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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모르는 세기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풍월 사선암 2011. 5. 28. 00:42

포기를 모르는 세기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처칠의 리더십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기업인에게도 윈스턴 처칠(91, Winston Churchill, 1874~1965)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처칠은 어릴 때 부모에게 외면당했고, 그의 삶은 실패와 성공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91년 동안 영국의 군인, 기자, 역사가, 정치가(총리 역임), 작가(노벨 문학상 수상자), 화가로서 처칠을 지탱해 준 것은 올바른 목표를 정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념이었다.

 

처칠은 18741130일 옥스퍼드 근처의 블렌하임 궁(Blenheim Palace)에서 태어났는데,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인 이 궁전은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과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처칠의 8대 조상 말로보 공작 존 처칠(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 1650~1722)에게 하사된 대저택이다.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Lord Randolph Henry Spencer Churchill, 1849 ~1895)은 보수당 정치가로서 재무장관 및 하원의 보수당 당수를 역임한 인물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의 은행가이며, <뉴욕 타임스>의 대주주였던 레너드 제롬(Leonard Jerome)의 딸이었다.

 

1893년 처칠은 샌드허스터 육군사관학(Royal Military Academy Sandhurst)에 입학했다. 이는 3번의 도전으로 이룬 결실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입학 성적이 낮아 보병 병과가 아닌 기병 병과에 배정받았다. 다행히 기병은 처칠이 싫어하는 수학을 배우지 않아도 됐다. 1894년 군사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처칠은 동급생 150명 중 8등으로 졸업하고 1895년 소위로 임관하여 제4경기병 연대에 입대했다.

 

그해 휴가를 얻어 비공식적으로 쿠바로 건너간 처칠은 반란 진압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스페인군과 합류했다. 이때 관전기를 런던의 <데일리 그래픽>에 기고하면서 이 모험 여행의 비용을 충당했다. 처칠의 인간적 성숙은 학교 교육도 중요했지만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독서와 사색의 결과였다. 쿠바로 가는 도중 뉴욕에서 만난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 변호사 겸 정치가 부크 코크란(Bourke Cockran, 1854~1923)에게서 처칠은 연설과 말의 중요성을 배웠다.

 

군인과 기자 그리고 정치가의 길

 

1897년 처칠은 인도의 북서 변경 지구에 있는 파키스탄족의 진압 작전에 참여했는데, 이때 군인과 신문기자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 키치너 장군이 지휘한 나일 강 원정에도 군인 겸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1897년 정치가를 주인공으로 인도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 사브롤라(Savrola), 그리고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연과 저작 등을 발표해 2년간 약 1만 파운드를 벌었다.

 

189976일 면직물로 유명한 랭커셔의 올더햄(Oldham)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처음으로 출마했으나 보기 좋게 낙선했다. 이후 처칠은 14번의 선거에 출마해 성공과 패배를 거듭한다. 군인 처칠은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말밖에 없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 처칠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전쟁에서는 오직 한 번 죽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는다.”

 

낙선한 처칠은 곧 할 일을 찾았다. 189910월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처칠은 <모닝 포스트>지의 특파원으로 종전했으나 곧 포로가 됐다. 그러나 1212일 프리토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 다음 해 7월 영국으로 귀환해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190010월 올더햄 선거에 다시 출마, 드디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보수당 의원이었지만 독자적인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처칠은 보호무역주의적인 관세장벽을 제안한 보수당 지도층에 반대하여 자유무역을 주장했는데, 이를 계기로 1904531일 보수당에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가 이끄는 자유당으로 이적했다. 19061월 처칠은 맨체스터 서북 선거구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다시 당선되어 자유당 내각의 식민차관으로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디뎠다. 1908년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1852~1928) 자유당 내각에서 통상장관으로 임명되어 첫 국무위원이 되었다.

 

통상장관으로서 처칠은 복지국가적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자유당 당수 로이드 조지와 긴밀히 협력해 노인연금, 건강보험, 실업자 구제를 위한 직업소개소, 적정 임금제의 도입, 과중한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중립적인 공공기관의 설립 등에 공헌했다. 처칠은 부자에게 중과세를 부담시키려는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1909년 예산안을 반대하는 상원을 통렬히 비난해 보수당의 관계가 더욱 악화됐다. 또한 탄광 갱부와 철도원의 파업이 계속된 노동 불안 시기에 내무장관으로 재직 중이었던 처칠은 직책상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지방자치 단체가 내무부에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에 경찰을 파견했고 군대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1차 세계대전의 실패 경험

 

