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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참전용사가 의사당 지키는 美國, '5000원의 나라' 국회에는 몇 명이나…

풍월 사선암 2011. 10. 19. 07:52

[기자수첩] 80대 참전용사가 의사당 지키는 美國, '5000원의 나라' 국회에는 몇 명이나

 

37년째 보상금 5000원 누구도 문제제기 안해, 노병이 이 얘길 듣는다면

 

#1. 200710월 미 매사추세츠주의 우스터시().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이 걸리는 작은 도시에서 '한국전 참전 기념 동상' 건립식이 열렸다. () 차원 행사가 아니라 6·25 참전 용사 출신의 실업인이 추진한 소규모 행사였다.

 

행사장 맨 앞줄엔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존 케리 상원의원이 앉아 있었다.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도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시간을 분() 단위로 끊어 쓰는 정계의 거물이다. 주최 측은 2002년 제2연평해전 전사자인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를 두 의원의 옆에 앉게 했다. 외국인이지만, 최근에 사망한 전사자를 추모한다는 의미였다. 김씨는 "어떻게 전사자를 예우하는 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2. 군 복무 하면서 알게 된 미군 장교 다니엘 아우트리씨와 1996년 미국을 여행할 때 일이다. 휴가를 받은 그는 여행 내내 사복을 입었다. 워싱턴 DC를 관광하는 날 아침에 그는 군복을 입고 호텔방을 나왔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워싱턴 DC에서는 군복을 입으면 더 예우를 받는다"며 웃었다. 링컨 기념관과 6·25 참전 기념비가 있는 내셔널 몰을 관광할 때 그처럼 군복을 차려입은 이를 수도 없이 만났다. 그가 살던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옛빌의 연방 하원의원 사무실에서는 "나라를 위해 수고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커피를 얻어 마시고 나왔다. 군부대 밖으로만 나오면 어떻게 해서든지 군복을 벗으려 하는 한국을 떠올렸다.

 

#3. 지난 13일 이명박 대통령이 미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할 때 6·25 참전 용사 출신 의원들이 호명됐다. 찰스 랭글, 존 코니어스, 샘 존슨, 하워드 코블 의원 등 4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든이 넘었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이들 외에도 존 매케인 전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베트남전 참전 군인 출신도 상당수 현역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 연방 의회는 유서 깊은 로텐더홀에 전쟁포로·실종자를 상기시키는 깃발을 걸어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

 

기립박수 받는 6·25 참전용사 출신 의원들 - 지난 13일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연방하원 본회의장에서 6·25에 참전했던 의원 4명을 호명하자 일어난 존 코니어스 의원(가운데 왼쪽), 찰스 랭글 의원(가운데 오른쪽)이 동료 의원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6·25는 우리의 전쟁이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싸운 전쟁이었다. 미국에선 6·25 참전자 4명이 현역 의원으로 활동하는데 우리 국회엔 6·25 참전 의원이 한 사람도 없다. 베트남전쟁 참전자도 쉽게 찾을 수 없다.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퇴물 취급하는 풍토도 문제겠지만 우리 사회엔 참전자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 자체가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정부가 6·25 전사자 유족에게 보상금으로 5000원을 주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37년째 그렇게 해왔는데도 언론을 포함해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피흘려 우리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나라라면 이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를 폄훼하고 매도하는 것을 잘난 것인 양하는 풍조마저 만연하고 있다.

 

5000원이면 미국 돈으로 4달러 가 약간 넘는다.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이름을 불리고 감격했을 미국의 참전 노병 의원들이 '한국의 4달러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죽어서 4달러를 남긴 그 한국 군인들은 미국 노병 의원들의 전우이기도 했다. 그들이 세계 10위권 경제 국가에서 벌어지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듣지 않게되기를 바랄 뿐이다. < 이하원·정치부 / 입력 : 2011.10.19 >

 


 

[나라 위한 목숨값 5000] 가족 잃고 구걸, 글도 못배웠는데나라가 5000원 내미나

 

'오빠 戰死 보상금 5000' 판정받은 김명복씨

 

"어떻게 나라가 이럴 수 있나?"

 

오빠의 전사(戰死) 대가로 국가로부터 '5000원 보상금' 판정을 받은 김명복(63)씨는 하염없이 울먹였다. 17일 경남 김해 에 사는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세상천지에 대한민국 이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을 반복했다.

