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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상에 눈가리개를 씌워야 하는 이유

풍월 사선암 2011. 6. 14. 08:41

정의의 여신상에 눈가리개를 씌워야 하는 이유

한쪽으로 기운 저울이 바로 설 때 당당히 눈가리개를 벗기자

 

여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의 영문 번역에 여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무부의 영문 이름 속엔 이 없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듯 우리나라도 법무부를 'Ministry of Justice'라고 번역한다. 법이 곧 정의요, 정의가 곧 법이기 때문이다. ,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 그 누구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공정하게 정의(Justice)’를 수호하고 구현해야 하는 정부 부처가 바로 법무부라는 의미다.

 

눈가리개를 한 Lady Justice. 김갑수

 

불편부당한 법의 집행과 판결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흔히 저울을 떠올린다. 얼마 전 방영됐던 법정 드라마의 제목 신의 저울이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나라 법원에 가면 곳곳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수평 저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최고 법정이랄 수 있는 대법원의 대법정 출입문 앞에 놓인 정의의 여신상또한 오른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이 곳곳에 만들어 놓은 자신들만의 정의의 여신상은 대부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대법원의 것이 나머지 한 손에 법전을 들고 있는 반면-사법 연수원의 여신상은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다른 나라의 경우 대부분 칼을 들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것이 눈을 뜨고 있는 반면 외국의 것은 대부분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와 율법의 여신들이 그와 같은 물건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데에서 비롯됐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율법의 여신 테미스(Themis)’와 그의 딸인 정의의 여신 디케(Dike)’, 그리고 로마 신화 속의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치아(Justitia)’-‘정의라는 뜻의 'Justice'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유래됐다-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각각 세월이 지나면서 세 가지 모두를, 혹은 최소 한두 가지를 지닌 여신으로 묘사되어 다양한 예술 작품 속에 등장했다. 그게 오늘에 와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공정하고 공평한 법의 집행을 상징하는데 비해, 칼은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추상같은 법의 권위를 나타낸다. 여기까진 크게 이의가 없다. 문제는 눈가리개다. 설이 분분하지만 원래는 눈가리개가 없었다는 얘기가 지배적이다. 신들이 법을 관장할 때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그 어떤 판결도 공평무사하게 내릴 수 있었지만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 온 다음부터 달라졌다는 얘기다.

 

,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없으니 그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는 의미에서 눈가리개를 씌웠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적이긴 하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법의 집행이나 판결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잘은 모르지만 영국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법정에서 섬기고 있는 정의의 상징이 칼과 저울을 들고 눈가리개까지 했지만 그 이름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닌 그저 'Lady Justice'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대체 우리나라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들이 대부분 눈가리개를 안 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로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저 편견을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가려놓은 것을 마치 장애를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가능성이다. 둘째도 비슷한 맥락인 바, 그것의 본래 의미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눈을 가리면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지극히 단순한 발상일 수도 있다. 끝으로, 그럴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굳이 눈을 가리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그들만의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대법원에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 있다. 김갑수

 

문제는 그 어떤 경우라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로 비추어 봐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이 평행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엔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분명히 한쪽엔 아주 무거운 금()이 잔뜩 놓여 있거나 누군가 매우 드센 힘으로 한쪽을 누르고 있어 완전히 그 균형감을 상실한 저울이라는 데 이의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에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부정부패 의혹들을 다루는 검찰과 법원의 행태가 그렇다. 일단 한동안 우리 사회에 거의 자취를 감췄다 생각했던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의 각종 부패의혹들이 불거지는 빈도수가 급증한 것도 문제거니와 마냥 정의로워야 할 우리의 법무부와 검찰의 자세와 태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균형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해 봐야 기껏 여야의 균형인데 그 또한 뭔가 의심쩍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선 한없이 관대하고 느슨한 반면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해선 인정사정 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엄청난 비리에 연루돼 처벌받은 뒤 현 정권 최고위층과 각별한 사이라는 이유 하나로 사면 복권되어 즉각 학생들을 가르치는 최고 학부 교수로 복직하겠다는 인사도 있었다. 그뿐인가. 재판이 끝난 지 얼마 됐다고 금융실명제를 위반하며 수많은 차명계좌에 엄청난 액수의 비자금을 굴린 것도 모자라 1천억 원이 넘는 세금을 탈루하고도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재벌 회장에 대한 사면론이 불거지고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어 경제회생과 올림픽 유치를 위해선 불가피 하다는 게 일각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법의 준엄함과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이래가지고 어찌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칼이 진짜 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무 하나도 자를 수 없는 장난감 칼을 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오죽하랴.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대한민국 정의의 여신은 또 어떤가. 심지어 누가 누군지 구별해 따로 따로 처분하려고 두 눈 부릅뜨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만큼 다양한 잣대에 의한 불공평한 법 집행과 판결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게 현실 아닌가.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마냥 정의로워야 할 법의 권위를 탄생의 단계부터 망가뜨리는 이들의 책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국회가 바로 그들이다. 날치기에 대리투표, 부정투표로 절차에 문제가 있으니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헌법재판소의 주문은 쇠귀에 경 읽기였다. 이번엔 4대강 관련 예산안 통과가 또 그랬다. 국토해양위원장은 바로 면전에서 이의 있다는 야당의원들의 문제제기와 그럴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토론과 표결절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의사봉을 두드려 버렸다. 어찌 법의 권위가 살겠는가.

