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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깊은 나무의 뿌리의 의미는?

풍월 사선암 2011. 11. 29. 18:45

 

용비어천가에서 뿌리가 깊은 나무의 뿌리의 의미는?

 

먼저 용비어천가의 창작 배경을 살펴보면 세종 29년인 1447년에 조선왕조의 창업을 칭송하기 위해서 정인지, 안지 등이 짓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을 달아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선지(1392) 불과 52년 밖에 안 된 시기입니다. 조선 왕조 초기에는 아직도 '고려' 왕조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특히 조선 왕조의 개창으로 몰락하게 된 고려 귀족 출신들의 반감은 매우 거세었을 겁니다. 게다가 건국 초기 논공행상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불만세력 또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태조 임금부터 태종 임금 까지는 정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칼로 다스리며 새로운 왕조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태종 임금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반대파가 제거되었기에 세종 임금이 빛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고 30년 가까이 흐르자 고려시대를 경험한 세대들은 거의 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정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50여년 밖에 안 된 왕조로써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는 여전히 남아있었겠지요. 언제 누가 군대를 몰아 '네놈이 언제부터 왕이었더냐.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앉겠다.' 라고 한들 자기네들도 역성혁명으로 옥좌를 차지한 마당에 반란을 진압하려 하더라도 명분을 올바로 내세우기는 뒤가 조금 구렸겠지요. 따라서 세종 임금과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 치세의 태평성대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종 임금의 6대 조상(목조 이안사-이성계의 고조부, 익조 이행리-이성계의 증조부, 도조 이춘-이성계의 할아버지, 환조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에서부터 쌓아온 공덕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이며, 옥좌 또한 이씨 왕가가 갑자기 칼을 내세워 왕씨 왕가를 몰아내고 차지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거로부터의 조상들의 공덕으로 인해 하늘의 뜻에 따라 전해진 것이라는 글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용비어천가' 입니다.

 

용비어천가는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에 해당하는 3장부터 109장 까지는 4절로 구성되어 첫 절에서는 중국 역대 제왕의 위업을 칭송하고 둘째 절에서는 6대조 중 한분의 업적 중 앞서 칭송한 업적과 유사한 업적을 칭송하여 결국 세종 임금이 왕위에 앉아 선정을 펼친 것은 중국의 역대 제왕들의 위대한 업적 못지않은 공덕을 쌓아 온 조상님들의 덕분이라는 식의 논리가 전개됩니다.

 

용비어천가의 그 유명한 2장 부분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

=>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면 문화가 융성하고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될 것이다.

=> 조선 왕조의 창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대에 걸친 조상님들이 쌓아 온 공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임을 은유적으로 표현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므로 냇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 유서가 깊은 나라는 내우외환을 겪더라도 왕권이 끊기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어 발전한다.

=> 역시 조선은 불과 60년도 안 된 나라가 아니라 백년 넘게 조상님들이 중국 제왕들의 업적에 비견될 만 한 공덕을 쌓아 이루어진 나라로서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은유적으로 표현

 

만일 용비어천가가 109 장으로 끝났다면 용비어천가는 최초의 한글 작품이라는 점 이외에는 아무 가치를 갖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가 훌륭한 이유는 바로 물망장(勿忘章)’(110~124)졸장(卒章)’(125)이라 불리 우는 뒷부분에 있습니다. 바로 물망장과 졸장은 후세의 제왕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옥좌가 훌륭한 조상님들의 공덕으로 인해 전해진 고귀한 자리이니 만큼 조상님들의 정신을 잊지 말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처신하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쳐 왕조를 오래 오래 훌륭하게 지켜 나가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 '주거를 호화롭게 하지 말 것, 좋은 음식을 탐하지 말 것, 형벌을 마음대로 하지 말 것,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말 것, 아부하는 간신들을 멀리 할 것, 백성들의 언로를 막지 말 것,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어 나라의 근본을 다질 것, 바른말 하는 신하를 중시할 것, 학자들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할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 등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는 곧 당대의 석학들인 집현전 학사들이 유래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고 나이도 지긋해진 세종임금에게(당시 51세 가량) '조상님들은 많은 공덕을 이루었으며 현재의 태평성대는 그 분들의 공덕에 하늘이 감동하여 내려준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더 선정을 펼치도록 노력해라' 라고 쓴 소리를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시대인 요즘도 아랫사람이 싫은 소리를 하면 찡그리는 '윗 어른'이 많은데 절대 왕권 시대에 신하들의 쓴 소리를 책으로 엮어 후세에 남긴 세종임금은 역시 성군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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