하려면 적어도 2기는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산업의 심장부까지 자리잡은 영국병을 추방하고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2기만으로도 부족했다.
대처는 영국의 재생과 도약을 통해 영속적인 혁명을 추진하고자 했던 느낌조차 든다. 제2기, 제3기도 그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1983년 6월의 총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얻은 대처가 다음 목표로 추진한 것은 제1기에서 남긴 일, 즉 제1기에서 불충분하다고 본 노조대책,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그에 수반되는 주주의 대중화, 공영주택의 불하, 세금 체계의 간소화와 세율인하, 교육제도의 수정 등이다.
대처는 하나의 방침을 내세우면 그것을 끝까지 일관되게 실행하는 실행형 정치가였다. 저돌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저 전진하는 돌격대장이 아니라 강력한 원군과 함께 진격하는 만만찮은 사령관이었다.
말은 비록 과격하게 반복해서 했지만 실제로 그녀 나름대로 일의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단지 웅변만 하는 게 아니라 항상 심사숙고하면서 움직였다. 거기에 대처다운 현실주의가 있었다.
그의 신념에 패배한 탄광노조
노조 대책이 바로 그 전형이었다. 대처가 집권 제1기 때 정책의 중점 목표로 꼽은 것 중의 하나가 노조의 정상화였다. 1974년의 탄광노조 파업 때 수상 히스는 노조와 심하게 대립하여 “누가(국가를) 지배하는가?”라고 부르짖고 총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했다. 노조의 힘에 진 것이다.
대처는 히스의 전술에는 “좀더 긍정적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히스와 마찬가지로 노조의 힘을 줄이는 것이 영국 재생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취임하자마자 공무원 급여 인상 파업에 대해 완고한 자세를 취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는 제안된 공무원 인상률을 거부했다가 6주 동안 필요 없는 혼란을 일으킨 끝에 결국 승인했다. 1980년의 탄광노조 파업에서도 같은 태도로 일관하다 실패했다. 신념만으로는 노조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만큼 노조에는 힘이 있었다.
방침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실행형 정치가…“못말리는 돌격대장”
하지만 대처가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리 업었다. 패배 후 대처는 노조를 굴복시키기는 힘을 획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먼저 법적으로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 1980년, 1978년 2회에 걸쳐 고용법을 개정했다. 일반 직원 전부를 조합원으로 하는 ‘클로즈드숍’ 제도를 개정하여 조합원이 아닌 사람도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조합의 파업을 응원하는 동정 파업의 금지, 피켓 시위에 대한 민사 면책 폐지 등의 파업 규제에도 나섰다.
한편으로 가장 강경한 스카길(arthur scargill) 위원장이 이끄는 탄광노조와의 대결에 대비하여 석탄 비축을 시작했다. 탄광노조의 파업으로 에너지원이 끊기는 것을 두려워한 국민들이 정부에 양보를 강요하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탄광노조와의 대결은 대처가 준비를 갖췄을 때 시작되었다. 아니 오히려 준비 완료와 동시에 대처가 도전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1984년 3월6일 영국 석탄공사의 총재 맥그리거는 적자 상태인 20개 탄광의 폐산과 2000명의 인원 삭감계획을 발표했다. ‘아서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서 스카길 위원장이 이끄는 탄광노조는 즉시 반발하여 6일 후에 파업에 돌입했다. 1년에 걸친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대처는 파업을 각오하고 있었고 장기전도 대비하고 있었다. 북해 석유가 장래에 고갈돼 원자력 에너지 쪽에도 과도한 기대를 걸 수 없다고 보면, 석탄의 필요성이 늘어날 것은 뻔했다.
즉 생산 효율 향상과 합리화가 영국의 에너지 확보를 위한 가장 중점목표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처는 경제 합리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식의 조합을 변혁해야 한다고 결심했고 장기 파업을 예상하면서 굳이 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대처는 노조와의 대결을 직접 진두지휘하진 않았다. 대신 대처의 뜻을 간파한 석탄공사 총재 맥그리거가 전면에 나섰다. 스코틀랜드 태생인 맥그리거 총재는 미국에서 실업가로 성공하여 영국 석탄공사 총재로 초빙된 사람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맥그리거는 영국의 재생을 위해 경제 합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탄광노조 파업의 상대는 직접적으로는 석탄공사와 맥그리거 총재였으나, 실제로는 대처 수상 그 사람이었다. 대처의 강경함에 스카길 노조위원장 역시 강경함으로 대항했다. 스카길은 과거 두 번에 걸쳐 파업권 확립을 요구하는 노조원의 투표로 이러한 문제들을 격파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보고 각 지부의 파업은 지부 위원회의 결정만으로 파업에 들어간다는 규정을 이용하여 각 지부가 일제히 파업에 들어가는 실질적인 전국 파업 돌입 전술을 채택했다.
