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원 설계자인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
[렌조 피아노, 서울 용산에 세계서 둘째로 높은 건물 설계 "중력에 도전"]
파리 '퐁피두' 디자인한 거장, 모형 100개 만들며 고민했다
밤이라 문 닫으면 '이기적'… 24시간 깨어 있는 건물 만들어
건축가는 인류 대전환의 주역
◀서울 용산‘트리플 원’스케치. 태양열을 활용하기 위해 태양의 고도를 계산해 건물의 상층부를 대각선 방향으로 절단했다. 이 부분이 전망대가 된다.
“해가 저쪽으로 지고 있으니 저기쯤이 용산이겠어.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각도겠구먼.”
1일 서울 시내가 한눈에 굽어 보이는 서울 남산의 한 호텔 17층에서 노(老)신사가 용산 방향을 가리킨다. 신사의 두 뺨은 창밖 일몰 직전의 서울 도심처럼 발그레 물들었다. 몇 년 뒤면 자신의 역작(力作)이 잉태될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흥분과 기대가 교차했다.
서울 용산국제업무지구의 랜드마크 타워인 ‘트리플 원’의 설계자로 디자인 최종 점검을 위해 방한한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Piano·75).
현존 건축 거장 중에서도 최고 거장으로 꼽히는 그가 방한해 최초로 한국 언론과 독대했다. 이번 방한이 다섯 번째라는 그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한국 기자와 하는 첫 인터뷰”라며 스케치를 확대한 판넬과 모형, 개념도를 꼼꼼히 준비해왔다.
렌조 피아노는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탔고, 파리 퐁피두센터(리처드 로저스 공동작), 뉴욕타임스 사옥, 일본 간사이 국제공항 등 세계 건축사에 획을 그은 명작을 설계해왔다. 동화 피노키오의 제페토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그는 한없이 겸손하고 인자했다. 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초연한 자세로 ‘건축은 시(詩)요 예술’이라는 지론을 시종일관 시를 읊조리듯 얘기했다.
얼굴엔 미소가 붙박이처럼 붙어 떠나질 않았고, 연륜이 묻은 음성은 때로 턱턱 갈라졌지만 따뜻함이 깊이 배 있었다. 설명이 필요할 때면 진한 녹색 사인펜을 꺼내 준비해 둔 백지에 쓱싹 개념도를 그리며 열정을 불살랐다.
◀ 동화 피노키오의 제페토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렌조 피아노는 한없이 겸손했다. 일흔다섯의 거장은 서울 남산의 한 호텔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전과 모험의 연속에 하루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뒤로 석양에 물든 서울 도심이 보인다.
―어떻게 용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나.
“대형 빌딩 프로젝트를 할 땐 역(驛)·대중교통과 연결돼 도시의 치열한 삶(intense life)을 그리는 작업이 중요하다. 용산 프로젝트는 역과 연결된 프로젝트라 도시의 역동적인 삶을 반영할 수 있었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마스터 플래너)가 밑그림을 보여줬을 때 환상적이라 생각했다. 거인들이 내가 설계하는 랜드마크를 중심축으로 발레를 추는 형상이었다.”
―트리플 원은 세계에서 둘째로 높은 빌딩이 된다. 어떤 콘셉트로 설계했나.
“주요 도시에서 중심 도로 길이가 몇 나 될 것 같은가. 아무리 길어도 500 내외다. 이 건물은 620다. 상점과 레스토랑, 극장이 즐비한 도시의 메인 도로를 수직으로 세웠다. 마치 하늘로 이륙하기 직전의 로켓 같은 형상으로. ‘작은 도시’ 하나를 세우는 심정으로 임했다. 나는 산(山)이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라 생각했다. 트리플 원은 반경 80㎞에서도 보인다. 맑은 날 인천공항에서 보인다. 멀리서 봤을 때 아름다운 한국의 산과 함께 어우러지는 ‘수직적인 요소’가 되기를 희망했다.”
―당신은 건축가라는 직업을 ‘모험하는 로빈슨 크루소’에 비유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떤 모험이었는가.