 

김씨 가족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김씨는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이, 구걸하다시피 생계를 이어야 했다고 했다. 수화기를 통해 건네오는 그의 목소리는 그 세월이 온통 묻어 있는 듯 했다.

 

6·25전쟁 때 전사한 오빠의 사망 보상금을 신청한 김명복(63)씨가 지난 4월 창원보훈지청으로부터 받은 군인 사망 보상금 지급 안내 통지서(왼쪽). ‘지급금액 5000이라고 적혀 있다.

 

김씨는 1948년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해변 마을에서 1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505월 지병으로 먼저 떠났다. 한 달 뒤 6·25 전쟁이 터졌고, 당시 포항고등학교 3학년인 오빠 김용길(당시 18)씨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며칠 뒤 군대를 갔다.

 

김씨는 "(군대 가러 모인) 운동장에서 오빠는 저를 등에 업은 어머니에게 '동생들이 너무 불쌍하다' '금방 돌아와서 취직해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겠다'고 말한 뒤 전선(戰線)으로 갔다고 들었다"고 했다. 김씨 가족도 곧바로 피란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폭격을 만나 언니 둘이 죽었다. 모친 등에 업힌 김씨만 살아남고 뒤따르던 언니들은 죽은 것이었다. 며칠을 앓아누운 어머니는 그 뒤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정신질환이었다.

 

모친과 함께 경북 영덕의 산골 마을로 피신한 김씨는 이때부터 남의 집 밭일을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했다. "엄마 손 잡고 이 집 가서 한 그릇 얻어먹고 또 저 집 가서"라고 했다. 김씨는 "어머니와 함께 길을 가다가 누군가 '미친×'이라며 던진 돌멩이에 맞아 울었던 기억도 난다"고 했다. 학교는 다니지 못해 지금도 문맹이다. 열 살 때 마을 이장에게 입양이 됐고, 그때부터 50년간 '()'로 살았다. 10대 중반에 홀로 부산으로 건너가 미용실에 취직한 그는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어머니를 모시고 시집을 갔다.

 

김씨는 1996년 모친으로부터 오빠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는 "엄마가 그 해 정신이 잠시 맑아져, 제게 '네 오빠 이름은 김용길이다. 네가 꼭 찾아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며칠 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때부터 김씨의 '오빠 찾기'가 시작됐다. 국방부 와 보훈처 를 수차례 찾았지만 "오빠의 군번(軍番)을 알아오기 전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김씨는 2006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민원실을 찾았다. "이름은 김용길, 고향은 경북 영덕군." 간단한 신상 정보를 대자, 10년간 국방부와 보훈처가 찾지 못한 오빠의 행방이 나왔다. '일병 김용길' '19501124일 경기도 가평에서 전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김씨는 "듣자마자 감격스러워서 주저앉아 울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8년 재판을 통해 원래의 성을 되찾았고, 그해 12월 보훈처에 유족 등록 및 사망보상금을 신청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보상금 청구 기간 5년이 지났다"며 이를 거부했다. 소송 끝에 보훈처는 지난해 6월 김씨를 유족으로 인정하면서도 보상금 지급은 "국방부 소관이니 국방부에 문의하라"고 했다. 국방부에 찾아가니 "보훈처 업무"라고 했다. 김씨는 "법원 결정이 났는데도 두 기관은 계속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만 하다가 올해 대뜸 5000원 결정 통지서를 보내왔다"고 했다.

 

김씨는 1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 5000원 보상 통지서를 받고 너무 어이없고 화가 나서 잠시 정신을 잃었었다"고 했다. "저같이 힘없고 배운 거 없는 사람이 무시당하는 건 세상 이치라 해도, 나라 지키려고 전쟁 나가서 죽은 오빠 같은 사람한테 나라가 어떻게 5000원을 줄 수 있습니까?"

 

김씨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오빠 찾기를 시작했지만 '까막눈'이 나라 상대하려니 막막해서 수백번 포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씨는 "유족에게 보상금은 일종의 위로금"이라면서 "5000원은 그동안 유족들이 겪은 고통을 비웃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 유족이 나처럼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는 일이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 비용으로 1000만원을 썼다. 이 돈은 제대한 아들을 위해 모아둔 등록금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김해에서 남편 남모(64), 12녀의 자녀와 살고 있다. 한때 미용실을 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지금은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