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아! 김근태

풍월 사선암 2011. 12. 30. 23:48

 
용서하고 떠난 김근태고문 반성없는 이근안
 
17일간 5시간씩 고문당하고도
이씨 교도소 면회·사면요청도
이씨 인터뷰 거절전화 꺼놔
 
▲ 1988년10월 19일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국회 내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당한 고문을 증언하고 있다.
 
설 연휴 전날이었던 200527일 경기도 여주교도소 면회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하나가 펼쳐졌다.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198594일부터 920일까지 17일간 매일 5시간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 전 경감을 찾아가 옥중면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 상임고문은 20년 전 자신의 행위를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고문기술자를 만나고 온 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인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런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남영동 책임자였던 박처원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 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 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말을 과연 믿을까?” 이씨가 자수했을 당시 김 고문 고문사건의 공소시효는 지난 시점이었고, 납북어부 김성학씨의 간첩조작 사건 공소시효는 남아있었다.
 
▲ 김근태 의장을 고문한 이근안 전 경감이 공소시효가 지난 1999년 10월 자수를 한 뒤
그해 11월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 고문은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리고 있다면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이라고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 이근안씨는 지난해 1월 시사주간지 <일요서울>과 한 인터뷰에서 김 고문에 대해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 (옥중면회)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는 김 고문에게 가한 전기고문에 대해선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 2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는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출소 뒤 이근안씨는 2008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 12일 김 고문의 파킨슨병 사실이 알려진 직후 <한겨레>는 이근안씨에게 전화를 걸어 김 고문 병세를 설명하고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씨는 인터뷰 거절합니다. 제 일 하기도 바빠요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29일 김 고문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이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이씨는 기자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30일 김근태 상임고문이 사망한 날, 이씨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한겨레] 김도형 기자 / 2011, 12, 30
 


"김근태 장관에 진심으로 명복 빌어

내가 먼저 죽었어야기도하면서 울어"

 

고문했던 이근안씨 인터뷰

 

TV조선 제공 1980년대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72)씨가 지난해 1230일 고문 후유증 끝에 별세한 고()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에 대해 뒤늦게 추도의 뜻을 밝혔다. 이씨는 11일 경기도 수원에서 TV조선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김 전 장관 빈소를 찾지 않아 뉘우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 중에 내가 변명하는 것보다는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게 오히려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내가 나타나면 빈소가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김 전 장관의 명복을 빌었나.

"장례식 날에는 죽은 누이가 묻힌 부산 어방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면서 장관님하고 대화를 했다. '당신은 왜 먼저 가십니까. 차라리 한살이라도 더 많은 내가 먼저 죽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1995년 여주교도소 복역 중에 김 전 장관과 만나 사죄한 것이 가식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 장관과 만났을 때 '죄송합니다. 면목없습니다' 그랬더니 딱 끌어안으면서 '그게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것이지, 저도 그만한 아량은 있습니다'라고 하더라. 평생 잊지 못한다. 참 소중한 기억이다."

 

고문 피해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래서 평생 한을 지고 살고 있다. 내가 고문했던 것들이 괴롭지 않으면 목사가 되었겠나. 젊은 혈기에 상사가 시키는 일이 애국인 줄 알고 물불 모르고 했던 결과가 이제 송두리째 내가 안고 가는 멍에가 됐다. 그 수모를 내 가족이 함께 받아서 너무 고통스럽다. 둘째 아들은 심장마비로 죽었고, 셋째 아들은 재작년에 막노동을 하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셋째 아들은 내가 고문기술자라고 낙인찍히자 대학도 그만두고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지금은 아내가 폐지를 주워서 생활하고 있다."

 

김 전 장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

"모란 공원 묘소는 언제든 갈 겁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 무척 애석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시면 그 세상엔 멍에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영면하시길 충심으로 빕니다."

 

안형영 TV조선 기자 / 201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