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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名에 담긴 '뿌리'를 뽑아내는 도로명 주소

풍월 사선암 2011. 6. 4. 08:19

[기고] 地名에 담긴 '뿌리'를 뽑아내는 도로명 주소

 

지난 4월 구청으로부터 도로명 주소 안내장을 받았다. "도로명 주소는 729일자로 고시된 후 법정주소로 사용되며 이후 각종 공부상 주소는 1231일까지 도로명 주소로 변경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453'인 우리 동네는 내년 1월부터 '서대문구 통일로 348'이 된다는 것이다.

 

도로명 주소가 도입된다는 사실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우리 동네가 홍제동이 아니라 통일로로 불린다니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구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홍제동이라는 이름은 이제 사라지나요?" "지적상에는 남지만 그 외에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홍제동 주민센터라는 이름은 뭐로 바뀌나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디 사세요?" "고향이 어디예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땅은 우리의 뿌리이고 지명(地名)은 그 뿌리의 이름이다. 땅이 기름져 벼가 잘 되는 마을인 화곡동(禾谷洞), 소나무로 둘러싸인 송내동(松內洞), 서해 소금을 배편으로 운반해 창고에 보관했다는 염창동(鹽倉洞),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도망가던 인조가 잠시 쉬면서 "오금이 아프다"고 해서 붙여진 오금동(梧琴洞)……. 도로명 주소는 지명에 들어 있는 인문사회, 역사문화, 자연환경적인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름이 사라지면 문화적 상상력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부천시 원미동을 무대로 소박하고 낯익은 서민들의 삶을 그린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부천로 사람들'이 돼야 한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였던 '평사리''악양서로'가 된다. 문화강국이 되기 위해 우리 것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할 판에 도로명 주소로 수백년, 수천년 동안 형성된 문화적 토양을 한꺼번에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한강대로 104가길' '통일로 37가길'에서 무슨 상상력이 나올까? '홍제천로 2나길''홍제내 2라길', '연희로 37''연희로 37안길'은 헷갈리지 않을까?

 

토지 지번(地番)을 토대로 한 현재 주소는 위치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분명히 있다. 새로 도입한다는 도로명 주소는 도로를 기준으로 삼아 특정 건물을 찾아가는 좋은 방법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로명 주소 작업이 시작되던 1996년에 비해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류비용을 줄여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제는 내비게이션 덕분에 초보 택배기사도 집을 찾기 쉽다. 스마트폰 시대다 보니 지번만 알면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엉클어진 지번 중 재건축·재개발로 정비된 곳도 많다.

 

구청에서는 이번 안내가 나가자 "난리가 났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예비 안내문을 보냈을 때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던 주민들이 실제로 바뀐다고 하니까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새로 도로명 주소를 외우려면 힘들다" "왜 수천억원을 낭비하느냐?"고 강하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결국 국민들의 반발에 밀려 도로명 주소 시행을 2년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늦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과연 문화적 뿌리까지 뽑아내고 시행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인지, 막대한 돈과 행정력을 투입해야 하는 우선순위 사업인지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땅의 뿌리를 잃고 '길에서 난 아이'가 되는 게 싫다.

 

양영채 ()우리글진흥원 사무총장 : 조선일보 2011.06.03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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