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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뜨거운 인생-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자

풍월 사선암 2011. 12. 14. 07:54

[철강박태준 별세]

"선조의 피값(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자"

 

박태준의 뜨거운 인생

일본서 어린 시절 - 와세다공대 들어갔다 귀국

6·25 참전해 죽을 고비전쟁 뒤 육군대학 수석 졸업

포항제철 건설 - "난 고속도로 감독할 거야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

박정희 '종이마패' 건네

 

19718월 일본 도쿄. 4월 시작한 포항제철소 공장 건립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일본 미쓰비시의 설비 담당자는 박태준 당시 사장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없다"며 설비 발주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박태준은 굴하지 않았다.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태준은 "하루 무조건 700이상 콘크리트를 타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군복 차림으로 하루 3시간씩만 눈을 붙이고 쉴 새 없이 현장을 독려했다. 박태준의 철강 신화는 이렇게 막이 올랐다. 그는 19704월 공사를 시작한 지 32개월 만인 19736월 첫 쇳물을 뽑아냈고 25년 재임하는 동안 포스코를 조강 생산 2100t급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와세다 공대 입학6·25 참전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1933년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와세다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했다. 이후 1948년 육사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갔다. 6·25전쟁 때에는 포천 1연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박태준은 생사기로의 순간을 맞았다. 1950627일 박 회장은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부근에서 중대장 10명 중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살아남아 부대원들과 전선을 지켰다. 소련제 탱크의 소음을 들으면서 최후 순간을 각오했지만 이때 육군본부로부터 '한강 이남에 집결하라'는 전문을 받고 후퇴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박태준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친척 어른 소개로 부인 장옥자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녀는 신혼 휴가 뒤 서울로 떠나는 남편에게 첫 선물을 건넸다. 자기 은사인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 그것이 박태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만난 것이었다.

 

박정희 "자네가 제철소를 맡아"

 

1964년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미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경영 능력을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를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해외 출장을 나갈 기회가 있으면 선진 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박태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19656월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렀다. 박정희는 박태준으로부터 일본 철강업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은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라고 말했다.

 

대일 청구 자금으로 포스코 건설

 

박태준은 포항제철 건립에 착수했지만 문제는 1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이었다. 박태준은 19691월 한국과 워싱턴을 오가며 세계 5개국 8개 회사의 연합(KISA)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는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

 

박정희 "임자한테 내가 졌어"

 

종합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설립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박정희는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고 주장했고, 박태준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고 주장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체험했기에 민간 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와대에서 세 차례나 토론이 있었다. 줄담배를 태운 박정희가 마침내 말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박정희는 이후 박태준에게 전권을 준다는 의미로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 이른바 종이마패를 주기도 했다.

 

조형래 기자 / 신은진 기자 / 입력 : 2011.12.14 02:23

 


이나야마(신일본제철 회장) "중국은 제철소 못해"덩샤오핑 "박태준 수입하지 뭐"

 

국내외 평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 "한국이 군대 필요할 땐 장교, 경제 일으킬 땐 기업인, 비전 필요할 땐 정치인으로"

이병철 삼성 창업자 -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

 

"한국에서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

 

19788월 중국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일본 기미쓰제철소에서 한 말이다. 제철소를 둘러본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 이런 제철소를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덩샤오핑이 이유를 묻자,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이에 덩샤오핑이 농담처럼 '박태준 수입'을 얘기한 것.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해외에서 '박태준' 이름 석 자()'한국의 철강 기적'과 동의어였다.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는 포스코의 성공 요인을 "모험사업을 추진하는 리더로서 지도력·통찰력·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은 1992'포항제철의 경영 성공 사례' 연구에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1968IBRD(국제부흥개발은행)"한국의 외채 상환 능력과 산업구조를 볼 때 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라며 한국의 융자 신청을 거절했다. 당시 IBRD 실무 책임자였던 존 자페는 1986년 박태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 보고서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을 신조로 삼았던 박 명예회장의 애국심에 대한 평가도 많았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장교로 투신했고,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됐으며, 미래 비전이 필요할 때 정치인이 됐다""박태준에게는 한국에 봉사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었다"고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도 "박태준은 냉철한 판단력과 부동의 신념, 정의감으로 한·일 양국의 협력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박 명예회장을 "경영에 관한 한 불패의 명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박태준 회장은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이라며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라고 칭찬했다.

 

진중언 기자 / 입력 : 2011.12.14 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