그러나 생산성이 높은 더비 주나 노팅엄 주 등의 탄광 노조원이 반대하여, 총 17만명의 노조원 중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조원이 5만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일하고자 하는 노조원을 시위대가 피켓으로 저지하는 과정에서 경찰대와 충돌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생겼으며 노조의 가족이 파업 파와 반파업 파로 갈라져 골육상잔을 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스카길의 입장에서 파업 불참자가 3분의 1 가까이 나온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으며 1974년처럼 탄광노조가 정부를 굴복시킨 시절과는 에너지 사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석탄이 에너지 소비에 차지하는 비율은 35퍼센트로 떨어져 있었으며, 1985년 겨울에는 화력발전소를 가동할 수 있을 만큼의 석탄이 비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채산이 맞지 않는 탄광을 국민의 세금으로 보조하는 것이, 경제 효율로 보아 얼마나 낭비인가”라는 대처의 호소가 탄광노조 내부에도 침투되어 있었다.
1984년 가을. 대처는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고, 파업권 확립 투표를 의무화하여 투표로 승인되지 않은 파업을 위법으로 인정하였다. 그러자 파업권 투표 없이 실시된 탄광노조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들 사이에 동요가 생겼다. 정부와 석탄공사는 겨울의 고비를 극복하고 1985년 3월 마침내 이겼다.
노동조합법 과감히 개정…치밀한 ‘대처식’ 작전…탄광노조도 굴복시켜
파업에서 이탈한 조합원이 50퍼센트가 넘어선 시점에서 탄광노조 전국 대표자회의가 “전국 조합원은 무조건 파업을 포기하고 3월 5일부터 직장에 복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노조 측의 전면 패배였다. 석탄 비축과 에너지 사정의 완화를 배경으로 한 대처의 작전과 신념의 승리였다.
혁명적 정치가의 보수주의
대처가 제1기에서 남긴 일로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있었다.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을 비난하고 민영화를 정책 기둥의 하나로 삼은 그녀는 민영화야말로 경쟁 원리의 도입에 의해 기업이 활성화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노동당의 국영화 정책을 비판했다. 대처에게 사회주의는 적이고 국영기업은 사회주의를 체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합 대책과 마찬가지로 민영화도 역시 함부로 시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즉각적인 민영화가 어려웠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거대한 채무를 안고 있던 국영기업을 그대로 시장에 팔아봤자 높은 가치를 얻긴 힘들었다. 둘째로 국민의 세금을 쏟아부어 채산성이 있는 기업으로 만든 후, 금방 민영화하는 것은 ‘민영화된 기업의 주식을 가지지 않은 일반 국민으로서는 불공평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민영화는 1979년에 먼저 브리티시 석유의 일부, 1981년에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항공), 케이블 앤드와이어리스(통신), 1982년에 애머셤 인터내셔널(의료), 브리트오일(유전) 등 천천히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2기에 들어오면서 속도를 조금씩 올려 거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성공시켰다.
대처가 지향한 것은 주주를 일부 부유 계급에서 일반 대중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나날이 노동을 잊어버리고 재테크에 눈이 시뻘개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처는 주식 매매만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과 그 사이에 선 브로커를 혐오했다. 의회의원이 된 1년 후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격하려는 것은 주식 매매를 하는 시세꾼입니다. 그들은 소득을 낳는 재산으로서 주식을 가지는 게 아니라 거래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주가 된 일반 대중에게 ‘소득을 낳는 재산’으로 주식을 가지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 자세는 세제 개혁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대처는 정권 취임 시인 1979년에 개인의 기본 소득세율인 33퍼센트를 27퍼센트로, 1988년에는 25퍼센트로 삭감했다. 소득세의 최고 세율은 1979년에 83퍼센트였던 것을 60퍼센트, 1988년에는 40퍼센트로 급격하게 낮췄다. 이 소득세의 감세는 “국가가 국민생활에 관여하는 비율은 가능한 한 적은 편이 좋다”는 그녀의 정치철학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처는 부자가 더욱 부유하게 됨으로써 빈자의 생활을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부자를 때려눕히면 부의 파이는 작아지지만, 부의 파이를 키우면 빈자도 역시 부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파이를 키우려면 사회를 지도하는 부자의 노동 의욕을 자극해야 하며 일하면 일할수록 세금으로 빼앗기는 고율의 누진과세는 부의 파이를 줄이는 사회주의의 폐해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88년 10월 대처는 당대회에서 “우리는 모두 너무 젊다”면서 4기째를 목표로 하는 장기 정권 확립 의사를 나타냈다. 회장에서는 “앞으로 10년 더”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념의 정치가는 다시 새로운 신념을 만들어 대처리즘의 길로 매진할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녀가 보여주는 새로움은 그녀가 가진 오래된 것 속에서 생겨나고 있다. 혁신적 정책을 내세워 그것에 집중하는 혁명적 정치가인 대처의 체질은 실은 대처 내부의 보수주의를 체현한 극히 보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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