“트리플 원은 ‘중력’에 대한 도전이자 기술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현재 런던에 짓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빌딩 ‘샤드(The Shard)’도 트리플 원의 절반 높이(306)다.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형 100여개를 직접 만들고 직원들과 토론했다. 컴퓨터 기술이 발달했지만 항상 많은 모형을 제작한다. 파리에 있는 우리 사무실에선 쇼윈도 밖에서 우리 직원들이 모형을 제작하는 모습을 늘 볼 수 있다. 어떤 첨단 기술보다도 손의 감각을 신뢰한다.”
◀ 피아노가 20대에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 설계한 출세작 파리 퐁피두센터. /드낭세 미셸
렌조 피아노는 이번 방한 때 만든 모형 100여개 중 20여개를 가져왔다. 건물 외벽에 총 1만6000장 붙을 이중 유리판을 아크릴로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해 만든 모형도 들고 왔다. 외장에 쓰일 유리는 지금 네덜란드에서 제작 중이란다.
―뉴욕타임스 사옥을 지을 때 도시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빌딩이 많다고 지적했다. ‘도시와 소통하는 건물’을 항상 강조했는데 트리플 원에서는 어떻게 구현했는가.
“트리플 원은 103~111층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도록 했다. 공공성을 위해 만든 수정궁(水晶宮·crystal palace) 같은 곳이다. 건물 외부에 공중에 떠서 명상할 수 있는 체리 모양 유리 공간도 두 개 있다. 완벽한 고요함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요즘은 이기적인 건물이 넘쳐난다. 대개 오피스 건물은 회사가 업무를 끝내면 문을 걸어 잠근 채 죽은 건물이 된다. 업무라는 하나의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24시간 깨어 있는 ‘이타적이고 다기능인’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 내내 상층부와 하층부 곳곳에 사람의 발길이 미치게 했다.”
그는 최근 맡게 된 서울 광화문의 KT 신사옥 설계에서도 공공 공간(public space)에 신경 썼다고 했다. 경복궁 앞이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건물이기 때문에 1층(필로티로 띄워 1층을 공공에 개방한다), 옥상, 테라스 등 곳곳에 오픈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건축가는 어떤 사람이며, 건축은 무엇인가.
“건축가는 ‘인류의 혁명과 변혁의 목격자’이자 ‘대전환(Big shift)을 일궈내는 주역’이다. 통독(統獨) 과정을 지켜보며 베를린의 포츠담 플라자를 설계했고, 20대 어린 악동(young bad boy) 시절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 퐁피두센터를 만들 땐 당시 소수 엘리트를 위한 박물관 문화에 도전했다. 어떤 이는 건축을 패션(스타일)이라 한다. 나는 지속성(duration)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건물은 6개월, 1년만 존재하는 게 하니라 한 번 지어지면 수 세기 동안 지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은 예술, 그것도 아주 특별한 예술이다. 사회, 심리학, 인간, 커뮤니티, 과학, 기술에 시적 요소까지 여러 가지가 흥미롭게 응축된 종합예술이다. 영화·음악·글처럼 감정을 창조해내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번 용산 프로젝트는 그 모든 것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의 결정체였다. 건축가는 ‘기술’을 갖춘 훌륭한 시공자(good builder)가 되어야 한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기술이 없으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피아노’라는 이름 때문인지 건축가를 피아니스트에 종종 비유했다.
과거 한 인터뷰에선 “피아니스트가 천재가 되기 위해서는 피아노 앞에서 자기의 과학적 능력을 충분히 소화한 다음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건축가는 방대한 기술적 지식을 소유해야 하며 가장 최신의 기술적 진보에 대해서 정통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은 스타 건축가이면서도 건축계의 스타 시스템을 비판해왔다.
“스타 시스템은 건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나는 스타가 아니고 스타처럼 행동하지도 않는다. 건축가는 스타일 수 없다. 건축가에겐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 대중 소통을 차단하는 콧대 높은 스타와는 다르다. 나는 그저 맛있는 빵을 굽는 빵가게 주인 같은 사람일 뿐이다. 우리 사무실에 줄기차게 프로젝트가 들어오는 건 우리가 스타처럼 행동해서가 아니라 그저 작은 사무실에 앉아서 묵묵히 일해 왔기 때문이다. 내 사무실은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소박한 사무실이다. 어제 도착하자마자부터 인터뷰하기 직전까지 스태프들과 일했다. 나는 도덕주의자(moralist)는 아니지만 윤리(ethic)에 충실해지려 한다. 인술(仁術)에 충실한 의사처럼 말이다.”