 

이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대법원과 사법 연수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왠지 머쓱해 보인다. 한쪽으로 기운 저울과 무뎌진 칼날이 제격이건만 어울리지 않는 명품 옷을 입혀 놓은 듯 어색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국민을 향해 매일같이 법을 지켜라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여신상이 들고 있는 저울부터 바로 세울 일이며, 무뎌진 칼날을 갈고 닦을 일이다. 더불어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그녀의 눈에 눈가리개를 씌울 수는 없겠는가. 당분간이다. 우리가 진정 자신감에 넘쳐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중심을 잡았을 때, 그때 당당히 그 눈가리개를 벗겨내면 될 것 아닌가. 그 눈동자와 마주치는 게 마냥 힘들고 버거워 하는 말이다.

 

김갑수 시사평론가 기자

 


  

"정의(正義)의 여신상(女神象)"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

 

만인(萬人)은 법()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眞理)가 이 시대에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의료계에 [히포크라테스]상이 상징적인 의미라면 정의의 여신상 [디케]는 법조계의 상징물이다.

 

우리는 법()을 비교할 때 저울을 떠올리게 된다. 법을 상징하는 상징물인 [정의의 여신상] "디케"한손에는 부당(不當)함을 치유하는 [], 다른 한 손에는 인간들을 심판할 [저울]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어느 한쪽 편견에 휩싸이지 않도록 두 눈은 수건으로 가린 채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한변협(大韓辯協)과 법원(法院)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 칼 대신 법전(法典)을 들고 있으며 또 두 눈은 가리지 않은 아름다운 여인상이다. 원래의 [디케]가 약간 변형된 것이라 할수 있겠다.

 

저울은 죄와벌의 경중(輕重)을 다루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저울의 눈금은 결코 올려진 물건(物件)이 무엇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위에 올려진 물건이 값비싼 금이라고 해서 눈금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값이 싼 돌이라고 해서 눈금이 내려가지 않는다.

 

이렇게 올려진 물건이 무엇이던 간에 올려진 무게만큼만 눈금이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법() 적용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올려진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것이다.

 

십수년전 탈주범 사건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고 이들로 인해 온 언론(言論)과 경찰이 한바탕 난리를 치루었으며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이들중 권총을 소지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맨 마지막으로 검거된 지모라는 자가 검거 직전 했던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였으며 이 말은 곧 언론에 보도되며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희화화하는 풍자가 나올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한가지 말이 더 보태어졌다.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라는 말인데 이말 역시 어느 사건이라고 꼭 집어서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일반 국민들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법은 만인에게 평등(平等)하게 지켜지며 적용되고 있는 것일까? 법을 다루고 집행(執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우리나라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국가이다. 즉 모든 죄와 형벌(刑罰)은 법()에 정해진 테두리안에서만 논()할수 있다. 그런데 육법전서(六法典書)에도 없는 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괘씸죄]라는 것이다.

 

법을 다루고 집행함에 있어 감정이 개입되고 보복성이 짙은 수사 또는 판결을 말함인데 법을 다루는 이들도 인간인지라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과연 감정과 보복성이 개입된 법 집행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을 수 있을까?

 

정의의 여신상 디케가 눈을 가린 것은 저울에 올려진 물건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즉 바꾸어 말하면 내가 심판을 해야할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알 바 없다. 오로지 나는 법대로 심판을 할뿐이다. 이렇게 심판을 해야할 대상자의 신분이나 관계에 초연한 상태에서의 법 집행이야말로 공정한 법 집행이 아닐까? 우리나라처럼 학연,지연,혈연을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특히 냉철한 법 집행(執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법 조항에도 없는 이 [괘씸죄]가 권력자, 또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남용이 우려되는 것이다.

 

사건(事件)을 수사(搜査)하는 경찰(警察),검찰(檢察)이나 이를 판결해야하는 판사, 피의자나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사등 법을 다루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라도 "정의의 여신상"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를 직시(直視)하고 "()은 만인(萬人)에 평등(平等)하다"라는 이 평범한 진리(眞理)바로 서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이준용/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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