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아빠도 없는 자식이…"에 욱한 아들

풍월 사선암 2011. 12. 30. 00:06

"아빠도 없는 자식이"에 욱한 아들

 

고혜정 방송작가

 

친구가 던진 말 한 마디에 달려들어 주먹질한 중3 아들, 친구 엄마에게 머리 조아린 뒤 먼저 떠난 남편을 원망했는데 "아빠가 불쌍하다"는 아이 말에 눈물 쏙 들어가고 마음 풀려편부모 아이 따뜻하게 대했으면

 

"철호 어머님이시죠? 저 철호 담임이에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10대 아들을 키우는 엄마는 이 심정을 알 거다.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오면 심장부터 뛰고, 입은 떨려서 말이 안 나온다.

 

",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근데 무슨 일로."

 

"철호가 글쎄, 싸움을 했는데."

 

! 그렇지, 좋은 일로 학교에서 전화가 올 리가 없지.

 

"많이 다쳤나요?"

 

"아니, 철호는 안 다쳤는데 같이 싸운 애가. 여하튼 어머님이 좀 와 보셔야 될 거 같아요."

 

사람들이 그랬다. 출산(出産)의 고통은 죽을 고생을 하다가 하늘이 노랗게 보여야 애가 나온다고. 그런데 나는 정작 애 낳을 때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지 않았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키우면서는 정말 하늘이 노랗고 어질어질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아들과 나, 같이 싸운 아이와 그쪽 엄마가 서둘러 만났다. 일단 우리 아들은 멀쩡히 걸어 들어오니 안심이었다. 그런데 같이 싸운 아이는 왼쪽 눈이 부어서 제대로 뜨질 못했고, 머릿속을 들추니 주먹만하게 머리털이 빠져 휑한 게 아닌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3인 아들과 그 아이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날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브라질로 유학 가는 친구의 송별식을 하러 갔다가 장난을 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우리 아들에게 '아빠도 없는 자식이'라고 말했고, 그 말에 욱한 우리 아들이 달려들어 주먹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힘이 쫙 빠지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3년 전에 위암으로 남편이 죽고 나서 나는 혼자 애 키우는 여자, 우리 아이들은 아빠 없는 아이들이 되었다. 나는 울컥한 마음을 누르고 아들에게 말했다.

 

"철호야,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런데 그건 네가 어쩔 수 없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그런 말에 좀 의연해질 수는 없겠니?"

 

그러나 아들은 친구 입에서 나온 '아빠 없는 자식'이란 말이 꽤 큰 상처였는지 그동안의 착하고 순하던 모습과는 달리 방언 터지듯 내게 대꾸를 했다.

 

"부모 욕하고, 나라 팔아먹은 놈은 때려도 된다고 했어요. 우리를 두고 가신 불쌍한 분인데 왜 돌아가신 우리 아빠를 들먹거려요? 자기 아빠는 언제까지고 살아계실 줄 알아요?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라고요."

 

"그래 맞아. 그런데 그렇다고 친한 친구를 저렇게 만들어 놨어?"

 

"엄마, 90이 넘는 놈이 저한테 끌려다니고 맞기만 했겠어요? 저도 맞을 만큼 맞았다고요. 저 자식이 다쳐서 피해자인 거 같지만 제가 더 큰 피해자라고요.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나보고만 잘못했대."

 

친구 엄마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두 손을 꼬옥 잡고 걸었다. 아들도 나처럼 먼저 간 그 사람을 생각하며 원망하고 울고 있었을까? 나는 아들에게 잘했다고도 잘못 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먼저 간 그 사람을, 그래서 우리에게 약점 아닌 약점을 만들어준 그 사람을 원망했다. 남편이 죽고 사람들이 나한테 과부니 미망인이란 말을 할 때면 그렇게 듣기 싫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맞는 말이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 왜 속상해해?' 누가 나한테 그러는 건 참고 이겨낼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그런 소리를 듣고 상처받을까봐 걱정했는데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식탁에 앉아 울고 있었다. 잠시 뒤 아들이 나와서 죄송하다며 다시는 그런 일로 싸우지 않겠다고 했다. 화가 나도 꾹 참겠다고 하니 내가 더 속이 상했다. 그래서 내가 "아빠가 미워. 너희 아빠가 진짜 미워"라고 말하니 아들이 말했다. "난 아빠가 불쌍해요. 우리 아빤 세상에서 우리를 제일 사랑했는데 우리만 두고 죽을 때 얼마나 맘이 아팠겠어.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 보면 속상하실 거예요."

 

나는 어느 순간 눈물이 쏙 들어가고 웃음이 났다.

 

"아들, 이렇게 속 찬 소리를 하는 놈이 친구는 왜 그 꼴로 만들어 놨어?"

 

"사나이니까. 사나이는 다 싸우면서 크는 거래요." 아이구 말이나 못하면.

 

요즘은 어떤 이유에서든 편모·편부 슬하에서 크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 아닌가. 아빠 없는 아이라서 또는 엄마 없는 아이라서 그렇다고 단정 짓거나 편협한 시선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그런 아이들을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많이 아프고 슬픈 아이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