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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일곱 명의 미국인들

풍월 사선암 2010. 12. 3. 12:36

 

잊을 수 없는 일곱 명의 미국인들

 

트루먼, 맥아더, 밴플리트, 무초, 릿지웨이, 에치슨, 워커.

6월을 맞으면서 한국인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미국인들이 있다.

 

제일 먼저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다.

6.25 남침 소식을 들은 그는 즉각적으로 미군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 결단으로 대한민국이 생존하고 있다. 韓民族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단 한 사람의 결심에 의하여, 그것도 외국인의 결정에 의하여 구제된 적은 없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전략적 가치가 약한 곳으로 분류한 뒤였다. 남침 당한 한국을 미국이 지켜야 할 약속도 협정도 없었다. 미군 수뇌부는 오래 전에 아시아 방어선은 알루샨 열도-일본-필리핀으로 족하다는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남침 한 해 전 駐韓미군을 철수시킨 것도 그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 결단은 기적이다. 그 기적의 상당 부분은 이 미조리 시골 출신 대통령의 순박하고 우직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유엔군이 서울을 내어주고 총퇴각할 때도 한국 편을 들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내 상당한 여론은 한국에서 유엔군이 철수하는 것을 지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를 믿고 함께 싸운 한국인을 버릴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버티었다.

 

두번째 은인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거의 모든 관계자가 반대하는 인천상륙을 성공시켰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유엔군과 국군은 戰勢를 역전시켜 北進을 개시했다. 맥아더 장군은 물론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北進통일 직전에 유엔군은 퇴각하고 한때 미국은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 수행 방법에 대한 異見을 노출시켰다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 맥아더, 트루먼 두 분은 6.25 전쟁으로 많은 곤욕을 치렀다.

 

세번째 은인은 매튜 릿지웨이 장군이다.

중공군의 침략으로 서울을 내어주고 퇴각한 유엔군은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숨지는 惡運을 만났다.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이 육군참모차장이던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공수사단장이었다. 노르만디 상륙전 때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던 맹장이다. 그는 유엔군의 후퇴를 수원선에서 멈추게 하고 반격작전을 통해서 휴전선까지 敵軍을 밀어 올렸다. 한국 포기론을 잠재운 쾌거였다. 릿지웨이가 반격에 실패했더라면 수원선에서 휴전이 되었던지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것이다.

 

네번째 은인은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6.25 남침이 일어나자 일본에 있던 8군 병력을 이끌고 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방어에 성공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의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그는 北進中 중공군의 침략을 맞아 잘 싸웠다. 1950년12월 말 의정부에서 그를 태운 지프차가 한국군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

 

다섯번째는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미군의 참전과 유엔군 파견을 성사시켰다. 그는 1950년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시사함으로써 김일성의 誤判을 불렀다. 이 연설에서 에치슨 국무장관은 "태평양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 방어선 이외의 지역에서 공격을 받을 경우 우선 공격받은 사람들이 싸워야 하고 모든 문명국가들이 유엔의 기치하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6.25 남침이 일어나자 에치슨은 이 유엔 참전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에치슨은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미국에 압력을 넣어 한국전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려 할 때 이를 저지했다.

 

여섯번째는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다.

유엔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릿지웨이 장군 후임으로 8군 사령관이 된 밴플리트 중장은 李承晩 대통령의 뜻을 잘 받들어 한국군의 입장을 고맙게 배려했다. 그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여 평양 폭격중 실종했다. 한국군을 强兵으로 키운 데는 밴플리트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에서 親韓 인사로서 활약했다.

 

일곱번째는 무초 駐韓미국 대사이다.

그는 6.25 남침 즉시 신속하에 워싱턴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하고 미군의 참전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인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李承晩 대통령과는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워싱턴의 정책수립 부서와 상대할 때는 한국의 입장을 많이 대변했다. 6.25 남침을 당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따나 大田으로 피하려고 할 때도 무초 대사는 "그렇게 하면 전선에서 싸우는 국군의 사기가 떨어진다. 각하가 떠나도 나는 남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무초 대사는 李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뒤에도 근무하다가 철수했다.

 

6.25 전쟁으로 약5만 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죽었다. 이들이 다 고마운 분들이다. 위에 든 일곱 명의 恩人은 그 대표적 인물일 뿐이다. 독재자의 침략을 받은 남의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自國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결정은 대통령 등 국가지도부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루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이 일을 해낸 이들이다. 더 고마운 것은 이들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한국을 구했다고 자랑하지도 않았고 알아달라고 한국인들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들 미국인이야말로 아낌없이 준 나무들이었다.