렌조 피아노의 메인 오피스는 파리에 있고, 뉴욕과 제노바(이탈리아)에도 사무실이 있다. 주로 파리에서 생활하며 제노바와 뉴욕에도 집이 있다. 고령이지만 세 곳을 수시로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빵(건축물, 설계비)은 얼마인가.
“(웃으며) 안 비싸다. 우리는 그렇게 부유하지 않다. 재단을 만들어 수입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한다. 큰 프로젝트만 하는 건 아니고 작은 프로젝트도 한다. 코스타리카에 예산 30만 달러(약 3억4000만원)의 학생 40명을 위한 학교도 짓는다. 프로젝트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장인(craftman)의 마음으로 모든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 회사 인원은 60명 정도다. 수십 년간 이 규모를 유지해왔다. 체중이 일정한 사람이 건강하듯 일정한 규모로 계속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집을 불려 리스크에 노출되기보다는 내게 맞는 규모로, 완벽한 팀워크를 기본으로 해서 일하려 한다. 모든 사무실이 팀워크를 말하지만 현실에서 팀워크가 이뤄지기란 어렵다. 우리 회사엔 40년을 함께 일해온 동료도 있다.”
인터뷰엔 용산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로 일한 파트너(사무실엔 총 10명의 파트너가 있다) 유스트 물휘첸씨가 배석했다.
22년을 함께 한 ‘상대적으로 젊은’ 동료의 배석에 대해 렌조 피아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무실에선 첫째도 파트너십(동반자 관계), 둘째도 파트너십이다. 머리를 맞대고 언제나 토론하고 연구한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다. 이걸 우선 이해해줬으면 한다.” 그의 건축 사무소 이름이 ‘렌조 피아노 빌딩 워크숍(Renzo Piano Building Workshop·RPBW)’인 이유다.
거장 렌조 피아노, 반세기에 걸쳐 그가 구축해온 ‘하이테크 건축’의 근간은 따뜻한 인본(人本)주의였다.
김미리 기자 / 입력 : 2012.05.03
14개 초고층(높이 200m 이상) 빌딩이 강·하늘 무대서 발레를 하듯…
2016 용산, 세계적 명물이 되다
용산국제업무지구, 이렇게 들어선다
서울 용산국제업무지구에 620m 높이의 랜드마크 타워를 비롯해 200m가 넘는 초고층 빌딩 14개가 세워진다. 지하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의 6배 크기인 쇼핑몰(103만7600㎡·약 30만평)이 들어선다. 용산역세권개발㈜은 2일 '용산국제업무지구 발표회'를 갖고 빌딩과 쇼핑타운의 디자인을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랜드마크 타워인 '트리플원'은 지상 111층 높이의 오피스 빌딩이다. 2016년 말 완공되면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축물이 된다. 주변에는 6성급 호텔과 고급 레지던스로 구성된 랜드마크 호텔(72층·385m)과 다이아고널타워(64층·362m), 블레이드타워(56층·293m) 등 오피스 빌딩이 배치된다. 용산국제업무지구의 마스터플랜과 '트리플원' 설계를 담당한 렌조 피아노(75)는 "빌딩들이 발레에서 (여러 무용수가) 군무(群舞)를 추듯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용산국제업무지구는 총사업비 30조원 규모의 초대형 복합 개발사업으로, 내년 초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해 2016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홍원상 기자 / 입력 : 2012.05.03
'생활의 양식 > 시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근혜의 정치 모델, 英 대처수상 리더십 (0) | 2012.05.04 |
---|---|
지구 종말 시나리오 (0) | 2012.05.03 |
엄마가 무덤까지 갖고간 비밀 (0) | 2012.04.29 |
'인간 이순신' 연구 40년 헌법재판소 김종대 판사 (0) | 2012.04.28 |
서울대 나온 50대男, 목사되더니 한다는 일이… (0) | 2012.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