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노무현 시대에 대한 망각

풍월 사선암 2012. 2. 23. 18:09

[김진의 시시각각] 노무현 시대에 대한 망각

 

노무현 사람들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총리였던 한명숙은 제1 야당 대표다.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은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문성근은 서열 2위 민주당 최고위원이며 김두관·안희정은 도지사다. 장관·비서관 출신 중에서 총선에 나가는 이들도 많다. 노무현 사람들은 모두 노무현 시대의 재건을 외친다. 그렇다면 그 시대는 그렇게 떳떳한 시절이었나.

 

진보·좌파의 가장 큰 무기는 도덕성이어야 한다. 서민 정권이라면 말 그대로 서민적이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지 채 1년이 안 된 20089, 충북의 한 골프장 7번 홀에서는 결혼식이 열렸다. 신랑 아버지는 골프장 주인이자 노무현의 최대 재정적 후원자였다. 신부 아버지는 노무현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주례는 노 전 대통령이었고 노 정권의 주요 인사 100여 명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한명숙·이해찬 전 총리,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앞줄에 앉았다. 초가을의 잔디는 푸르렀고 하늘엔 빨간 경비행기가 빙빙 돌았다.

 

그저 평범한 재력가의 결혼식이라면 세인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결혼식은 두 집안만의 사사로운 행사가 아니었다. 사돈의 면면이나 주례·하객의 위상이나, 이는 노무현 정권의 잔치였다. 이 무렵 한국 사회에는 노무현 정권의 우울한 잔영(殘影)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들이 부실과 폐해로 참혹하게 정권을 잃은 지 겨우 반년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미국 금융위기 소문으로 민심은 어수선했다. 그런 판에 서민 정권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초원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몇 달 후 비극이 시작됐다. 노무현의 또 다른 후원자 박연차 회장이 등장한 것이다. 박연차라는 야수는 대통령 형을 삼키고, 부인을 해치더니 급기야 대통령을 쓰러뜨렸다.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한 1차적인 동기는 부인 권양숙 여사였다. 문재인 전 실장에 따르면 노무현은 부인이 박연차에게서 거액을 받은 걸 알고 격노했다고 한다.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참에 검찰이 자신이 주도한 일이라고 몰아붙이니 노무현은 억울함을 외치러 뛰어내린 것이다.

 

한명숙 전 총리는 노무현 장례식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노무현을 무엇으로부터 지키지 못했다는 것인가. 권양숙 여사인가 아니면 검찰인가. 물론 검찰의 책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전직 국가원수를 사지(死地)로 안내한 것은 무엇보다 부인의 책임이다. 노무현은 정치보복이 아니라 부부 신뢰관계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정권의 핵심인사였다. 정치에 나서면서 그는 특수부대 경력을 주요 홍보물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낙하산 사진을 공개했다. 최근엔 TV프로에서 특전무술이라며 머리로 기왓장을 깨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핵심으로 봉직했던 노무현 시절, 국가 안보의식은 크게 위협을 받았다. 반미(反美) 폭력시위대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투쟁에서 군인들을 폭행했다. 과격 세력은 인천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공격했다. 미군은 북한 침략에 맞서 피를 흘리며 한국을 구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노무현 정권 자체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동맹을 공격하는 건 은혜에 대한 배신이다. 그런 배도(背道)가 벌어지는데도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문재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청와대에 들어앉아 수수방관했다. 그런 문재인을 특수부대 동지들은 어떻게 볼까. 잘했다고 할까. 머리로 기왓장 몇 장 깬다고 안보가 되는 건 아니다.

 

국민이 압도적으로 밀어준 정권이 실패하는 바람에 처절하게 버림받았던 정권이 득세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부엉이 바위는 영원히 그 자리에 서있다. 골프장 결혼식장에 흩날리던 색종이도 풀밭 어딘가엔 몇 장 남아 있을 것이다. 노무현 5년의 세월은 가장 압축적으로 중앙일보 사설(2008223)에 남아 있다. 제목은 노 대통령을 역사 속으로 보내며.

 

[중앙일보]입력 2012.02.20 00:02 / 수정 2012.02.20 00:06

 

그가 부른 '허공'가락에 실어 를 보내

가장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여, 가장 나쁜 결과를 낳은 노무현

 

[편집자 주: 다음의 중앙일보 사설은 노무현 정권의 5년을 평가하는 가장 잘 요약된 논설 중에 하나이다. 이 사설에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면서도 자비로왔다. 노무현은 가장 좋은 기회를 최악의 결과를 낳는 데에 사용한 무능하고 부덕한 정치꾼이었다. 그 결과 노무현은 많은 애국인사들로부터 반역자로 비난받고 있다. 국민행동본부가 22일 노무현을 '반역죄'로 고발한 것은 정상적인 자유민주시민들의 뜻을 반영한 애국활동으로 평가된다. 노무현은 너무 몰상식하고, 반국가적이고, 비민주적인 국정과 행동을 연출한 악덕스러운 대통령으로 평가될 수 있다.]

