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피천득의 ‘인연’과 영화 ‘순애보’

풍월 사선암 2011. 5. 26. 01:15

[명작의 재구성]피천득의 인연과 영화 순애보

-2010 02/16위클리경향 863호-

 

국경을 뛰어넘는 아스라한 그리움

 

올해는 금아 피천득(1910~2007)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고운 우리말과 착한 심성으로 주옥 같은 수필을 남겼다. 수필가로서 피천득만큼의 명성과 찬사를 얻은 이는 우리 문학사에 전무후무할 것이다. 특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인연>은 금아와 일본 여성 아사코 사이의 아름답고 안타까운 인연을 소개한 국민 수필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 시기에 걸쳐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간, 은근한 그리움과 열정을 깔끔하면서 아스라한 문체로 담았다.

 

◀한국과 일본 간의 화해와 새로운 관계를 남녀 간의 로맨스란 구조에 담은 영화 <순애보>에서 남자 주인공 이정재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장면.

 

<인연>에서 와 아사코는 세 번 만난다. 아사코는 작가가 17살에 일본으로 유학갔을 때 유숙하던 사회운동가 미우라의 외동딸이다. 작가가 처음 만난 아사코는 성심여학원 소학교 1학년인 어리고 귀여운 소녀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아사코는 성심여학원 영문과 3학년에 다니면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논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했다. 세 번째 만남은 한국전쟁 직후였다. 주 일본 미군에 근무하는 일본인 2세와 결혼한 아사코는 남편의 오만한 성품과 세월의 풍상 속에서 나이에 비해 훨씬 늙은 중년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누구든 인연의 끈이 닿을 듯 말듯 놓쳐 버린 이성을 한 명쯤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금아와 아사코 사이의 인연이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런 감정의 보편성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불행한 역사를 겪은 상황에서는 쉽게 마음속의 말을 꺼내 놓기 어렵다. ·일 간의 민족 감정은 세기가 바뀌어도 녹록지 않은 앙금으로 남았지만 <인연>이 보여 준 순수한 감정의 교류는 아사코를 일본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느끼게 한다. 금아는 수필의 결처럼 단아한 삶을 살다가 97세를 일기로 조용히 이승을 떠났다. 그가 타계하기 몇년 전 한국 언론이 일본 성심여학원의 졸업앨범에서 찾아낸 아사코는 한눈에 보기에도 썩 미인이다.

 

피천득의 <인연>21세기 초입에 되살린 영화가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 (Asako in Ruby Shoes)(2000). 한국영화가 한류라는 이름을 달고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하던 무렵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수필 <인연>처럼 풋풋하고 순수한 분위기를 풍긴다. <순애보>에는 최초의 한·일 합작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 개최라는 이벤트에 맞춰 양국 합작으로 만들어지고 동시에 개봉했다. 한국의 쿠앤필름과 일본의 쇼치쿠가 7535로 합작했으며, 주인공으로는 이정재와 다치바나 미사토를 캐스팅했다.

 

최초 한·일 합작영화 <순애보>

 

<순애보>2000년대 한국과 일본의 일상을 교차해 보여 준다. 남자 주인공 우인은 동사무소의 말단 직원이다. 작품 초반에 그의 손가락 신경이 죽은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 두 차례나 나오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 마비됐음을 상징한다. 우인을 괴롭히는 것은 아버지와의 불화를 불평하는 어머니와 가출한 누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영화에 나타나지 않고 누나를 찾아다니는 매형과 조카만 나온다. 한편 여자 주인공 아야의 신분은 재수생이다. 그의 부모는 스와핑을 시도할 만큼 사이가 벌어졌으며, 남동생 유스케는 망가와 인터넷에 빠져 있다. 아야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가족은 자신의 생일에 숨을 참고 숨진 할아버지와 게이샤 출신의 할머니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우인과 아야의 일상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우인은 세금고지서를 배달하러 가지만 그것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심지어 고지서를 변기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그의 집 물탱크에는 금이 갔다. 전화 속의 어머니는 물탱크를 고치라고 채근하지만 우인은 계속 미루고, 위기는 점점 다가온다. 아야에게 있어서도 일상은 늘 지지부진하다. 아야는 재수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이 정작 원하는 것, 생일에 알래스카에서 할아버지처럼 숨을 참고 죽는다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학원을 나와 스포츠클럽 아르바이트로 취직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마저 쫓겨남으로써 꿈의 실현은 계속 미뤄진다.

