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8)] 부귀영화와 출세의 정점, 정승에 오른 사람들

풍월 사선암 2012. 1. 8. 22:53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8)] 부귀영화와 출세의 정점, 정승에 오른 사람들

 

황희·정광필·이준경·이덕형, 최고의 영의정으로 이름 날려명정승의 기본 덕목은 외유내강

 

조선과 같은 군주제 국가에서 임금이야 타고나는 것이니 별개로 하고 일반 백성들이 타고난 재능과 노력, 그리고 천운(天運)이 한데 어우러져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다. 소위 말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다. 그 다음이 좌의정, 우의정 순이었다. 그리고 이들 셋을 일러 흔히 삼정승(三政丞)이라고 통칭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때 정승이라는 말은 곧 부귀영화(富貴榮華)와 동의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정승이라는 말 혹은 그 자리에 대해 갖고 있었던 느낌을 알아보는 데는 속담이 가장 좋다.

 

지금도 흔히 하는 속담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이다. 이때의 정승이라는 말에는 멋진 품격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묘하게도 정승은 개와 연결해서 이런 저런 속담들이 많다. “정승 날 때 강아지 난다.” 세상에는 귀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함께 섞여 살아간다는 통찰(洞察)이다. 어쨌든 여기서 정승도 귀한 사람을 뜻한다. “굶어 죽기는 정승 하기보다 어렵다고 해서 그만큼 정승 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속담도 있고 정승집 개 죽은 데는 문상 가도 정승 죽은 데는 안 간다고 해서 염량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풍자도 있다.

 

아무리 좋은 부귀영화도 내 손에 들어 있는 것만 못하다는 안분지족의 지혜가 담긴 삼정승 사귀지 말고 내 한 몸 조심하여라라든가 죽은 정승보다는 산 개가 낫다는 속담도 있다. 후자의 속담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과 통한다.

 

조선시대에는 출세(出世)의 정점이 바로 정승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객(政客)들은 일찍부터 정승감을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과연 그들이 어떤 기준으로 정승감을 골랐는가이다.

 

먼저 세종 때 황희와 김종서의 일화를 보자. 공조판서 김종서가 정승 황희를 접대하면서 공조의 물건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예빈시(禮賓寺)라고 해서 의정부 건물 바로 옆에 정승들의 접대를 전담하는 기구가 있었다. 황희는 예빈시에서 가져오면 될 것을 어찌 공조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 있는가라며 민망할 정도로 호통을 쳤다. 정승과 판서는 이처럼 엄격한 상하관계였다.

 

이후에도 사람 좋다는 평을 들은 황희지만 김종서에 대해서만은 아무리 사소한 잘못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맹사성이 황희에게 종서는 당대의 명판서이거늘 어찌 그리 허물을 잡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황희의 대답이다. “종서는 성격이 굳세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기 때문에 뒷날 정승이 되면 신중함을 잃어 일을 허물어뜨릴까 염려해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오.” 김종서는 훗날 실제로 정승에 오르지만 수양대군에게 희생된다.

 

황희는 유연한 정치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 때니까 그렇지 사화(士禍)가 빈발했던 중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홍언필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을 보면 유연한 정치력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홍언필에 대해 인품이 겸손하고 청렴하여 일상생활이 검소하였다고 칭찬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다른 정승의 말을 좇을 뿐, 두려워하여 자리 보존에만 급급하였으니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혹평하고 있다. 직언(直言)을 너무 아껴서는 뛰어난 재상이 되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에 앞서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희생된 김정이라는 인물에 대해 실록 사관은 정승의 자질이 있다고 평하면서도 너무 강직한 나머지 남의 과실을 지적하기 좋아하고 편협하여 큰 일을 담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자타가 공인하는 명()영의정 정광필에 대한 사관의 평을 들어보면 이상적인 정승상(政丞像)을 엿볼 수 있다.

 

정광필은 그릇이 원대하여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이 날카로운 예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지만 나라의 큰 일을 당할 때에는 의젓한 기절이 있었다. 두 번이나 영상(領相 · 영의정)으로 있을 때 국정을 바로잡아 임금을 보필한 공이 많았으니 조야가 의지하고 존경하였다.”

 

실제로 정광필이 간신 김안로의 탄압을 받아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가 김안로가 축출되자마자 조정으로 돌아올 때 한양 저잣거리의 아이들과 말을 모는 졸병들까지 기뻐 춤추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명종 시대의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폭정 속에서도 사림을 지켜내며 마침내 선조를 즉위시켜 난세(亂世)를 종식시키고 치세(治世)를 위한 기초를 놓은 또 한 명의 명영의정 이준경은 위엄에서 두드러졌다. 이준경은 어릴 때 남명 조식과 친구 사이였다. 훗날 이준경이 정승이 되었을 때 초야에 있던 조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온 일이 있었다.

 

이때 이준경은 개인적인 사신(私信)만 보내고 조식을 찾아가지 않았다. 결국 귀향을 앞두고 조식이 이준경을 찾아왔다. “공은 어찌 정승 자리를 가지고 스스로 높이려 하는가?”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게다. 이에 이준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정의 체모를 내가 감히 폄하할 수 없어서이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았던 이준경이었기에 가능했던 대답이다.

 

이미 38세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이덕형도 정광필이나 이준경에 못지않은 명영의정으로 꼽힌다. 그에 관한 사관의 평이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명정승의 기본 요건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 핵심이었다.

 

정조16년 정조가 김이소에게 우의정을 제수하자 김이소는 과분하다며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한 정조의 대답이 흥미롭다. “옛말에 산둥(山東)에서 정승 난다고 했다. 정승 집안에서 정승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경의 가문은 4대 동안에 다섯 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선조 때 인물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정승이 된 케이스로 황희와 황수신, 이인손과 이극배, 정창손과 정괄, 홍언필과 홍섬, 정유길과 정창연을 들고 있다. 정유길이 앞서 언급한 정광필의 손자였으므로 크게 보면 정광필에게서 3대 정승이 이어졌던 것이다.

 

또 하나 정승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진을 키우는 일이다. 조선 시대 때는 벼슬이 3품에 이르면 관상서를 읽지 않아도 스스로 귀인(貴人)을 알아본다고 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도 등장했던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연산군을 축출시킨 반정(反正)트리오의 한 사람으로 자신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정광필을 추천했다. 또 정광필은 젊은 시절 이준경을 아끼고 보호했으며, 바른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넉넉한 마음씨의 정승 상진은 이준경을 천거해 정승의 자리에 올렸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