 

[중앙일보 사설] 노 대통령을 역사 속으로 보내며

 

5년 전 대통령을 시작하면서 노무현은 구시대의 막내가 아니라 새 시대의 장남이 되고 싶다고 했다. 때는 절호의 기회였다. 1970년대 이래 한국 정치에는 4대 숙제가 있었다. 문민화, 여야 간·영호남 간 권력교체, 그리고 세대교체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화, 김대중 대통령이 여야·동서 간 권력교체를 이뤄냈다. 노 대통령 자신은 세대교체의 완성품이었다. 모든 숙제가 풀렸으니 그는 선진화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됐다. 어느 대통령도 이보다 좋은 환경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소중한 기회를 놓쳤다. 그는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사람들은 이회창과 다른 서민성, 이인제와 다른 참신성, 김영삼·김대중과 같은 투쟁성만 바라보았다. 노무현의 실상은 달랐다. 역사의식은 뒤틀렸고, 오만은 헌법을 넘었고, 지식은 짧았으며, 혀는 너무 빨랐다. 386에 휘둘렸고, 권위를 담을 그릇이 없었고, 세계와 북한을 너무 몰랐으며, 우물 안의 경험으로 현대사와 언론을 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짜 노무현이 하나둘씩 드러났고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국민은 그렇게 5년을 노무현과 함께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역사 속으로 보낸다.

 

노무현은 이중성의 인간이다. 빛을 향해 뛰면서 꼭 그늘을 남겼고, 좋은 일을 하면서 꼭 나쁜 얘기를 불렀다. 노무현은 대선 광고에서 눈물을 흘렸고 공동체를 개선하려는 열정이 뜨거웠다. 방법만 옳았으면 그 열정은 우리 모두의 성공 스토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도 대통령 직을 갈구했으면서도 몇 달 안 돼 대통령 직 못해 먹겠다고 했다.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면서도 보는 눈은 한쪽이었다. 평등·질시·편향이었다. 민주당이 구태라며 열린우리당을 만들고서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하자고 했다.

 

그는 용산기지 이전이라는 한·미동맹의 오랜 과제를 해결했다. 그러면서도 얻어맞는 맥아더 동상을 방치하고 군인을 반미 시위대의 몽둥이 밑에 내버려 두었다. 그는 이라크에 한국군을 보내 부시 미국 대통령을 감동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미주의면 어떠냐고도 했다. 그는 한·FTA를 주도적으로 성사시켰다. 그런데 다른 쪽에선 농민 시위대를 막았던 경찰청장이 물러나야 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잘 몰랐다. 그는 판사였으며 변호사였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는 헌법을 여러 차례 유린했다. 위헌 공약(행정수도)으로 표를 얻었고, 헌법에도 없는 신임투표를 한다고 했으며, 헌법재판관을 임명하면서 헌법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막판에는 선거운동을 하겠다며 헌법재판소 재판정을 찾기도 했다. 그는 권력기관에서 대통령의 손을 떼겠다고 했다. 그러나 권력기관은 독립적이지도, 유능하지도 못했다.

 

국정원은 유력 대선주자의 뒤를 캤고, 국정원장은 아프가니스탄과 평양에서 나라의 권위를 구겼다. 정권 내내 경찰의 최루탄보다는 시위대의 함성과 죽창이 더 무서웠다. 노 대통령은 경제에 대해서도 이중적이었다. 그는 5년간 수출이 매년 두 자릿수로 늘었다고 자랑한다. 자기 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투자와 일자리가 줄고 서민경제가 어려운 것은 10년 전 외환위기 탓이란다.

 

노무현의 시대에서 한국은 나름대로 역사의 진보를 수확하기도 했다. 선거에서 돈이 뭉치로 굴러다닌다는 말이 이제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정경유착이란 말도 점점 퇴장하고 있다. 미래를 걱정하던 상황에서 우리는 한·FTA라는 줄을 잡을 수 있었다. 비준에 좀 더 열정적이었으면 노 대통령의 공적은 그만큼 늘어났을 것이다.

 

이제 봉하마을의 노무현은 현실의 역사에서 비켜서야 한다. 미국의 카터는 섣부른 이상주의로 재임 중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퇴임 후 목수가 되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 카터를 미국인은 더 사랑한다. 20044월 총선에서 승리한 후 386들은 청와대 만찬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노 대통령은 답가로 조용필의 허공을 불렀다.

 

이제 노무현은 자신의 잘못된 열정을 허공 속으로 날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재수(再修)하는 기분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하기 바란다. 조용히, 말보다는 침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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