 

 

◀<인연>을 쓴 수필가 피천득이 세상이 떠나기 2년 전의 모습. 아래사진 아사꼬 

 

이들은 일상에서 느끼는 곤경을 가상성(virtuality)을 통해 돌파하고자 한다. 우인에게 인터넷은 유일한 도피처다. 밤에 포르노사이트를 보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생활이다. 어느 날 원더원더랜드란 사이트에서 구두 신은 아사코란 메뉴를 보는 우인에게 어린 조카가 다가오자 그는 얘네들은 음삼촌이 외로울 때 나타나서 위로해 주는 거야라고 둘러댄다. 아야에게도 인터넷은 그의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통로다. 스포츠클럽에서 실직한 뒤 우연히 포르노사이트 모델을 찾는 광고를 보게 된 아야는 빨간 구두를 신은 아사코’(영어제목)란 포르노 모델로 출연해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아야가 꿈꾸는 알래스카는 모델 아사코가 환상적인 포즈를 취하는 순백색의 배경이다. 또한 일본에서 촬영한 아사코의 이미지를 받아서 가공해 주는 웹 디자이너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는 아야뿐만 아니라 우인의 정체성도 새롭게 구성된다. 우인은 현실에서의 무력감, 즉 직장생활의 따분함과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요리교실에 보조강사로 나오는 미아란 여성(나중에 동성애자로 밝혀진다)에 대한 좌절된 짝사랑을 인터넷에서 해소한다. 현실 속의 우인은 마비된 손가락 때문에 서류를 작성하면서 을 바꿔 놓아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다. 그러나 원더원더랜드에 접속한 그는 아사코의 이미지를 전후좌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인연>과 달리 <순애보>는 해피엔딩

 

이처럼 원더원더랜드라는 사이버 공간은 현실의 맥락을 제거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서울과 도쿄는 같은 시간이다라는 우인의 대사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양 도시를 넘나드는 실시간성은 이질적인 두 장소를 동등하게 만들어 준다. 양국 간에 쌓인 역사적 앙금, 경제적·문화적 불평등은 사이버 공간에서 효과적으로 해소된다. 두 사람이 각자 서울과 도쿄를 떠나 알래스카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은 양국이 새로운 관계로 접어드는 것을 상징한다. 아야는 소원대로 날짜변경선을 넘는 순간 숨을 참는데 커지는 숨소리와 잠깐의 암전이 지나간 뒤 다시 눈을 뜬다. 그런 아야의 앞에는 우인이 있다. 서로가 인연임을 알아챈 두 사람은 함께 알래스카로 떠난다.

 

이 영화 속에서 우인과 아야는 <인연>과 마찬가지로 세 번의 만남을 갖는다. 첫 번째는 아야가 집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펼쳐 본 옛날 앨범에서 밝혀지듯이 아야가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던 ‘1998년 경복궁에서, 한국 아저씨와 함께라는 사진에 찍힌 이미지로 만난다. 두 번째는 인터넷에서 포르노사이트의 소비자와 모델 관계로 만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인연>의 결말과 달리 <순애보>에서 세 번째 만남은 두 사람이 함께 알래스카로 떠난다는 점에서 해피 엔딩이다. 

 

화해나 화합의 메시지는 종종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으로 형상화된다. 한국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간의 지역 감정이 한창 심각했을 때 영·호남 커플의 결혼은 편견과 역경을 극복한 인간승리로 미화, 장려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일본의 남녀 간 결합은 양국 간의 정치적·경제적 대립을 경감하자는 뉘앙스를 띤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1965년 국교정상화를 이룬 뒤에도 양국의 화해는 요원한 일이었다.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 독도 영유권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등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이 양국의 국내 정치와 연관돼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경제적으로 만성적인 무역역조가 계속돼 왔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광복 이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국민정서를 악화시킨다는 이유 또는 우리 문화 콘텐츠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을 공식적으로 차단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 1998~2003년에 4차에 걸쳐 단계적인 개방 조치를 취한다) 같은 기간에 미국의 대중문화가 몰려들어 온 속도와 영향에 비춰 보면 그것은 실질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민족 감정을 앞세운 핑계란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치열한 유치경쟁에서 비롯된 유례 없는 월드컵 공동 개최, 전 지구화에 대항하는 지역블록으로서의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정치적 의제, 영화 <겨울연가>가 일으킨 한류와 한국문화에 대한 자신감 고조 등의 상황은 한·일 간의 로맨스를 가능하게 했다. <순애보>에는 이런 시대상이 녹아 있다.