191110, 처칠은 해군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117월 독일이 포함 판테르호를 아가디르에 파견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모로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자 처칠은 영국이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처칠은 육군과 전략 조정을 위해 해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석탄 대신 중유를 연료로 하여 더 큰 대포를 적재할 수 있는 고속 전함을 건조했으며, 해군 항공부를 발족시켰다. 그 사이 처칠 자신도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영국은 191484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연합군과 독일군이 서부 유럽에서 참호전에 빠져 있었을 때 처칠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터키가 지배하고 있던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는 측면 우회 작전을 추진했다. 하지만 일명 갈리폴리 작전(Battle of Gallipoli, 1915~1916)이라 불리는 다르다넬스 작전은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한 영국 연방군 21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동료 정치인 및 군장교의 우유부단함 때문이었지만 처칠은 이 파멸적인 실패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애스퀴스 총리는 처칠을 해군부에서 배제한다는 조건으로 보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191511월에 사임한 처칠은 프랑스 전선에서 제6 로열 스코틀랜드 퓨질리어 연대를 지휘했다. 19166월 처칠은 의회에 복귀했고, 19177월 총리가 된 로이드 조지는 처칠을 군수장관으로 내각에 참여시켰다. 군수장관 처칠은 19171120일 처음으로 전차를 제작 실전에 배치했다.

 

19191월 처칠은 공군장관 겸 육군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반 볼셰비키주의자(반 레닌주의자)인 처칠은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에 보급품과 8,000명의 의용군을 파견했으며 러시아에 연합군을 개입시켰다. 이런 조치로 처칠은 볼셰비키주의를 추종하던 영국의 노동자들로부터 또 한 번 적대감을 샀다.

 

1921년에 처칠은 식민장관이 되어 이라크와 요르단의 정치를 안정시켰다. 같은 해에 수립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를 원조했고, 아일랜드의 내란이 비교적 안정된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영국 국내 정치의 위기가 심화되자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로이드 조지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보수당 연립정부는 붕괴되었다. 보수당은 192211월 총선거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획득한 반면, 연립정부를 지지하면서 입후보했으나 맹장염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못한 처칠은 던디 선거구에서 1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낙선했다.

 

의회를 떠나 있는 동안 50줄의 처칠은 은퇴 생활을 미리 했다. ‘미리했다는 말은 처칠이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하고는 죽을 때까지 은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칠은 1923년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쓴 자전적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세계의 위기(The World Crisis)를 쓰기 시작해 1931년에 출판했다. 아마추어 화가로서 그림에도 열정적이었는데, 화가로서의 그의 이름은 찰르 마린(Charles Marin)이었다. 또 처칠은 벽돌 쌓기를 즐겼다.

 

192411월의 총선거에서 처칠은 보수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보수당 당수 볼드윈(Stanley Baldwin, 1867~1947)은 처칠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재정 문제에 있어 처칠은 엄격한 정통주의를 고수했다. 처칠이 영국의 파운드화를 금본위제로 복귀시키자 경제학자 케인스는 처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금본위제로의 복귀정책은 디플레이션, 실업, 광부의 파업, 1926년의 총파업 등을 야기했다. 파업이 절정에 이르고 런던의 거의 모든 신문사가 폐쇄되자, 정부의 견해를 옹호하는 영국 관보(British Gazette)를 직접 출간했다. 19296월 보수당 정부가 무너졌을 때 처칠은 노동당 소수 정부와 협력하려는 보수당 당수 볼드윈에게 반대했다. 처칠과 볼드윈의 관계는 특히 처칠이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승인하자는 볼드윈의 제안을 비난했을 때 더욱 악화되었다. 1930년대 내내 처칠은 의석은 보유했으나 내각에서는 제외되었다.

 

대 독일 강경론과 유화론

 

그 무렵 처칠은 점차 독일의 재무장 위협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처칠은 특히 영국 공군은 독일 공군에 비해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정계는 대() 독일(히틀러) 강경론자와 유화론자로 나누어 있었는데, 둘 다 전쟁을 방지함으로써 민주적 사회를 유지하려고 하는 시도는 헛수고로 보았다.

 

강경론이 그렇게 본 것은 전쟁을 막는 조건이라면 무엇이든 양보해야 하는 사회 체제는 사회로서 유지될 가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고(마치 북한의 전쟁 도발을 막는다면 무엇이든 양보하겠다고 하는 것은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유화론은 전쟁을 치르게 되면 현재의 민주적 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것이 더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화론자 체임벌린은 결국 히틀러가 더 큰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으로 작은 전쟁의 위협을 양보했다. 1938930일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뮌헨 회담을 체결하고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히틀러에게 넘겨주었다. 그 지역의 소수 주민인 체코인은, 모든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했다. 체임벌린 수상은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막았다고 주장했으나, 처칠은 그것을 전면적이고 완전한 패배라고 비난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히틀러는 이를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대공황과 실업 vs. 자유와 평등

 

2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정치적 분위기가 유화론과 전체주의로 흘렀듯이, 경제 분야에서는 다른 것 모두를, 즉 자유와 평등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른다 해도 경제적 악마(대공황과 실업)만큼은 반드시 퇴치해야 한다는 견해가 득세하고 있었다. 마치 공황이 경제 발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 공황을 없애려면 경제 발전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유럽 대륙 전역에 점차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경제, 즉 국가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등장한 이유이다.

