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좋은글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관용이 무엇인지

풍월 사선암 2011. 3. 9. 11:48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관용이 무엇인지

 

작곡가이자 명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리스트가

여행 중 어느 조그마한 도시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그곳은 리스트의 제자라는 한 여류 피아니스트가

극장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연다고 한창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리스트는 자신의 제자라는 소리를 듣고 무척 반기며

연주회 팜플렛을 구해 보았으나,

그 여류 피아니스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 젊은 여자가 자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을 빌지 않으면 저 같은 무명 음악가의

연주회에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이후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며,

또한 오늘밤 연주회도 당장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리스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음악실로 데려갔습니다.

리스트는 그녀에게 피아노 앞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그녀가 두려운 눈초리로 리스트를

쳐다보자 리스트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겁낼 것 없어요. 단지 아가씨의 연주를 한번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니, 긴장을 풀고,

무엇이든 자신 있는 곡으로 연주해 보아요."

 

마침내 결심한 듯 그녀는 전력을 다해 연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연주를 다 들은 후 리스트는 연주의 평과 함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방금 나에게 피아노를 배웠소.

이로써 나의 제자가 된 것이오.

그러므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밤 나의 제자로서 당당하게 연주회에 임하시오."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관용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 예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워해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리스트,

그런 넓은 마음이 있었기에 후세 사람들에게

대음악가로 추앙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대가가 되기 위해선

실력이나 지식만 가지고 있어선 곤란합니다.

그에 걸 맞는 인격과 풍모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정하의(내 삶을 기쁘게 하는 모든 것 들)중에서

 

 

 

리스트 탄생 200주년`피아노 황제` 에겐 3명의 여인이 있었다.

 

1800년대 중반 유럽에도 꽃미남 연예인을 방불케할 정도로 오빠부대를 몰고다닌 스타가 있었다.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1811~1886) 얘기다.

 

당시 유럽 사교계와 대중들에게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열린 그의 연주회는 항상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는 `피아노의 황제`라 불리며 당대의 어떤 피아니스트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아노 기교에 능했다. 연주회장에서는 감동한 여성 팬들이 너무 감격해서 환호하며 보석을 던지는가 하면 남겨진 그의 손수건을 귀부인들이 싸우며 찢어서 나누어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은 가냘픈 듯, 묘한 마력을 풍기는 꽃미남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 유럽의 여성들이 그의 재능과 외모에 마음을 빼앗겨 그는 가는 곳마다 스캔들을 일으켰다.

 

리스트는 1811년 헝가리에서 에스텔하지 후작에게 종사하던 아담 리스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와 집시음악, 종교음악에 흥미를 보였다.

 

1821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체르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당시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리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이듬해 성공적인 연주회를 통해 빈 귀족 사교계에 소개되고 여기에서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만나게 된다. 빈 연주회에서 베토벤은 어린 리스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고 하는데 훗날 리스트는 당시의 일을 "예술적인 세례를 받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그의 인생에 무수한 스캔들이 있었지만,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여자는 세 명이었다.

 

그의 첫 번째 여자였던 카롤린 생크릭은 그가 17세 때 피아노 교사로 일하다 알게 된 여제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생크릭 백작의 반대로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때 리스트는 회의와 염세주의에 빠져 종교에 입문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설득으로 책에서 위로를 받고 당대의 유명한 낭만주의 문인,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파리를 근거로 활동하던 위고, 라마르틴, 하이네를 비롯해 `환상교향곡`의 베를리오즈, 바이올린 명인 파가니니, 피아니스트 쇼팽 등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사랑은 1834년 파리 사교계에서 만난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었다. 이듬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가고 이들 사이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게 된다. 1839년부터 약 8년 동안 리스트는 전 유럽을 돌며 그의 화려하고 전설적인 연주 여행을 하게 된다.

 

1847년 러시아의 키예프 연주 당시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후 리스트가 죽을 때까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녀의 조언으로 연주 여행을 중단하고 이듬해 바이마르에 정착해 이때부터 약 12년간 많은 걸작들을 작곡한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리스트는 14년 동안이나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여러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고 1861년 마지막으로 그들의 결혼이 좌절된 뒤 리스트는 주로 로마에 머물며 종교음악에 몰두했다. 폭넓고 다양한 음악세계로 낭만주의 음악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리스트는 후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올해는 리스트 탄생 200주년인 해다.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세계의 많은 음악인들이 다채로운 음악 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리스트가 태어난 1022일은 `세계 리스트의 날`로 지정돼 지구촌 각 나라의 리스트협회들이 연대해 리스트의 오라토리오 `크리스투스`(Christus)를 연주한다. 이 작품은 무대에만 300여 명의 인원이 등장하고 연주 시간도 2시간 40분이나 되는 장대한 곡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날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국내 초연으로 이 뜻깊은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2011.03.04 [황윤하 한국리스트협회 회장]

 


Franz Liszt/Liebestraum Nocturn No.3 in Ab major, Op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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