 

한국 남성과 외국 여성의 로맨스

 

<순애보>처럼 의도적이지 않지만 <파이란>(2001)<역도산>(2004) 등 영화는 한국 남성과 외국 여성 사이의 로맨스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작품들이다. 두 영화를 만든 감독은 송해성이다. 그는 마초 남성들이 살고 있는 거친 세계와 그 세계가 갖는 페이소스를 표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녔으며, 한편으로는 강한 남성성을 보여 주기 위해 매우 전형적인 여성을 그려낸 감독이기도 하다.

 

<파이란>의 주인공 이강재(최민식 분)는 삼류건달이다. 친구 용식이 조직폭력배의 보스로 성장하는 동안 그는 나이트클럽 삐끼 신세를 면치 못할 만큼 그 방면에 소질도 없다. 지리멸렬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대신 살인죄를 뒤집어써 달라는 용식의 제안을 받고 배 한 척 앞세워 고향 땅을 밟고 싶은생각에 이를 허락한다. 그런데 파이란이란 여성의 부음이 날아들고, 그녀가 자신이 위장결혼을 했던 조선족 여성이란 데 생각이 미친다.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그치만 가장 친절한 건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파이란으로 나온 중국배우 장바이즈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남성들의 판타지 속에 살고 있는 순수와 선의 화신이다.

 

<역도산>에서 역도산(설경구 분)을 사랑하는 게이샤 출신의 아야(나카타니 미키 분) 역시 순정의 주인공이다. 배고픔 때문에 일본에 건너간 역도산은 스모계에 발을 들이지만 민족 차별 때문에 요코즈나 승급 심사에서 탈락한다. 역도산을 사랑하는 아야는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역도산은 자신의 꿈을 좇아 아야를 버려둔 채 미국에 건너가 프로레슬링을 배운다. 아야는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 프로레슬러로 승승장구하는 역도산이 점점 타락하는 데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국경을 뛰어넘은 남녀관계에서 지배자는 남성, 피지배자는 여성으로 은유되는 경우가 많다. 미군부대 주변의 기지촌,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은 단적인 예다. 그런데 <인연><순애보>는 피지배국인 한국의 남성이 우월한 국가인 일본의 여성과 인연을 맺는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구도를 뒤집는다. 양국 관계가 평형을 잡아 가는 과정에서 이런 식의 구도는 계속 사용된다. <겨울연가>의 배용준에게 열광하는 일본 중년여성들, 이서진과 이병헌에게 미소짓는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의 부인 미유키를 보면서 한국인들은 자부심과 통쾌함을 느낀다. 남녀관계를 국가 단위로 확대하면 이렇게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묘한 권력관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피천득 인연수필 아닌 소설” “아사꼬 실존연인은 아냐제자 석경징 서울대명예교수

 

수필가로 알려진 고() 금아 피천득의 대표작 인연은 수필이 아닌 소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아울러 인연에 등장하는 아사꼬라는 여인은 금아가 애타게 보고 싶어했던 연인이 아니며 단지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인연은 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유명했으며 여주인공인 일본의 아사꼬와는 세번 만나면서 연민의 정을 흠뻑 담은 자전적 수필로 묘사됐다.

 

스승의 날과 오는 25일 금아의 작고 4주기를 앞두고 그의 수제자 석경징(75)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대표적 수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면서 아사꼬의 상대역인 그 청년(피천득)은 약간 치졸하고 질투심 많은 것으로 돼 있는데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석 교수는 이렇게 된 까닭에 대해 “1959년 모 출판사에서 금아문선집을 발간할 때 시가 아닌 작품은 모두 수필로 분류하면서 소설로 쓴 인연도 그렇게 됐다.”고 해명했다. 또한 그는 선생님 생전에 인연을 소설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성격상 그냥 넘기셨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 재학시절 금아문선집출간 때 금아의 원고를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또 금아의 수필로 알려진 수필은 청자연적이요~’하는 것은 시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2011.05.26 [] /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