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단돈 천원' 외치며 지하철 누비는 당신, 그 서글픈 어깨

풍월 사선암 2012. 1. 7. 12:12

"단돈 천원" 외치며 지하철 누비는 당신, 그 서글픈 어깨

 

소설가 해이수

소설가 해이수, 지하철 행상 박진철씨에게

"세상에 하찮은 직업은 없지요 사람을 직업으로 판단하는 하찮은 사람이 있을 뿐이죠"

 

2년 전 여름부터 당신을 봤습니다. 당신은 마른 체형에 늘 짧게 이발을 하고 잘 다린 바지를 입고 다닙니다. 풍상을 겪은 탓에 얼굴은 다소 까칠하고 이마엔 주름이 깊지만 저와 나이 차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한 손에 들린 작은 수레는 얼마나 길을 잘 들였는지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생명체로 여겨질 정도지요. 제가 물병 덮개, 토시, 무지개 우산 등을 구입한 단골인지 당신은 모릅니다.

 

출퇴근 시간대를 벗어나면 지하철은 한산해집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 아이와 동승한 아주머니들, 오후 강의를 들으러 가는 대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간이지요. 내부의 공기는 갑갑하고 안내방송은 졸리고 승객들은 권태롭게 앉아서 목적지에 닿기만을 기다립니다. 특히 한여름에는 그 지루함이 이를 데가 없지요.

 

그렇게 지루한 틈에 당신은 손수레를 끌고 등장했습니다. 독특한 억양으로 멋들어지게 인사하는 모습이 노련한 희극배우 같았습니다. 당신은 '미용 오이 칼'을 허공에 쳐들고 주위의 시선을 모았지요. 그리고 대뜸 그것으로 얇게 썬 오이 두 장을 양 볼에 연지처럼 착 붙이고 설명을 시작하더군요.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그 칸에 앉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지요.

 

당신이 좌중을 뒤흔들고 사라진 뒤에 승객들의 손에는 탤런트 김태희도 애용한다는플라스틱 오이 칼이 들려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상품을 샀지요. 그 이유는 손쉬운 미용효과, 반영구적 사용, 국산제품이라는 홍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승객들이 앞다투어 당신의 물건을 구입한 까닭은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을 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요, 천 원짜리 상품을 그렇게 흥미롭게 파는 상인은 처음 보았지요. 당신은 질서를 위반하는 상인이라기보다는 아트 퍼포먼스를 하는 거리예술가와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지불한 단돈 천원은 그 공연의 티켓이었던 셈이지요. 당신이 옆 칸으로 옮겨가자 승객들은 고개를 쭉 빼고 당신의 퇴장을 아쉬워했죠. 그리고 그곳에서도 연이어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은 한 칸에서 절대 2분을 넘기지 않더군요. 1분 동안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간결한 제품 안내, 1분 동안의 다이내믹한 판매를 한 뒤 유유히 사라지더군요. 지상의 고단한 삶을 사는 서민들에게 그 지하의 퍼포먼스는 찬물 한잔을 마신 듯한 청량감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당신을 ‘2분의 승부사혹은 코레일 즉흥 아티스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소음과 불쾌감을 주는 행상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판매 전략이나 전술을 익히지 못한 견습생들이겠죠. 또한 당신의 일을 하찮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사람을 본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혹자는 지상에서 반겨주지 않아서 지하에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을 부지런히 사는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하찮은 직업은 없습니다. 그것을 하찮은 직업이라고 여기는 하찮은 사람이 있을 따름입니다. 설령 이 세상의 눈에 당신의 일이 하찮게 보일지라도 제게는 당신이 전혀 하찮게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파는 물건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신의 일은 결코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장소를 매일 찾아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는 작업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당신은 승객의 마음을 바꿔놓을 뿐만 아니라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둔 지갑을 자발적으로 열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 결국엔 당신을 환영하게 만드는, 누구나 쉽게 얻지 못할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 기술을 발전시켜 새로운 분야에 적용하는 날을 상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이도 예상치 못한 성과를 이뤄 내리라 믿습니다. 새해가 밝아옵니다. 어쩌면 지난해보다 더 각박할지 모르나 당신이 그동안 서민들에게 뿌린 웃음과 활력이 그대로 당신에게 돌아가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부디 건강하시기를.

 


 

불법과 밥벌이 사이 숨바꼭질지하철 행상들, 꿈에서도 쫓긴다

 

[공감그들의 서글픈 뒷모습]

승객들은 냉대 - 물건 팔러 여성에 다가서면

벌레라도 닿은 양 몸서리노인은 "새파란 놈이" 꾸짖어

경찰에겐 도망자 - 단속에 걸리면 과태료 10만원, 공무원같은 사람만 봐도 도망

 

서울시 등 유관기관은 서울 시내 지하철 행상이 최소 1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지하철 행상들은 전문적으로 물품을 공급하는 업체들로부터 물건을 받아 승객들에게 마진을 붙여 파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지하철이 덜 혼잡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 주로 활동하고, 행상마다 장사할 수 있는 노선과 구간도 따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조직적으로 운용된다.

 

주요 상품은 계절별로 다르다. 여름에는 휴대용 선풍기나 부채 등을 주로 팔고 겨울에는 보온용 레깅스(속바지), 버선, 손난로 등을 주로 판다. 10년 넘게 지하철 행상을 해온 정모(52)씨는 "구간별 지하철 행상끼리 모임도 있고, 구역 침범을 하면 다툼이 일어나는 등 나름의 조직과 룰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매일 수백명의 싸늘한 눈빛에 쫓기며 산다. 8년간 지하철 행상을 했다는 서모(45)씨는 지난해 여름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만난 한 여성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명품가방을 든 여성은 서씨가 휴대용 선풍기를 팔기 위해 다가서자 벌레라도 닿은 양 몸서리치며 자리를 떴다. 그때 그 여성이 서씨를 보던 눈빛은 '경멸' 그 자체였다. 서씨는 "가끔 그 여자분의 눈빛이 떠오르는 날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잊혀지지 않아서 잠을 이룰 수 없다""그럴 때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수십번씩 되뇐다"고 말했다. 가끔은 몇몇 노인들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할 게 없어서 이런 걸 하냐!"며 꾸짖기도 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지하철 2호선의 한 역사에서 지하철 행상 박진철(36·가명·왼쪽)씨와 소설가 해이수(39)씨가 만났다. 해이수씨는 박씨에게 오늘을 부지런히 사는 사람에겐 결코 부끄러운 직업이란 없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불법행위 근절 단속 활동에도 이들은 쫓겨 다닌다. 현행법상 지하철 행상은 불법이다. 철도안전법은 열차 내 물품 판매 및 배부, 연설, 기부 요청 등을 질서위반 행위로 규정하고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고 있다. 역사나 대합실 내에서의 무허가 판매에도 3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단속이다. 서씨는 "공무원처럼 보이는 사람만 타도 다른 칸으로 옮기거나 전동차에서 내린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하철 행상을 근절하기 위해 지난 9월부터 지하철 보안관제도를 운용하면서 집중 단속에 나서고 있다. 지하철 행상들이 주로 활동하는 서울 시내 지하철 1~4호선 구간에서 지난해 적발된 건수만 해도 82420건이다. 이 가운데 지난 해의 경우 과태료 이상의 처벌을 받은 경우는 3756건 이었다.

 

이 같은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행상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서울시 교통정책과 이승헌 주무관은 "당국이 매시간 모든 지하철을 단속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틈새를 노려 (행상들이) 계속 장사하고 있다""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불법적인 일을 그만두고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