 

군국주의 경제는 산업사회의 겉모습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윤 추구를 배제하고 비경제적 성취를 더 명예로운 가치로 보는) 비경제적 사회적 목적을 수행한다. 히틀러는 기업의 고용주에게 어떤 자유나 기업 통제력도 허용하지 않았다. 고용주는 군국주의 체제의 명령이 자신의 개인적 경제적 이익을 무시하는 경우에도, 오직 사회를 위해서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게다가 고용주는 신체적으로도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이동의 자유가 없다. 경제적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공장을 폐쇄하는 것이든 생산을 두 배로 올려야만 하는 것이든 간에, 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칠의 등장과 세계 운명의 갈림길

 

전체주의라는 악의 세력에 대항해 맞서 싸운 유럽의 지도자로서 처칠의 등장은 정말이지 역사의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1939년 처칠은 한물간 사람이었다. 처칠은 1874년생이었으므로 이미 65세의 힘없는 늙은이였고, 선거에서 여러 번 떨어진 바 있어 공직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열정적인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을 지겹게 하는 사람이었다.

 

193993일 영국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날 체임벌린은 전쟁 경험이 많은 처칠을 해군장관에 임명했다. 철수, 노르웨이에서 영국 파견군의 패배,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입, 프랑스의 함락 등으로 체임벌린 등 뮌헨 회담에 참가한 영국의 정치인들이 책임을 지고 1940년 초 모조리 물러났을 때에도 처칠은 결코 당연한 총리 후임자가 아니었다. 당시 영국 정계에는 몇몇 사람들이 연줄을 동원해 총리로 임명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510일 결국 처칠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대가가 어떤 것이든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1940513일 처칠은 의회에서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영국민의 사기를 북돋는 훌륭한 연설을 했다. 그리고 64일에는 이런 연설을 했다.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들은 바닷가에서 싸울 것이다.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들판과 시가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구릉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 폭격기가 영국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드는 동안 처칠은 피폭 지역의 시찰, 훌륭한 연설,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V 사인으로 영국민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처칠은 현대 사회에서 리더가 가진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그 리더를 무리에서 돋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처칠의 업적은 능숙한 언어 실력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혁신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성취된 것이었다. 처칠의 명연설은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의 결과였다. 처칠은 이야기할 때 혀가 꼬부라지는 경향이 있어서 말수가 적었으나 이 결점을 교정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즉석에서 말하는 것이 서툴렀던 그의 명연설들은 미리 원고를 써서 암기한 것이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2차 세계대전 후 총리에서 물러난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다. 학생들은 이번이 70줄의 노 정치가의 마지막 연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가, 작가, 전쟁 특파원, 화가, 그리고 한 여인의 남편이자 또한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의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교훈과 충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칠은 30초 동안 청중을 묵묵히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학생들은 다음에 무슨 말을 더할 것인지 기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옥스퍼드 교수들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치가 런던을 공습하고 학교, , 성당 등을 폭격하던 그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그들 앞에 처칠이 시가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승리의 사인을 하며 나타났던 모습을 기억했다. 처칠은 천천히 그의 모자와 코트를 집어 들었다. 청중들이 깨닫기 전에 그는 몸을 돌려 무대에서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수갈채가 시작되었고 처칠이 사라지고 나서도 강당은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자료에 따라 “don’t give up!” 이나 “Never give in!” 또는 “Never give up!”을 세 번 말했다는 설이 있음.)

 

역동적인 노후 생활

 

194874세의 처칠은 대역사서 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5379세에 제6권을 완간했다. 19502월의 총선거에서 보수당은 패배했으나, 195110월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정권을 되찾았고 처칠은 1955년까지 두 번째 총리직을 지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3년 자신의 대관식에서 처칠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하고 가터 훈장을 수여했다. 같은 해 처칠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4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195545일 노령과 건강의 쇠약 때문에 사임하고, 앤터니 이든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도 처칠은 계속해서 하원에 의석이 있었으며, 1955년 가을 선거에서 81세의 고령으로 당선되었다.

 

처칠은 195682세에 또 하나의 주요 저작 영어 사용 민족들의 역사(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를 저술하기 시작해 195884세에 제4권을 완성했다. 더욱 만년에 처칠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6512491세로 런던에서 타계했다. 영국의 군인, 기자, 역사가, 정치가(총리 역임), 작가(노벨 문학상 수상자), 화가로서 91년을 산 처칠은 블렌하임 궁 가까이 있는 블래든의 교회 묘지에 양친과 나란히 묻혔다.

 

다윈의 주장을 신봉하고 또 인간이라는 동물을 잘 이해한 처칠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완전함을 기대하는 것은 성직자에게는 적절하지만, 총리에게는 적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