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박정희-전두환-노태우 32년의 再평가

풍월 사선암 2011. 5. 28. 23:39

 

유능, 청빈, 개혁적: 5·16 주체세력은 最强, 最良의 인재들이었다.

특히 박정희-김종필 콤비는 역사의 드림팀이었다.

 

1951韓國戰(한국전)이 진행 중이던 때로부터 5·16 군사혁명 전해인 1960년까지 해외(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군인(86%가 장교)들은 11506명이었다. 육군이 약 70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 기간에 민간인들이 해외 유학을 간 숫자는 군인들의 반도 안 되는 5423명이었다. 유학파 군인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조직경영, 기획감사에 대하여도 배웠다. 장교들은 미국식 선진 조직 경영술을 배웠다.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戰果(전과)를 올리는 게 전술의 핵심이듯이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거두는 게 회사의 목표이다. 이들이 배운 경영술은 근대화를 주도할 때 공무원과 기업을 경영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들은 1950년대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미국을 보고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이들이 6개월~1년의 연수를 끝내고 돌아온 조국은 부패, 무능,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히 이들의 가슴속에서는 국가 개조의 熱望(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5·16 주체 장교들은 대체로 유능하고, 청빈하고, 개혁적이었다. 이들은 최강의 조직이었을 뿐 아니라 最良(최량)의 인재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朴正熙(박정희)金鍾泌(김종필)은 최고 엘리트였다. 박정희의 武士的(무사적) 성격에 김종필의 유연한 머리가 더해졌다. 둘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룬 세 원훈, 金春秋(김춘추·무열왕), 金庾信(김유신), 文武王(문무왕)의 트리오에 버금가는 콤비였다. 교양과 추진력을 겸한 두 사람이 역사의 大勢(대세)’를 타고, 혁명을 지도하였으므로 無血(무혈)로 성공할 수 있었다. 쿠데타 때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박정희 18년의 혁명기도 비교적 순탄하였다. 박정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집권을 하였으므로 마음에 여유가 생겨, 엄청난 사회적 구조적 변화에 비교하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작년에 별세한 황장엽 선생은 無産者(무산자)無識者(무식자)이다. 무식자가 통치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폭력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有識者(유식자)가 통치하면 논리적으로 설득을 할 수 있으므로 피를 덜 흘리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20세기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 중에 거의 유일하게 경제개발에 성공,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틀을 놓았다. 민족주의적인 군인임에도 군사비를 동결하고 경제제일주의 노선을 선택, 外資(외지)도입을 추진, 對外(대외)개방전략과 수출立國 정책을 썼다. 다른 나라에선 군인들이 집권하면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수입代替(대체) 및 폐쇄정책을 쓰고 군사비를 늘리는 게 보통이다(그러다가 망하는 게 常例였다). 군인이면서도 세상을 넓게 깊게 본 경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44세에 집권했을 때 이미 중국, 만주, 일본, 미국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見聞(견문)이 넓었다. 김일성은 후진국인 중국과 소련에서 살았다. 李承晩(이승만)은 세계를 가슴속에 품은 이였다. 오늘의 남북한 차이는 불학무식한 김일성, 김정일과 교양과 배짱을 겸한 이승만, 박정희의 차이이다.

 

2011, 05, 15  趙甲濟

 

 

박정희-전두환-노태우 32년의 평가

"역사는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軍人출신 세 대통령들이 국가를 끌고 가던 시절 한국은 경제성장과 고른 분배 및 人權향상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19651980년 사이,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全斗煥盧泰愚(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100달러로서 말레이시아(271달러), 필리핀(169달러), 태국(115달러)보다 못했다. 軍人(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국정)을 운영하던 30여 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1960)로부터 15, 1인당 GNP에선 8330,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軍人출신 세 대통령들이 국가를 끌고 가던 시절 한국은 경제성장과 고른 분배 및 人權향상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朴正熙-全斗煥-盧泰愚 대통령은 1961~1993년의 32년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국가 경영자였다는 게 객관적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이 세 대통령의 在任(재임) 기간에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학생, 지식인, 언론은 민주화를 요구하고 민주화를 위하여 싸웠다. 이들의 민주화 노력은 세 군인출신 대통령이 독재화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군인 대통령이 안보와 경제를 튼튼히 하였으므로 민주화 세력은 나라가 망가지는 걱정을 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 싸웠지만 결과적으론 대한민국이 잘 되도록 경쟁한 셈이다. ,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從北세력은 이런 好評을 받을 자격이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군인 출신 대통령들을 독재자라고 매도하고 從北쓰레기들을 민주투사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다. 교과서가 이런 억지를 담고 있다. 세 군인 대통령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역사는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역사를 법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학을 수학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의 이런 성공은 군인에 대한 視角조정을 요청한다. 내일은 고려 무신란 이후 791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기념일이다. 50년 전의 이날이야말로 대한민국이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힌 날이다. 그럼에도 한 한국사 교과서는 5.16 단원을 "독재가 시작되었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선배 세대의 勞苦를 감사할 줄 모르고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수정되지 않으면 한국은 後進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교과서를 방치하면서 일본 교과서만 욕하는 나라이고 국민이고 정부이다.

 

뉴데일리 05/16 조갑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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